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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디지털 치매’ 약 될까 독 될까

인간 진화 신호탄 vs 이성 무력화 징후 논란 … 사소한 현상 아닌 인간 미래 예측 키워드

‘디지털 치매’ 약 될까 독 될까

‘디지털 치매’  약 될까 독 될까

휴먼인터페이스의 발달로 기억의 압박에서 해방된 인간은 창조적인 일을 하게 될까. 인간 진화의 한 과정으로 ‘디지털 치매’를 받아들여야 할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언론 등을 통해 ‘디지털 치매’라는 말을 접하게 됐다. 디지털 치매는 휴대전화, PDA(개인 휴대 정보단말기), 내비게이션, 계산기 등 휴먼인터페이스에 익숙한 현대인이 기억력이나 계산력, 방향감각 등을 상실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휴대전화가 없으면 가족의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간단한 산수 계산에도 쩔쩔매는 모습이 모두 디지털 치매의 일종이다. 이 현상을 두고 그간 언론이나 정신과 의사들은 기기에 너무 의존해서 생긴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즉 디지털 치매는 학문적 주제라기보다는 현대사회의 현상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래서 관련된 논의도 △디지털 치매는 진짜 치매가 아니니 걱정할 만한 현상은 아니다. △기기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면서 평소 기억력과 계산력을 사용하도록 노력하라는 수준이었다. 이는 디지털 치매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인간 존재의 변화라기보다는 생활의 팁에 그치게 했다.

그러나 최근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디지털 치매는 사소하게 보아 넘길 현상이 아니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이들은 디지털 치매가 기술사회에서 인간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중요 단서라고 주장한다. 단순히 현대사회의 단면이나 일시적 건망증이 아니라, 인간 정신능력의 영구적이고 근본적인 변화와 기술사회에서 삶의 변동을 이끈다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 일시적 현상으로 인식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는 최근 저서인 ‘호미네상스(Hominescence)’와 2005년 12월 ‘새로운 기술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라는 제목의 강연 등을 통해 디지털 치매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인류의 진화과정과 역사를 돌아볼 때 상실하는 능력이 있으면 동시에 얻게 되는 능력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인류는 직립원인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손을 사용하며 먹이나 물건을 무는 입의 기능이 퇴화했다. 대신 입은 말하는 기능을 획득했다. 또 문자와 인쇄술의 발명으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암송할 수준의 기억력을 상실했지만, 기억의 압박에서 해방돼 좀더 창조적인 일에 능력을 활용하게 됐다. 오늘날 휴먼인터페이스는 기억력, 계산력 등의 약화를 가속화하지만 단순 기억이나 계산의 부담에서 벗어나 정보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지식을 창조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세르는 이러한 과정을 ‘능력들의 외재화’라 부르면서 인류는 기술 진보와 함께 진화해왔고 지금의 디지털 치매 현상도 진화과정일 뿐이라고 진단한다.



아직 학문적 개념 정의조차 불분명

사이버네틱스를 제창한 노버트 위너나 인간-기계 체계를 구상한 맨프레드 E. 클라인스, 나단 S. 클라인 그리고 사이버 컬처를 선언한 해러워이 등은 모두 디지털 치매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비판한다. 미디어 학자인 마셜 맥루한은 저서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에서 기술 발달과 인간 능력의 확장을 연결해 사고할 것을 촉구했다. 생명공학 논의로 유명한 프랑스 파리 7대학의 도미니크 르쿠르 교수도 ‘인간, 포스트 인간(Humain, Post Humain)’에서 과도한 기술낙관주의는 경계해야 하지만 기술과 융합된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는 전향적 시각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국내에서는 이준기 연세대 교수(정보공학)가 디지털 치매를 인간 진화와 연결해 사고하자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사회구성주의 계열의 사회학자들과 보수적인 인문학자들 또한 디지털 치매를 그저 기기 사용을 줄이면 되는 현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디지털 치매를 자연스러운 인간 진화의 과정으로만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술의 맹목적 속성은 인간 존재에 큰 위협이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벨기에 기술철학자인 질베르 오투와 브뤼셀 자유대학 교수는 일련의 저서들을 통해 디지털 치매 등을 낳는 기술 발전이 전통적인 인간 본성의 관념을 변형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국내에서는 서이종 서울대 교수(사회학) 등이 디지털 치매는 디스토피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디지털 치매’  약 될까 독 될까
이들 학자는 기술 발전과 그로 인한 기기 의존이 인간 고유의 능력들을 위협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디지털 치매는 기억력과 계산력 등의 일시적 감퇴가 아니라, 결국에는 비판적 사고력 같은 이성의 핵심 기능 상실까지 예견한다는 것이다. 데이터를 수집, 가공, 해석하는 모든 과정을 컴퓨터에 의존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정보를 취합해 리포트를 내는 대학생들의 최근 문화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더욱이 인공지능과 인간형 로봇 기술이 심상치 않게 발전하고 있는 현실은 우려를 더한다. 과연 어디까지가 잃어도 좋은 사소한 능력이고, 어디까지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인지가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기술낙관주의를 견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디지털 치매는 그것이 새로운 인간 진화의 맹아든, 디스토피아의 징조든 인간의 미래를 관측할 수 있는 연구과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 학문적으로 개념 정의조차 내려지지 않았으며, 앞서 언급한 학자들도 ‘디지털 치매’라는 용어를 직접 겨냥해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는 않다. 향후 휴먼인터페이스로 인한 인간 능력의 실질적 변화와 그 의미에 대해 실증적이고 정교한 연구가 행해져야 할 것이다.

Tips

디지털 치매 = 휴대전화나 PDA, 내비게이션, 계산기 등 휴먼인터페이스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기억력이나 계산력, 방향감각 등을 상실하는 현상.




주간동아 2008.12.02 663호 (p52~53)

  • 오주훈 교수신문 학술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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