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8

2009.03.24

여성의 성욕, 꽃보다 활짝 피었다

F4 미소년을 향한 누나들의 ‘미학적’ 사랑 커밍아웃

  • 김종갑 건국대 교수(영문학)·몸문화연구소장 jonggab@konkuk.ac.kr

    입력2009-03-20 15: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여성의 성욕, 꽃보다 활짝 피었다

    연상연하 커플을 다룬 2008년 방영작 ‘달콤한 나의 도시’(왼쪽)와 누나팬들을 브라운관 앞으로 불러모은 ‘꽃보다 남자’의 F4.

    ‘내 이름은 김삼순’ ‘올드 미스 다이어리’ ‘달콤한 나의 도시’처럼 연상연하 커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안방을 점령했다. 이제 시청자도 연상 여자와 연하 남자의 사랑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연상연하 커플의 ‘코드’는 단순히 유행을 반영한다거나 시청자를 자극하기 위한 억지 설정이 아니다. 이는 남녀의 성적 취향과 감수성의 변화를 동반하는 상징적 사건, 성적 지형의 지각변동을 알리는 예진이었다.

    그렇게 반복돼 나타나던 조짐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로 폭발했다. 지금까지 사화산으로 알았던 여성의 성욕이 이 드라마를 계기로 활화산처럼 분출한 것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4명의 미소년이 여성의 성감대란 뇌관에 불을 댕긴 셈. 얼마나 많은 (그들의 누나나 이모, 고모뻘이 될) 여성 시청자가 일손을 멈추고 그들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감상하며 탄성을 지르는가.

    연하남 드러내놓고 예뻐하는 단계

    시청자들이 ‘꽃보다 남자’에 열광하는 현상은 연상연하 커플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의 흐름을 우회하지 않으면 그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의 성욕은 이러한 우회로를 거쳐 마침내 스스로를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몇 해 전만 해도 여성 시청자들은 연하 남자를 사랑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소설에나 있을 법한 허구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드라마에 나오는 연상연하 커플이 늘어날수록 ‘가랑비에 옷 젖듯’ 자신도 모르게 여주인공과 동일시하며 연하남을 성적 대상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권위적인 연상의 남자들과 달리 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예뻐서 좋다. 이제 여성 시청자 스스로가 미소년을 드러내놓고 예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네 명의 미소년이 ‘미모’를 무기로 여성 시청자 앞에 선 것이다. 그렇다고 여성 시청자들의 성적 취향이 드라마의 영향으로 새롭게 빚어진 것은 아니다. 남성의 성욕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욕도 언제나 존재했다. 아름다운 이성에 탐닉하는 성적 취향은 남성의 배타적 전유물이 아니라 여성의 공유물이기도 했다. 다만 가부장적 역사가 제도적, 이념적으로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고 금기시함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듯이 취급했을 따름이었다.

    여자는 성적으로 무지하고 순진한 ‘동정녀 마리아’가 아니면 타락한 창녀인 듯 매도돼야 했다. 그렇다고 여성의 성욕이 완전히 억압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연하 남자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끼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모습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임을 여성 시청자들은 처음부터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과 입을 열어 언어로 표현하며 남들과 소통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과거 연하남을 보며 자신의 성적 취향을 ‘어렴풋이’ 느꼈던 그녀들은 ‘꽃보다 남자’의 유행과 더불어 이제 당당하게 자신의 성욕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의 성욕이 커밍아웃한 것이다.

    사실 ‘꽃보다 남자’라는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가부장적인 어법에 따르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반드시 여자여야 한다. 꽃이라는 어휘에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여성과 비교되는 꽃은 야생화가 아니라 온실의 화초, 세파에 시달리지 않고 바깥세상에 노출된 적 없기 때문에 순진하고 순수하기만 한 화초다. 화초에 물을 주고 가꾸며 보호해주는 것은 정원사의 몫으로, 정원사는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꽃은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

    여성들의 역할은 이처럼 수동적으로 사랑을 받는 데 그쳤다. 남자가 세상을 움직이며 활동적으로 일할 때, 여자는 붙박이처럼 가정을 지키며 아름다움을 유지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꽃보다 남자’라는 제목에는 그러한 남녀의 위계적 배치가 전복돼 있다. 남자가 온실의 꽃이라면, 여자는 세상을 움직이며 일하는 정원사다. 남자라는 꽃은 여자를 즐겁게 하고 빛을 더하는 장식품인 것이다.

    여성의 성욕, 꽃보다 활짝 피었다

    드라마 속에 등장한 연상연하 커플 트렌드는 누나들이 ‘미소년’들을 드러내놓고 좋아하는 ‘F4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2005년 크게 히트한 ‘내이름은 김삼순’(왼쪽)과 현재 방영 중인 ‘꽃보다 남자’의 한 장면.

    남자라는 꽃 여자를 위한 장식품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 F4는 ‘잘생긴’ 남자라기보다는 ‘아름다운’ 남자들이다. 이들은 사춘기를 거치기 이전, 즉 제2차 성징이 충분히 발현되지 않은 미소년들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 이러한 미소년들은 나이 많은 남자들(혹은 잘생긴 남자들)의 동성애적 상대였다. 엄밀히 말해 F4는 남자라기보다 중성적 존재에 가깝다. 이 점에서 F4에 열광하는 여성 시청자들의 성적 취향은 남성들이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남성적 성욕’의 대항적 개념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미소년은 남성적인 동시에 여성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리는 마마보이가 아니면서도, 아름다움에 탐닉하며 화장을 하고, 성공보다는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다. 이 점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적 남자들보다 미소년에게서 훨씬 많은 공감대를 발견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을 향한 여성들의 애정은 성적이면서 동시에 미학적이고 유희적이라고 말해야 옳다. ‘정복’을 지향하는 남성의 공격적 성과 달리 여성의 성은 좀더 다정하고 유희적인 것이 아니던가.

    ‘꽃보다 남자’는 여성이 성적 주체로 거듭나 자신의 욕망을 공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이제 여성의 성적 욕망 표현은 음담패설을 할 때처럼 은밀한 사적 공간으로 숨어들 필요가 없다.

    과거 여성들이 남성들의 성적 욕망의 대상에 불과하던 시절, 남자들을 직접 욕망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남성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봐야 했다. 그러나 이제 여성들을 짓눌렀던 성적 억압의 굴레가 벗겨지면서 자신의 성적 날개를 자유롭게 휘저을 수 있게 됐다. 혹자는 성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자본주의적 전략에 여성도 말려든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여성들이 당당한 주체로서 성적 욕망을 발견, 표현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앞으로 남성적 욕망의 판박이로 표현될지, 새로운 성적 욕망의 지평을 열지 지켜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될 듯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