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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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기록’은 작품성 보증수표

  •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입력2008-11-03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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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기록’은 작품성 보증수표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1947), 종이에 구아슈, 29.5 x 23.5cm

    “지은, 흑인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이미지야, 사이즈는 193×243cm이고. 바스키아의 1982년 작품인데, ‘prov’ 좀 찾아줘, 빨리!”

    제가 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크리스티 옥션하우스는 다가오는 빅세일의 카탈로그를 만드느라 그야말로 전쟁 중입니다. 난생처음 해보는 인턴 생활인 데다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고단합니다. 게다가 어찌나 약어를 많이 쓰는지, 저 같은 외국인은 용감하게 물어보거나 눈치가 빨라야 한답니다.

    겨우겨우 이미지를 찾고 사이즈와 연도까지는 확인했는데, 이제는 ‘prov’가 뭔지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눈치로 ‘prov’가 ‘provenance’라고 생각하고 추적에 나섰습니다. 작품에서 ‘provenance’가 얼마나 중요한지 교수님들이 누누이 강조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죠. ‘provenance’는 어떤 작품이 작가를 떠나 어떤 갤러리와 소장자를 거쳤는지의 기록인데, 일종의 족보라고 할 수 있죠. 바스키아의 작품을 옥션에 내놓은 현 소장자는 헤비메탈 밴드 메탈리카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입니다. 이전에는 두 개의 갤러리와 두 명의 소장자를 거쳤고요. 조사한 자료를 들고 저에게 일을 맡긴 상사 헤일리 코헨을 찾아갔습니다.

    “헤일리, 일을 하다 보니 마치 사립탐정이 된 기분이야. 소장기록이 왜 그렇게 중요한 거야?”

    “음, 이력서를 한번 생각해봐. 누군가를 고용할 때 그 사람의 이력서를 보고 고용할지 말지 결정하잖아. 의심 가는 부분이 있으면 전에 있던 학교나 회사에 문의해서 확인할 수 있잖아. 그 사람이 어떤 성품이고 일은 잘했는지 조사하면 다 나오잖아. 작품도 마찬가지야.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좋은 갤러리와 이상적인 소장자를 거쳤다는 기록이 나오면, 위작(僞作) 논란이 나올 가능성이 없고 작품성도 보장되거든. 소장기록을 찾다 보면 믿어지지 않는 작품의 뒷이야기들도 나오고…. 마치 작품의 ‘인생’을 찾아주는 느낌이랄까.”



    위작 가능성 없고 가치 보장 ‘일석이조’ 효과

    그렇습니다. 앤디 워홀의 ‘오렌지 마릴린(Orange Marilyn)’(1964)을 예로 들어볼까요? 리오 카스텔리 갤러리는 앤디 워홀의 작품을 처음으로 전시한 곳입니다. 한 작가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보고 꾸준히 전시한 갤러리에서 작품을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당시 2500달러를 주고 이 작품을 산 사람은 레온 크로셔(Leon Kraushar)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자 아내는 모든 소장 작품을 독일 컬렉터인 카를 슈트뢰허(Carl Stroher)에게 넘깁니다. 그 작품이 1998년 소더비에서 1730만 달러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접한 크로셔의 아들은 “오븐에 머리 처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농담을 했다는데요. 어쩐지 농담 같지만은 않죠?

    11월5일 크리스티 옥션하우스에서는 힐먼(Hillman)가(家)와 앨리스 로렌스(Alice Lawrence)라는 유명한 개인 소장가들의 작품을 세일하는데, 이들이 소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작품성은 이미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에두아르 마네, 르네 마그리트 등 미술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가들의 미공개 작품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개인 소장가의 뛰어난 안목을 목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예를 들어 이미 많이 공개된 르네 마그리트의 1950년, 1954년 ‘빛의 제국’보다 훨씬 앞선 1947년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마치 꼭꼭 숨겨둔 보석을 찾은 기분일 겁니다(www.christies.com).

    자, 앞으로는 크든 작든 작품을 살 때 꼭 ‘소장기록’을 문서로 확인받는 것과, ‘작품과 내 인생이 같이 간다’는 생각으로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컬렉팅하는 것을 잊지 마셔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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