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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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09-04-03 18: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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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요, ‘A군 리스트’가 교실을 한바탕 뒤집어놓았습니다.

    약간 지능이 떨어졌던 A군. 친구들은 곧잘 A군을 놀리거나 장난을 쳤습니다. 그날도 한 친구가 A군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재미있다고 웃고 있을 때, A군이 벌떡 일어서더니 공책을 들고 교무실로 갔습니다. 잠시 뒤 A군과 함께 나타난 선생님 손에는 그 공책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 명씩 교탁 앞으로 불려나갔습니다.

    “반찬 훔쳐먹은 사람, 김○○, 이○○….” “때린 사람, 최○○, 배○○….”

    A군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의 일을 노트에 빼곡히 적어둔 것이죠.

    “너희들은 A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너희 모두가 가해자인 것이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A군 리스트’에는 작은 중학교 교실의 치부가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일벌백계로 상황은 마무리됐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학창시절의 기억입니다.

    15년도 더 지난 2009년의 대한민국을 2개의 리스트가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장자연 리스트’와 ‘박연차 리스트’. 두 리스트는 성과 돈, 권력이 얽히고설켜 대한민국의 치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장자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나이 지긋하고 점잖은 분들은 딸 같은 배우를 만지작거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 딸은 제대로 교육받아서 이런 일 안 해”라고 어처구니없는 말은 하지 않았을지.

    ‘박연차 리스트’도 한숨을 쉬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비리 사실을 쏟아냅니다. 이때만큼은 여야 가릴 것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깨끗했다며 도덕성을 자랑하던 전 정권의 위선이 드러나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두 개의 리스트는 대한민국 1% 사람들의 ‘데스노트’가 돼버렸습니다. 리스트를 만든 사람과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누가 더 나쁠까요? 리스트의 존재 자체가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잘못한 점은 벌을 받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겠죠. 조금씩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있습니다. 과연 납득할 만한 수사 결과가 나올지 두 눈 부릅뜨며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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