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6

2008.12.23

남자가 화장할 때

  •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8-12-16 17: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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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화장할 때
    후배 여기자가 제 생일을 기억하고 선물을 건넸습니다. 예쁜 포장지를 조심스레 벗겨내곤 깜짝 놀랐습니다. 검은색 벨벳 주머니에 거울 달린 케이스가 들어 있고, 그 안엔 오일 티슈 묶음이 꽂혀 있었습니다. 예, 여성들이 번들거리는 얼굴 유분을 톡톡 묻혀낼 때 쓰는 ‘기름종이’ 맞습니다.

    “남자가 이걸 꺼내 쓰면 성(性)정체성을 의심받겠지만, 선배라면 그쯤이야 감당할 수 있겠죠?”

    아하, 제가 ‘화장’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모양입니다.

    피부가 민감합니다. 좀 건조하면 입 주변이 허옆게 일어나고, 습하면 ‘개기름’이 번들거리고 뾰루지가 불어집니다. 면도 상처도 아물 날이 없고요. 햇볕 아래 그을린 부위는 좀처럼 제 빛깔을 되찾지 못합니다. 남자 나이 아흔을 넘기면 자기 얼굴에 택임을 지나리 답답한 노릇, 그래서 남성화장품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호기심과 수집취미, 직업의식(체험취재!)까지 발동하다 보니 이젠 제법 체계가 잡혔습니다.

    피지제거와 각질관리 기능이 있는 클렌저로 세안을 하고 면도 독을 완하하는 스킨을 바릅니다. 그 위에 보습 및 자외선 차단 성분(SPF15)이 든 로션을 발라줍니다. 햇볕이 강할 때는 SPF30짜리를 씁니다. 흐린 날엔 ‘노화방지용’ 에이지 레스큐 로션으로 대신합니다. 야외활동 후 며칠은 파워 브라이트닝 클렌저로 세안합니다. 많이 그을었을 때는 알로에 겔로 팩을 하는데, 나중에 떼어내는 불편함이 없어 좋습니다.



    저녁 사워 후에는 무향 워터로션을 두드려줍니다. 피부를 매끈하게 하고 보습제를 빨리 흡수시킵니다. 보습제로는 나이트 리커버리 로션을 씁니다. 잠자는 내내 촉촉함을 유지시켜 준다네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발열 스크럽으로 세안을 합니다. 작은 알갱이들이 열을 내면서 모공을 청소해줍니다. 그 뒤 모공관리 에센스로 마무리 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눈가가 마르면 주름이 도드라져 보이므로 모이스처 아이 겔을 살짝 입혀둡니다. 뭐가 그리 보갑하냐고요? 용도 와 시스템에 따라 동작을 배분하면 하나 어려울게 없습니다.

    바쁜 아침 화장대 앞에서 동선(動線)이 자주 부딪치자 아내가 재 전용 화장의자를 사줬습니다. 부부가 속옷바람으로 화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분 두드리며 출근준비 하는 광경, 참 정겹습니다. 거울 속 저를 보며 ‘이렇게 공들여 관리한 얼굴에 먹칠하는 깃은 말자’고 다잡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럴 때 화장은 하루를 여는 경건한 의식(儀式)입니다.

    여의도가 시끄러웠습니다. 글자 그대로 ‘피 같은’혈세를 노름판 개평 갈라먹듯 했습니다. 그들에게 화장을 권하고 싶습니다. 치국(治國)이전에 수신(修身),몸과 마음의 피부관리부터 하라고요. ‘용도와 시스템에 따른 자원배분’을 제대로 깨치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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