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5

2009.03.03

죽음보다 더한 실직 공포

사회안전망 허술, 실직 ‘시그널’ 예측해 충격 줄여야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9-02-27 09: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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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보다 더한 실직 공포
    ‘12월○일 ○시 본부장실로 오세요. 면담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초 중견기업에서 차장으로 근무하는 K씨의 휴대전화에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K씨는 별다른 생각 없이 시간에 맞춰 본부장실을 찾았다. 이 회사는 최근 경기침체로 줄부도를 맞고 있는 건설 관련 업계에서 그나마 잘 버텨오고 있었다.

    “회사가 무척 어렵습니다. 1년 무급 휴직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위로금조로 3개월치 월급을 더 받고 그만두시겠습니까?”

    순간 K씨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본부장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회사의 사정을 들은 K씨는 결국 3개월치 월급을 더 받는 것으로 결론 내리고 사표를 썼다. K씨는 올해 39세. 6세짜리 딸과 4세짜리 아들을 키우느라 매일 전쟁을 치르는 전업주부인 아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K씨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또 다른 중견기업에서 대리로 일하는 S씨는 지난 설 전날 황당한 일을 당했다. “전 직원은 강당으로 모이라”는 연락을 받은 직원들은 대부분 사장이 설을 앞두고 덕담이라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사장은 전 직원에게 사직서를 쓰라고 했다. 설 연휴 직후 사장은 직원들의 사직서를 선별 처리했다. S씨도 결국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경제위기와 고용불안 문제가 이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실업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통계청이 공식 집계한 1월 현재 실업자 수는 84만8000명, 실질 실업자 수는 346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실질 실업률은 무려 15%로 20명 중 3명꼴로 실업자인 셈이다.

    전 세계가 경제위기에 봉착한 현시점에 실업 문제가 비단 우리만 겪는 고통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실업자들이 다른 나라의 실업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정신적 충격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희망퇴직이나 이직 등 ‘자발적인 실업자’보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직장에서 쫓겨난 ‘비자발적인 실업자’가 당하는 고통은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전 세계적인 실업 고통, 그러나 충격 더 큰 대한민국

    현도사회복지대 이태수 교수는 “직장인이 갑자기 강제적으로 실직을 당했을 때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데서 오는 심리적 공포는 매우 크다. 여기에 엄청난 허탈감과 소외감까지 겹쳐 끔찍한 지경에 이른다”고 말했다.

    광운대 탁진국 교수(산업심리학) 등이 2006년 한국심리학회지에 발표한 논문 ‘자발적 실직자와 비자발적 실직자 간의 구직 활동 및 정신건강에서의 차이’에 따르면 자발적 실업자에 비해 비자발적 실업자의 정신건강이 더 나쁜 것으로 나타났다. 불안, 우울, 소화 장애, 심혈관계 장애, 통증, 불면증 등 정신건강과 관련된 모든 변인에서 비자발적 실업자의 상태가 자발적 실업자보다 좋지 않았다.

    이처럼 국내 실업자, 특히 비자발적 실업자의 실직 공포가 외국 실업자보다 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열악한 사회안전망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업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고용보험이 거의 유일하다. 하지만 사회안전망으로서의 기능은 매우 미약하다. 지난해 8월 통계청에서 조사한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결과, 고용보험에 가입한 근로자는 정규직 근로자의 82%, 비정규직 근로자의 33%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18%의 정규직 근로자와 67%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실직을 당할 경우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고용보험에 가입했다고 해도 실직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고용보험을 통한 실업부조 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일단 고용보험에 가입한 근로자가 실직했을 경우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자발적인 실업자는 대상에서 제외되며, 비자발적인 실업자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그것도 본인이 증명해야 한다.

    실업급여 액수도 턱없이 부족하다. 하루 4만원씩 계산해 월 120만원이 실업급여 최고액이다. 이것도 고용보험 가입 기간이 1년 미만일 때는 3개월(90일)밖에 받지 못한다. 고용보험을 10년 이상 가입했더라도 30세 미만은 6개월(180일), 30세 이상~50세 미만은 7개월(210일), 50세 이상 및 장애인은 8개월(240일)이 최장이다. 실업자들이 일반적으로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은 평균 6개월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김성희 소장은 “우리나라의 실업급여 수준이나 지급 대상, 기간 등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면 소득대체율은 40%에 불과하다. 소득대체율이 70~80%인 외국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소득대체율 40%에 그쳐 끔찍한 지경

    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연구용역 의뢰를 받아 2006년 김 소장 등이 작성한 ‘실업부조 도입 및 고용보험 수급 확대를 위한 재원확보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의 고용보험은 실질적인 소득대체 효과를 내기에 충분했다.

    스웨덴의 경우 12개월 이상 실업보험에 가입하고 6개월 이상 일한 근로자는 모두 실업급여 대상에 포함된다. 이들이 받는 실업급여는 월평균 1만4960SEK(약 254만원)씩 10개월(300일)로 총 14만9600SEK(약 2500만원)가 된다. 55세 이상은 15개월(450일)로 기간이 늘고, 여기에 직업훈련교육을 받으면 10개월이 연장된다. 실업보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실업자들은 대신 실업부조를 받는다. 하루에 320SEK(약 5만4400원)씩 5개월(150일)간 총 4만8000SEK(약 816만원)가 지급된다. 55세 이상은 10개월, 60세 이상은 15개월로 기간이 늘어난다.

