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3

2008.09.16

한 식구 8촌서 남 같은 4촌으로

고려 때 유교적 친족제도 도입 후 1000년 ‘친척의 변천사’

  • 최홍기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choehk@lycos.com

    입력2008-09-08 1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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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식구 8촌서 남 같은 4촌으로

    일가족이 한복 차림으로 추석 제례를 올리고 있다.

    우리나라에 유교적 가족-친족제도가 도입된 때는 고려 성종 4년(985)이다. 이때 중국의 오복제도(五服制度)가 공식적으로 채택됐는데, 이 제도는 부계의 고조(高祖), 모계의 외조부모 및 처계의 처부모 이하 친족들이 세대(항렬) 관계, 거리(촌수) 관계에 따라 상복(喪服)과 상기(喪期)를 다섯 등급으로 나눠 입도록 규정한 것이다. 고려가 부계 편중적인 오복제도를 채택했다는 것은 부계로 편중된 유교적 친족제도를 우리 친족관계의 틀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려의 친족관계가 실제로 부계 편중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는 오복제도를 강제하지 않고 상층 관인(官人) 사회부터 실천하도록 유도했다. 사회 일반이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제도로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바꿔 말하면 고려 말까지도 일반 백성은 이 오복제도를 바람직하다고는 여겨도 반드시 지켜야 할 제도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유교 이념을 따르는 조선왕조는 고려의 오복제도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좀더 엄격한 부계 편중적 제도로 개정해 실천을 강제했다. 이는 조선왕조가 가족-친족의 기능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즉 가족-친족을 사회구성원 충원 기능, 경제적 재생산 기능, 사회보장 기능, 사회질서 유지기능을 수행하는 중요한 기초적 사회제도로 이해한 것이다.

    첫째, 인구 재생산을 담당하는 가족 없이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음은 모든 사회가 일찍부터 이해하고 있었던 바다. 유교는 남성 우위의 위계적 체제 질서로 가부장제를 역설한다.

    둘째, 유교사회는 일찍부터 가족을 경제 기능을 수행하는 제도로 파악했다. 토지를 대상으로 수취(收取)하는 조(租), 인구를 대상으로 수취하는 역(役), 호(戶)를 대상으로 수취하는 공(貢) 제도를 일찍부터 발전시켰고, 수취를 위한 단위로서 가족을 파악하는 호적제도를 두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셋째, 경제 기반이 취약하고 사망률이 높은 전통사회에서 핵가족 위주의 가족제도는 사회보장 기능을 수행하기에 불완전하다. 유교사회가 동고조(同高祖) 8촌까지를 한 집안으로 여기며 일상생활에서 상부상조하도록 한 것은 친족을 사회보장제도의 일환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넷째, 친족집단 안에서 이뤄지는 개인의 사회화는 사회 전체의 질서 유지를 뒷받침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유교사회에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행위규범 원리로 그렇게도 중시한 오륜(五倫) 가운데 세 가지, 즉 부자·부부·장유가 가족-친족관계와 관련돼 있다는 점은 가족-친족제도가 담당하는 사회질서 유지 기능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하게 한다.

    현대인에게 결혼과 출산은 필수 아닌 선택

    한 식구 8촌서 남 같은 4촌으로

    나들이 나온 단란한 가족.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는 유교적 가족-친족제도는 16세기에 이르러 반드시 지켜야 할 제도로 자리잡았다. 물론 이런 유교적 모형이 현실적으로 친족간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위의 기능들을 원만히 수행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지리적, 계층적 이동이 적었기에 최소한 체제 유지에는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지리적, 계층적 이동이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어 친족간 공동생활 영역 자체가 불가피하게 축소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면서 굳이 친족이 사회보장 기능을 담당할 필요도 없게 됐다.

    새로 유입된 서구적 이념들도 전통적인 친족관계 유지를 어렵게 한다. 즉, 남녀평등 이념은 규범을 기초로 하는 부계 친족관계보다 정서에 바탕을 두는 모계 및 처계 친족관계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부계 편중 친족관계가 급속히 쇠퇴하면서 모계 및 처계 친족과의 다면적 관계가 증대돼가고 있는 것이다.

    2008년 1월1일부터 호적제도가 폐지되고 모계 성(姓) 계승이 허용된 것은 부계 친족제도의 쇠퇴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른 차원의 동질성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동창관계, 직업관계, 취향관계 등 자발적인 사회관계가 크게 확대되는 것 또한 친족관계의 쇠퇴를 촉진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경제적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사회 참여를 통한 자아실현과 결혼 및 출산의 장점을 비교 평가한다. 절대적인 노후 수단이었던 자녀, 특히 아들의 가치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더욱이 자녀 양육이 부모에게 적지 않은 경제적, 시간적 부담으로 여겨지면서 결혼과 출산은 그저 하나의 선택사항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러한 논리 앞에서 ‘백년해로(百年偕老)’라는 전통적 결혼관은 그 기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제 가족은 사회제도라기보다 개인의 생활욕구를 충족하는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게 됐다.

    그러나 가족-친족은 출산을 통해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을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구성원이 될 개인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 필수불가결한데, 이는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제도가 수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데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따라서 가족-친족은 사회구성원의 생활욕구와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최소한의 공동체로 유지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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