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1

2008.11.18

그림처럼 깔린 오색 낙엽 안개비에 촉촉이 젖은 듯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늦가을 성스러운 순례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11-13 16: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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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처럼 깔린 오색 낙엽 안개비에 촉촉이 젖은 듯
    며칠 전에 꽤나 흥미로운 ‘사건 기사’가 어느 일간지에 게재되어 이를 따로 메모해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사건 기사’의 특성상 매우 건조한 문장으로 기록돼 있었지만 마음에 남은 인상은 제법 컸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예비역 해병과 현역 해병이 대낮에 술집에서 선후배 기수를 따지면서 주먹다짐을 벌이다 입건됐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서울 중부경찰서는 11월2일 군대 선후배 사이를 따지다 싸움을 벌인 강모(23) 씨를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김모(20) 상병 등 현역 해병 세 명도 헌병대에 인계했다. 사건 당사자들은 공교롭게도 군기가 세고 훈련 강도도 높고 그 때문에 동기간이나 선후배 간에 ‘남다른’ 감정을 교감하는 게 오랜 전통이 된 ‘해병대’ 선후배다. 해병대를 전역한 선배 강씨는 을지로 맥줏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에 있던 현역 일행과 패싸움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 까닭인즉 “해병대 몇 기냐?”고 묻자 김 상병 등이 “몇 기면 뭐 할 건데?”라고 응수한 것이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강씨는 경찰에서 “후배들이라고 생각해 말을 붙였는데, 건방진 대답이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신경숙의 ‘부석사’엔 부석사 가는 여정 담겨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당사자인 강씨의 마음을 짐작해보았다. 아마도 반가웠을 것이다. 그리고 해병대 시절에 겪은 추억이 떠올랐을 것이고, 혹독한 훈련 과정에서 동료들과 깊은 정을 나누던 기억들이 새삼 술잔을 그러쥐게 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아마도 강씨의 추억 속에는, 현역 시절에 휴가를 나왔다가 “해병대 몇 기냐?”고 물으면서 시원하게 술값을 대신 내주던 이름 모를 군 선배의 행동도 떠올랐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후배가 되는 현역들에게 어쩌면 술 한잔 사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배반당했을 때, 그는 단지 후배들의 행동만 거슬렸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오랜 추억마저 잠시 금이 간 듯한 감정에 빠져들었을지 모른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깊은 밤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단독자가 된다. 단독자로서 인간은 참아내기 어려운 지극한 고독감에 자주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는 좀더 넓은 ‘전체로서의 삶’을 생각하게 되고, 그런 전체의 삶 속에 자기 자신이 놓여 있을 때, 그리고 그런 감정을 누군가와 교감하게 될 때, 진실로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된다. 이런 점에 대하여 김우창 선생은 큰 세계 속에서의 작은 삶이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큰 것에 의하여 정당화되고 의미 있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탈출이 절실해지는 것은 자신의 작은 삶이 괴로운 것이 되고, 그것을 지배하는 큰 것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지 않을 때다. 이때 탈출과 도약을 약속하는 것이 광신이고 이데올로기이고 돈이고 판타지다. 세계에 열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인지할 만한 세계 속에서 진정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작은 삶에 충실하는 것 - 이것이 좋은 삶일 것이다.”

    그림처럼 깔린 오색 낙엽 안개비에 촉촉이 젖은 듯
    2001년 제2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신경숙의 소설 부석사는 바로 이 같은 삶의 소중함과 그러한 삶이 좀처럼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발생하는 기이한 애틋함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 속의 어느 1월1일에, ‘나’는 부석사에 가기 위해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남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같은 오피스텔에서 사는 이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인연에 의하여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문득 부석사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용이하지 않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났는데, 예기치 않게 길을 잃고 목적지인 부석사에는 이르지 못한다. ‘나’와 ‘너’의 단절을 의미하는 부석사의 ‘떠 있는 돌’의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소설은 부석사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혹시 그곳에 이미 도착했을지도 모를 ‘나’의 상념으로 끝이 난다.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마음뿐이었다. 어깨가 내려앉는 듯한 피로에 점령되어 그는 점점 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녀는 보온통을 기울여 종이컵에 커피를 따른다. 부석사의 포개진 두 개의 돌은 닿지 않고 떠 있는 것일까. 커피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자꾸만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다. 그녀는 문득 잠든 그와 자신이 부석처럼 느껴진다. 지도에도 없는 산길 낭떠러지 앞의 흰 자동차 앞유리창에 희끗희끗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세부 사실은, 순흥면에서 태어났고 부석면에 큰집 어른들이 여태 살고 있는 나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허술해 보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나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같은 책에 의하여,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마다 적극적으로 문화관광을 추진해온 저 90년대 이후로 영주, 순흥, 봉화 그 어디의 작은 도로일지라도 ‘부석사’로 향하는 이정표를 찾지 못할 까닭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설 속 인물들이 길을 잃고 말았다는 설정은 그곳을 고향으로 하는 내게 조금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저러나 이 소설이 ‘큰 세계’와 일치하는 작은 삶은 고사하고, 바로 곁에 서 있는 사람과의 친밀했던 감정마저 일순간에 붕괴되고 마는 오늘의 우리 일상을 적절히 스케치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앞에 언급한 책에서 최순우가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고 묘사한 바로 그 부석사에서 옛사람들의 종교적 미의식을 환기하는 것은, 우리네 삶이 결코 단속적이지 않으며 저 유장한 세월의 흐름 속에 있음을 재확인하는 성스러운 순례가 되는 것이다.

    시 ‘그리운 부석사’에 깃든 절실한 감정의 울림

    늦가을 아닌가. 지금 이 시절이라면 부석사에 오르는 길의 은행잎은 다 떨어지고 말았겠지만, 그 나무들의 행렬은 여전히 반듯하고, 마침내 무량수전 앞에 이르러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과 그 아래 준령들의 흐릿한 그림자를 바라보는 늦가을의 순례 속에서, 우리는 필경 정호승 시인이 시 그리운 부석사에서 호소한 바와 같은 절실한 감정이 아직은 저마다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바로 곁에 선 사람과 무언의 감정을 교감하면서 어떤 조화로운 전체 속에서의 ‘작은 삶’이 주는 위안을 얻는 것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마지)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 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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