    독일은 실직하기 전 2년간 최소 12개월 실업보험료를 납부하면 최저 6개월에서 최고 12개월, 55세 이상은 최고 18개월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금액은 2006년 기준으로 독신자는 345유로(약 62만원), 부양가족이 있는 실업자는 14세 이하 부양가족 1명당 207유로(약 37만원), 15세 이상 부양가족 1명당 276유로(약 50만원)를 추가로 받는다. 실업자가 배우자와 14세 이하의 자녀 두 명을 두고 있다면 모두 1035유로(약 185만원)를 받는 셈이다.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았거나 기간이 지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는 실업자는 사회수당이라는 명목으로 지원금을 받게 된다.

    2006년 보고서 작성 당시 스위스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들의 실업급여 소득대체율은 이미 80%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들 나라는 특히 실업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실업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까지 완벽하게 구축한 상태였다. 직장인이 어느 날 갑자기 실직을 당해도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완충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한국노동연구원 김혜원 박사는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 고용보험 미가입자는 물론, 고용보험 가입자도 실업급여 기간인 8개월이 지난 다음에는 속수무책이다. 자발적인 실업자가 실업급여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도 문제다. 이직하려다 실패했을 경우 비자발적인 실업자와 다를 게 없는데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죽음보다 더한 실직 공포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서울남부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 실업급여 신청자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왼쪽). 1월13일 경기 과천시 한국마사회 컨벤션홀에서 열린 농림수산식품 분야 일자리 채용박람회에 참석한 구직자들이 면접 컨설팅 부스를 찾아 전문가들과 상담하고 있다.

    고용보험제도 이외에 실업자가 구제받을 수 있는 사회안전망으로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있다. 이는 가정파산 이후 생계유지가 곤란한 최저빈곤층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로 어지간해선 대상으로 선정되기 힘들다. 김 박사는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화제가 된 소년의 어머니가 100만원도 안 되는 봉고차 1대 때문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아마도 정부가 예산 문제 때문에 최저빈곤층 150만명 정도를 대상으로 예산 규모를 총량 통제하고 있어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충격을 덜 받기 위해 사전에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등 실직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성균관대 차동옥 교수(경영학·한국인사관리학회 회장)는 직장인이 실직에 대비해야 할 시그널(신호)이 있다고 조언한다.

    상황파악 능력 키우고 ‘전직장려금’ 이용해야

    차 교수에 따르면 먼저 회사 매출이나 이익이 줄어 회사 내부에서 인력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면 일단 주의가 필요하다. 인사평가를 전후해 회사에서 워크숍을 준비하는 것도 일종의 시그널이다. 회사 내부에서 개인적인 모임이 잦아지는 것도 눈여겨볼 움직임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인사 대상에 포함되는지를 제대로 진단하려면 회사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회사의 중심그룹 ‘내(內)집단’ 또는 ‘외(外)집단’ 중 어디에 포함되는지, 상사 및 동료 후배들과 신뢰관계가 형성돼 있는지, 회사에서 꼭 필요로 하는 자원을 갖추고 있는지 등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해보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차 교수는 “환경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상황파악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를 통한 적절한 판단과 행동이 뒤따라야 회사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며 실직 충격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전직 프로그램 지원업체 제이엠커리어의 윤종만 대표이사는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할 때 미리 대상자를 선정해 전직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도록 한다면 실직 충격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재취업 문제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정부의 ‘전직지원장려금 제도’를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다.

    2001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는 초기에는 정부가 비용의 절반을 지원하고 나머지 절반은 기업이 부담하도록 했다. 그래서 주로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기업들만 이용했다. 그것도 구조조정 대상자가 아닌 퇴직자들이 주를 이뤘다. 그러자 정부는 예산을 늘려 지난해 5월부터 종업원 500인 이하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비용 전액을 지원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제도를 활용하는 기업은 1% 정도에 불과하다. 윤 대표는 “회사가 구조조정 대상자를 미리 선별해 전직 프로그램을 받도록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의 반발과 대상자들의 불만을 우려해 꺼리는 경우가 많다. 선진국에서는 일반화한 제도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2월18일 국내 금융시장이 또 한 번 들썩였다. 원-달러 환율이 1468원까지 올라 두 달 반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고, 코스피 지수는 장 초반 1100선이 무너졌다. 외국인의 계속된 매도와 동유럽의 금융위기가 확산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악재로 작용했다. 3월 일본 금융사들이 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는 ‘3월 위기설’도 다시 불거졌다. 위기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구멍 뚫린 실업자 사회안전망을 전면 개보수하기에는 역부족일까.

    K씨와 S씨, 두 사람은 실직 이후 다른 직장을 잡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아직 실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생계는 하루하루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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