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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記·충·천

‘때극기’ 휘날리며

‘때극기’ 휘날리며

4월12일 일요일, 늘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서 ‘시체놀이’를 하던 중 불현듯 벌떡 일어나 거리로 나섰다. ‘이러다 봄이 그냥 달아나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무념무상으로 걷는 거리엔 봄 냄새가 물씬했다. 가로수엔 파릇한 새순이 돋았고 봄꽃들은 활짝 핀 채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벚꽃 잎이 바람에 날려 꽃무더기 이루는 광경을 보며 탄성을 지르는 순간, 가로등에 매달려 나부끼는 회색빛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태극기였다. 차량 매연과 봄 황사에 찌들어 시커먼 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태극기. 어른 키 높이 정도에 달린 태극기에 누군가 아이스크림까지 묻혀 놓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태극기는 가로등에 늘 꽂혀 있었다. 국기법이 바뀌었나? 국경일도 아닌데 왜? 이곳저곳의 태극기를 살펴보니 하나같이 기름때투성이다. 봄꽃에 들뜬 감정은 휑하니 간데없고 가슴에선 부글부글 분노와 함께 ‘기자적 본성’이 고개를 들었다. 관할구청을 거쳐 서울시,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로 차례차례 취재를 해나가니, 2월27일부터 4월13일까지 전국 가로에 태극기가 달려 있었단다. 4월13일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아 3·1절 직전부터 계속 태극기를 달았다는 것. 이 행사를 전국적으로 주관한 행안부 의정담당관실 관계자는 “올해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해라 청와대와 협의를 거쳐 행사를 진행했다. (태극기 관리를 잘하라고) 공문을 보내고 점검도 나갔는데 일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관할구청 담당자의 답변은 차라리 서글펐다.

‘때극기’ 휘날리며
“하루만 달아놓으면 기름때가 잔뜩 껴 소각해야 하는데 예산은 없고…. 중간에 구청 예산으로 한 번 갈았는데도 그래요. 매일 점검할 인력도 없고요.”

행안부의 설명처럼 올해는 특별한 해, 기념할 만한 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46일간의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기에 앞서 태극기를 매연과 황사로부터 보호할 방안 및 예산부터 마련했어야 한다. 이런 행사는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다. 발이 따라와야 한다.



주간동아 2009.04.28 683호 (p74~74)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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