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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기호의 ‘笑笑한 일상’⑧

아내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 몇 가지

아내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 몇 가지

아내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 몇 가지
며칠 전 아내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저기, 나 말이야. 친정에 며칠 갔다 와야 할 거 같은데….”

아내는 장모님 생신 얘기와 장인어른의 편치 않은 몸 얘기를 꺼냈다. 한 일주일 정도 아이와 함께 갔다 와도 될까, 내게 물었다. 아아, 당연히 갔다 와야지. 당신 아니면 누가 장모님 생신상 봐드리겠냐, 내가 함께 가야 할 텐데 출근 때문에 그럴 순 없고, 간 김에 2주일쯤 푹 지내다 와라, 아이도 바깥바람 쐬니 좋을 테고. 나는 사뭇 심각한 얼굴로 아내에게 말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러 발코니로 나가 히죽히죽,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자 웃었다. 장인어른 몸도 편치 않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의지와는 달리 자꾸 웃음이 나왔다. 아아, 이 연말에, 술자리가 마치 신도림역 승객처럼 빼곡한 이 시즌에 아내마저 집에 없다니….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담배를 한 대 더 피웠다. 그러면서 휴대전화를 열어 술자리 일정을 체크해보았다. 띄엄띄엄 비어 있는 날들엔 무슨 약속을 새로 만들면 좋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계속, 그러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왔다.

아내가 없을 때 하고 싶었던 목록들은 우선 다음과 같았다. 전화 신경 안 쓰고 술 마시기, 침대에 누워서 담배 피우기, 토요일 일요일 오전 내내 잠만 퍼 자기, 토요일 밤새 프리미어리그 축구경기 보기, 양말을 돌돌 말아서 그대로 다용도실에 던지기, 라면 먹으면서 만화책 보기, 스피커에 ‘플스’를 연결해 빵빵 서라운드 입체시스템으로 위닝 게임하기 등등. 목록을 떠올려보니 아, 그간 내가 얼마나 속박과 억압 속에서 살아왔는가, 가슴이 새삼 뭉클해져왔다. 자유는 이제 먼 곳에 있지 않으니, 쇼생크 감옥 벽을 긁어대던 팀 로빈스의 심정으로, 그러나 절대 얼굴에선 티를 내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남편, 나 홀로 집에

아내는 버스에 오르기 바로 전까지 안절부절못하며 갈등했지만(덕분에 내 심장은 수축과 팽창을 수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마지막 순간 아이가 보채는 바람에 서둘러 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은 뒤에도 아내는 내게 국은 냉동실 어디에 있고, 배달되는 우유와 하루 두 알씩 먹어야 하는 비타민 얘기를 했다. 나는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내가 뭐 어린앤가? 그렇게 아내와 아이를 태운 버스는 터미널을 빠져나갔고, 나는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아아, 이제 저녁부터 달리면 되는 거구나, 아무 걱정근심 없이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구나.



아내가 친정으로 떠난 첫날, 나는 새벽 네 시까지 동기들과 술을 마셨다. 동기 중 몇 명이 1차에서 끝내자고 했지만, 나는 바득바득 우겨 그들을 끌고 기어이 4차까지 갔다. 그러고도 무언가 부족해 우리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졸라댔지만, 나를 따라오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혼자 집으로 들어가 거실 소파에 누워 그대로 잠을 잤다. 소파에 누워서도 나는 계속 혼잣말을 해댔다. 아이, 자식들, 한잔 더 하자니까.

다음 날은 주말이어서 나는 소원대로 오전 내내 잠을 잤다. 정오가 지나 잠에서 깨니 위장과 창자가 마치 봄날 아지랑이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무언가 속이 잘못된 것 같았지만, 술을 그렇게 마셔댔으니 당연한 일일 터. 나는 별것 아닐 거라 생각하며 라면으로 해장을 대신했다. 그리고 계속 소파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재방송되는 드라마와 스포츠 프로그램을 왔다갔다, 돌려 보았다. 아내가 한 번 전화했지만, 나는 아무 걱정 말라고, 잘 지내고 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몇몇 친구에게 전화를 돌려 술자리 약속을 잡았다. 친구들은 네가 웬일이냐, 반갑게 말을 걸었지만, 아무도 약속에 응하진 않았다. 인마, 시절이 어떤 시절인데 연말이라고 술을 마시냐? 친구들은 전화선 너머에서 폭락한 펀드와 대출이자 이야기를 했다. 지금 술을 마시면 정말 더 못 버틸 것 같다고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저 계속 전화상으로만 친구들을 위로한 채, 주말 내내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잘 버티자”

주말을 시작으로, 그 다음 주에 계획돼 있었던 술자리들 또한 줄줄이 취소되거나 축소됐다. 모두 처음 맞아보는 경기불황 탓을 했다. 회식은 음식점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잔으로 끝났고, 그래서 나는 계속 혼자 남겨졌다. 일찍 가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생각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 빼고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캔맥주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 오랫동안 혼자 철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스페인전 재방송을 보았다. 화면 속에 비춰지는, 뜨거운 여름날 붉은 옷을 입은 관중은 하나같이 즐거워 보였다. 화면에 보이진 않았지만, 아내와 나도 그 속에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괜스레 나는 쓸쓸해졌다. 휴대전화를 열어 아내에게 전화를 해보니, 아내는 잠에서 깬 목소리로 밥은 어떻게 했냐고 물어왔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아내는 자동적으로 밥부터 물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조금 더 울적해졌다. 나는 아내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2002년 때 생각나?” “2002년?”

“그래, 거 월드컵 하던 해 말이야.”

아내는 아, 하고 잠시 말이 없더니, 한데 갑자기 그건 왜 묻냐고 물었다.

“그땐 사람들이 다 행복했었던 거 같은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내 말에 아내는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고 얘기해주었다. 술자리도 모두 취소돼서 얌전히 집에만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건 그렇고, 장인어른은 좀 어떠셔?”

나는 조금 늦었지만 장인어른의 안부를 물었다. 아파트 배관기술자인 장인어른은 얼마 전 허리를 다쳐 통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냥 그렇지, 뭐. 한데 일거리도 없어서 그게 그거래.”

아내는 조금 쓸쓸하게 말했다. 나는 아내를 위로할 말을 생각해보았으나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래서 겨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잘 버티자, 응? 아기 생각해서 잘 버텨내자.”

전화기 너머 아내는 훌쩍, 우는 소리를 냈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그제야 나도 훌쩍, 마음 놓고 울 수가 있었다. 아내가 집을 비웠을 때, 할 수 있는 거 하나 더. 그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나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주간동아 2008.12.30 667호 (p70~71)

  • 이기호 904022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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