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2

2008.11.25

서울역 ‘플랫폼’에서 길을 잃다

  • 김민경 holden@donga.com

    입력2008-11-20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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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플랫폼’에서 길을 잃다

    건축 현장에서 나온 폐자재를 재활용한 윤동구 작가의 작품입니다.

    신상녀’ 서인영처럼 저도 새것, 신상품, 처음 보는 물건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어요. 내가 그 물건을 어렵게 구했다든가, 인상적인 선물이라든가 하는 경우죠. 또 그 물건만한 ‘아이’를 발견하지 못해 최초의 광택이 사라지고, 보풀이 일고, 모서리가 닳았는데도 정을 떼지 못하는 일도 생깁니다.

    ‘신상만능주의’의 또 다른 예외는 건축물입니다. 중앙청이 헐릴 때도 마음이 아팠고, 사라질 운명에 처한 고(故) 김수근의 세운상가를 볼 때도 우리에겐 그 방법밖에 없는 거냐고 혼자 외쳐봅니다. 개인적인 물건이든 건축물이든, 그것이 삶과 연결되면 그 안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야기가 담기기 때문이죠. 그게 ‘역사’라 하는 거잖아요.

    옛 서울역사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해지는 건물입니다. 1925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으니, 누군가는 이것도 싹 밀어버리자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게 서울역의 추억은 어렸을 때 겪은 ‘혼돈’의 이미지로 남아 있을 뿐이긴 해요. 언젠가 그곳이 식당으로 사용될 때 샹들리에를 보며 외국 사람들은 저런 걸 달고 사나보다 부러워한 기억도 있습니다만.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역은 상경의 꿈과 귀향 전쟁,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가난, 이별과 후회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연상시키겠죠.

    요즘 서울역사 앞을 가보셨나요? 외환위기 이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단골 취재 장소로 알려졌다시피, 옛 역사 앞은 노숙자들의 휴식처이자 식당이자 잠자리가 돼 있습니다. 여성은 혼자 지나가기 꺼려지는 곳이죠. 간혹 돈을 달라고 말하는 노숙자들도 있더군요. 세계적인 도시 서울의 한가운데에 ‘폐가’가 있다는 사실, 더구나 그곳이 수십 년 동안 서울로 들어오는 플랫폼(platform)이었고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쌓여 있는 공간이란 걸, 눈으로 보기 전까진 믿기도 쉽지 않습니다. 노숙자들의 이부자리 더미 바로 옆에 새 서울역사와 대형 쇼핑몰이 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할 정도입니다.

    서울역 ‘플랫폼’에서 길을 잃다

    이 통합티켓으로 옛 서울역사를 포함해 플랫폼 서울 2008의 모든 전시를 볼 수 있어요.

    ‘플랫폼 서울 2008’이란 전시가 열리지 않았다면 저도 서울역에 가지 않았을 거예요. 플랫폼 서울이란 행사는 2006년부터 서울 사간동 지역의 갤러리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행사입니다. 올해는 옛 서울역사가 전시 공간으로 더해진 것이죠. 그런데 올해 플랫폼 2008의 압권은 옛 서울역사전이라는 것 같습니다.



    벽돌과 시멘트가 떨어져나간 벽과 바닥, 무너져내리는 형태의 샹들리에들이 그대로인 채 길버트 · 조지, 다카야마 아키라, 이강소, 윤동구, 김소라 등 세계적인 국내외 작가들이 작품을 설치했습니다. 그들은 사려 깊게도 자신들의 작품이 아니라 옛 서울역사와 그곳에 쌓인 시간들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시간의 켜와 삶의 흔적이 남은 공간을 집요하게 찾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전시기획자 김선정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서울역 앞은 노숙자들의 삶이 있는 공간인데 전시나 프로젝트로 단시간에 그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오랜만에 문을 연 서울역사 건물에 들어오려는 노숙자들이 왜 없을까요.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도 미술의 한 단면입니다. 이렇게 공간은 사람들의 일상에 의해서 숨쉬고 살아 있게 됩니다. 전시는 11월23일까지 열립니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진짜 ‘잇위크’이니, 서두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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