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8

2009.01.06

악마의 몸 → 탐구의 몸 → 과시의 몸

‘몸’을 대하는 동서고금의 시선들

  • 김종갑 건국대 교수(영문학)·‘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 저자 jonggab@konkuk.ac.kr

    입력2009-01-02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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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의 몸 → 탐구의 몸 → 과시의 몸

    조선시대 부녀자가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장옷(위)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입은 화려한 드레스(영화 ‘엘리자베스: 더 골든 에이지’의 한 장면). 몸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감추기도, 드러내기도,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하는 존재다.

    몸에 관한 질문은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혹은 동물과 구별해주는-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철학사적으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이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혹은 유심론(唯心論), 유물론(唯物論) 등 ‘이즘(ism)’의 이름으로 제시됐다.

    원죄를 가진 타락한 육체

    병들고 상처 입으며 늙다가 끝내는 죽어서 사라지는 구차한 몸과 반대로 정신은 영원불멸하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은 전형적인 유심론자였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몸에 영혼이 깃들어 있으며, 도토리가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로 성장하듯 영혼도 몸으로 구체화한다고 생각했다. 심신일원론적인 견해다.

    플라톤적인 유심론은 로마시대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활에서 구체화되었다. 육체를 경멸했던 그들은 육체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정념에 흔들리지 않는 생활을 지향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투스에 따르면, 진정한 철학자라면 고문을 당하고 다리가 부러지고 목이 잘리더라도 한 치 감정의 동요를 보여서는 안 된다.

    스토아적 전통은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대물림됐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는 인간의 몸을 원죄를 가진 타락한 육체로 보았다. 선악과를 먹었던 아담과 이브가 보여준 최초의 반응은 벌거벗은 육체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순수하고 성스러운 몸이라면 입으로는 신을 찬양하고 눈으로는 자연에서 신의 아름다운 섭리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세속적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눈은 정욕에 물들어 있으며 입은 식탐으로 가득하고 손발로는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이때 육체는 위험한 욕망의 덩어리로, 자기 극복과 자기 정화를 통해 성스러워져야 하는 대상이 된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소설가 레이몽 라디게 소설 ‘육체의 악마(Le Diable au corps)’에서처럼 육체는 곧 악마였던 것이다.



    과학적인 근대적 육체관 · 탈근대적 몸 숭배

    근대로 접어들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중세적 육체관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신이나 초월적 의미로 신비화했던 몸이 신비를 벗고 선악과는 무관한 중립적 존재로서 과학적,의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새로운 육체관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철학에 잘 반영돼 있다. 그는 마음과 육체를, 서로 소통이 없으며 자족적인 두 개의 독립체로 보았다. 또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는 이성에서 찾았다. 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에서 나타나듯 ‘나’는 육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만이 유일한 실체라는 유물론도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잉태한 산물이다. 정신과 육체를 두 개의 실체로 규정했던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 정신을 빼면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육체만 남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나는 먹고 마시고 일을 한다. 그래서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옳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체성은 사유가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활동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20세기 중반, 몸에 접근하는 전통적 관점으로부터 급진적 단절을 선언했다. 그는 세계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살아 있는 몸, 사랑하고 미워하며 기뻐하고 노여워하기도 하는 주체로서의 몸의 의미를 탐구했다. 그에 따르면 나는 곧 몸이며 나의 몸은 세계를 지향하고 세계와 부단히 소통하면서 세계의 다양한 의미로 충전되어 있다. 몸은 욕망의 덩어리나 물질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지향성이다.

    몸에 관한 현대의 연구를 언급하는 자리에서 미셸 푸코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몸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하며 규율화하는 사회적 과정으로 파악했다. 몸은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며, 모태에서 저절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사회적 ‘매트릭스’를 통해 가공되고 구성된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로 20세기 전반까지 몸이 ‘위험한 육체’로 치부되어 억압됐다면 현대에 몸은 공작처럼 화려한 날개를 펴며 자랑스럽게 현시되고 있다.

    과거 ‘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철학자들의 이마에 주름살을 새기게 했다면 현대에는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몸을 어떻게 만드는가’ 하는 질문이 우리의 일상적 고민거리가 된 것이다. 육체를 경멸했던 스토아 철학자들이 정신의 힘으로 육체의 정복을 추구했다면 몸을 숭배하는 현대인들은 성형수술이나 헬스, 문신 등으로 몸을 변형시킴으로써 마음을 정복하려고 한다. 마음을 몸의 그림자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는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의 부활, 혹은 새로운 유물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악마의 몸 → 탐구의 몸 → 과시의 몸

    선악과를 나눠먹은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은 육체에 수치심을 느꼈다. 타마라 드 렘피카의 1932년작 ‘아담과 이브’.

    동양에서 보는 두 개의 몸-사회의 몸 · 자연의 몸

    한편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몸과 마음을 별개의 실체로 취급하는 이원론적 전통이 없었다. 동양의 몸 담론은 유가적 전통과 도가적 전통이라는 두 줄기의 큰 흐름으로 나뉠 수가 있다. 전자가 사회적 몸을 중시했다면 후자는 자연적 몸을, 전자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도덕적으로 훈육되는 몸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저절로 태어나서 생성 소멸하는 몸을 강조했다. 전자의 몸이 사회 질서에 닻을 내리고 있다면 후자의 몸은 우주의 질서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인간이 마땅히 예(禮)를 갖추지 않으면 올바른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예는 인간의 몸으로 스며들어 체화된 것을 뜻하며 몸가짐과 옷맵시, 몸의 동작 등을 통해 표현돼야 한다.

    반면 노자와 장자는 몸이 사회적으로 훈육돼야 한다는 공자의 견해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몸을 도야하기 위해서는 몸의 자발적이며 생리적인 욕구와 욕망, 역동적이고 생동적인 몸의 측면이 거부되고 억압돼야 하기 때문이다. 노자에 따르면 몸은 인위적 도덕이 아니라 ‘무위’의 자연적 흐름과 조율돼 있어야 하며, 예법으로 표준화하고 일원화한 몸의 통제와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

    훌륭한 몸과 시원찮은 몸, 아름다운 몸과 추한 몸 등의 이분법적이며 위계적인 구별도 철폐돼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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