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8

2009.03.24

上 善 若 水

  • 편집장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9-03-20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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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 善 若 水
    2000년 늦가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21개국 언론인, 정치인들과 한 달간 제43대 미 대통령선거를 취재했습니다. 수도 워싱턴D.C.와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매사추세츠 등 정치적 입김이 거센 지역을 돌며 정치인, 정당인, 정치학자, 정치 컨설턴트, 선관위 간부, 그리고 다양한 유권자 집단을 만났습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국무부 직원들에게선 민주적, 과학적 선거 시스템이 뿌리내린 정치 선진국의 면모를 보여주겠다는 자부심이 묻어났습니다.

    하지만 ‘정치 후진국’ 기자가 보기에도 엉성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투표용지의 후보자 이름과 기표 위치가 투표안내서와 달라 무효표와 오기표가 속출했고, 투표하다 말고 “표를 잘못 찍었다”며 새 투표용지를 집어가도 누구 하나 개의치 않았습니다. 선출 공직자 및 주(州)헌장 수정안 찬반 여부 등 기표항목이 30개쯤 되는 대형 투표용지를 앞에 놓고 7, 8분씩 머리를 싸매는 광경도 답답했습니다. 투표관리를 하던 할머니에게 “투표가 끝난 뒤 투표함은 어떻게 수송하느냐”고 묻자 “저녁때 우리 바깥양반이 쇼핑몰에 가는데, 그곳에서 개표소가 가까우니 가는 길에 내려놓으라 했지”라고 답해 할 말을 잊었습니다. 선거일 한 달 전까지 주 선관위에 서류를 제출하고 투표자 등록을 해야 선거를 할 수 있게 한 제도는 사실상 이민자 저학력자 저소득근로자 등 소외계층의 선거 참여를 제한했습니다.

    기우(杞憂)만은 아니었는지, 결국 사단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선거 다음 날인 11월8일 새벽 조지 W 부시 후보의 당선을 알리던 개표방송은 아침이 되자 앨 고어 후보가 선거인단 수에서 앞섰다며 ‘박빙의 승부(Too Close To Call)’라는 자막을 깔았습니다. 초유의 재검표 사태가 빚어진 것입니다. 당선자 정당의 축하파티에 참석할 예정이던 우리는 호텔방 TV 앞에 발이 묶였습니다. 다들 “국가 기강이 흔들리고 있다” “자만심이 무덤을 팠다”며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엉성한 시스템이 지금까지 제대로 작동해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미국인의 준법정신, 정직성, 인내심, 참여의식, 상호신뢰, 관용과 같은 미덕들이 허점투성이의 국가 시스템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기능하도록 만들었다는 평가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9년 후. 돈 앞에 양반은 없는 모양입니다. 불황의 뜨거운 맛을 보고 있는 오늘의 미국에선 그런 미덕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회간접자본 건설과 보수에 미국산 철강제품만 쓰게 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으로 혀를 차게 하더니, 어렵사리 합의에 이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못 받아들이겠다며 국가 간, 정부 간의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구멍 뚫린 내부 시스템을 손볼 생각은 않고 병인(病因)을 외부로만 전가하려는 오만과 무책임이 드러납니다. 물을 ‘물 흐르듯’ 하는 대신 역류시켜 말라붙게 할 미봉책입니다. 그나마 흘려보낼 물이라도 있을 때 물길을 바로잡아야 할 겁니다.

    上善若水. 물처럼 살아가는 게 최선의 길이라 했습니다. 끊기고 막히고 마르고 고인 곳 유난히 많은 우리 사회에서도 새겨야 할 금언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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