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3

..

4명 중 3명꼴 “친척이라도 빚보증 거절”

성인 500명 대상 설문 … 친척과의 갈등 원인은 ‘돈 문제’ 32%로 최다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8-09-08 14:1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4명 중 3명꼴 “친척이라도 빚보증 거절”

    일러스트레이션·박진영

    친척에겐 빚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게 좋다. 그래도 부탁해야 한다면 친척 중 ‘40대 이상 블루칼라 직종의 남자 친척’을 찾아보라. 4명 중 1명은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친척은 편안한 존재’로 인식하지만, 4명 중 3명은 친척이 빚보증을 부탁하면 거절할 생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절반가량이 친척과는 명절이나 관혼상제 때 만나고 있으며,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엄마 쪽 친척’과 가까운 것으로 조사됐다.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은 연령이 높을수록 수긍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주간동아’가 추석을 앞두고 코리아리서치센터(KRC)에 의뢰해 8월30일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면접 설문조사 결과다. 표본오차 95%, 신뢰구간 ±4.4%포인트.

    5명 중 1명은 친척에게서 금전적 도움 받아

    돈 문제는 한국인에게 친척간 갈등의 주원인이기도 하지만 도움의 매개체이기도 했다.



    친척간 갈등 이유(복수응답)로는 △재산분배나 채무 등 금전문제(20.4%) △집안 행사에 대한 비용부담 문제(12.3%) 등 금전문제로 인한 갈등이 32.7%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윗사람의 권위주의적 태도(10.3%) △자존심이나 지기 싫어하는 마음(7.3%) △부모 모시는 문제(6.8%) △아랫사람의 결례(6.7%) 순으로 조사됐다. ‘갈등 경험이 없다’는 응답은 44.7%였다.

    갈등 원인으로 ‘재산분배나 채무 등 금전문제’를 꼽은 응답자 중에는 중소도시(26.0%) 거주자와 소득수준 하층(월수입 150만원 이하·25.1%)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집안 행사에 대한 비용부담 문제’로 인한 갈등은 소득수준 상층(월수입 351만원 이상·14.4%)에서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읍·면 지역에서는 ‘갈등이 없다’는 응답(52.3%)이 가장 많았다.

    친척에게 도움을 받은 사례 중에도 ‘금전적 도움’(19.1%)이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이 △고민상담(12.1%) △육아 도움(6.3%) △사업상 도움(3.7%) △빚보증이나 신용보증(3.4%) 순이었다. ‘도움 받은 경험이 없다’는 응답은 58.4%로 읍·면 지역(77.9%), 중졸 이하(78.8%), 소득수준 하층(75.0%)일수록 높게 나타났다.

    이 설문결과는 숭실대 정재기 교수(정보사회학)의 연구결과와도 일치한다. 지난해 발표한 ‘한국의 가족 및 친족간의 접촉 빈도와 사회적 지원의 양상 : 국제간 비교’ 논문에서 정 교수는 한국인 131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갑자기 큰돈이 필요할 때’ 응답자의 60.8%가 ‘친척’을 찾는다고 답했지만, ‘우울한 일이 생겨 상의할 때’는 53.1%가 ‘친구나 동료’를 찾는다고 했다. 배우자 등 ‘친척’(38%)을 찾는다는 응답보다 높은 것. 정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친척은 ‘정서적 성격’보다 ‘도구적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빚보증에 대해선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거절한다’는 응답이 75.5%였다. ‘빚보증 거절’ 응답은 여성(79.4%), 30대(84.8%), 화이트칼라(80.8%) 계층에서 많았다. ‘빚보증 OK’ 응답은 남성(23.3%), 40대(22.4%)와 50대 이상(22.0%), 블루칼라(25.1%), 자영업 종사자(22%)에게서 상대적으로 높았다.

    4명 중 3명꼴 “친척이라도 빚보증 거절”
    친척은 명절이나 관혼상제 때 만난다

    ‘친척에 대한 느낌’은 대다수(88.1%)가 ‘편안한 존재’라고 응답했다. 전 계층에서 긍정적인 응답이었다.

    친척과의 만남은 ‘명절이나 관혼상제 때’(46.7%)라는 응답이 ‘수시로 만난다’(30.7%)보다 많았다. △정기적으로 날짜를 정해 만난다(7.3%) △부모 형제 생일 때 만난다(7.1%) △거의 만나지 않는다(3.9%)가 뒤를 이었다.

    소득수준별로는 하층이 ‘명절이나 관혼상제 때’(58.3%) 친척을 만나는 경우가 많았고, 이혼이나 별거 또는 사별한 경우에는 ‘거의 만나지 않는다’(21.7%)는 응답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친척 범위에 대해선 삼촌, 이모 등 혈족(血族)은 △4촌(40.2%) △8촌(28.8%) △6촌(28.2%) 순으로, 처남이나 고모부 등 인척(姻戚)은 △4촌(58.7%) △6촌(22.0%) △8촌(16.4%) 순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남성은 혈족의 친척 범위를, 여성은 인척의 친척 범위를 상대적으로 넓게 인식하고 있었다. 연령별로는 50대 이상에서는 ‘혈족은 8촌까지’(38.0%) ‘인척은 4촌까지’(47.4%)라는 응답이, 20대 이하에서는 ‘혈족은 4촌까지’(62.1%) ‘인척은 4촌까지’(69.1%)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현행법상 친척(친족) 기준은 혈족 8촌, 인척 4촌, 배우자다.

    ‘친척과의 관계’ 정의에 대해서는 대도시 거주자의 경우 ‘사교적 관계’(38.4%), 친척과 촌락공동체가 대부분인 읍·면 지역 거주자는 ‘가사 협조관계(44.9%)’라는 응답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20년 후 친척관계는 ‘약보합세’

    4명 중 3명꼴 “친척이라도 빚보증 거절”

    ‘친척 모임 시 불참하는 이유’로는 ‘다른 일이 있어서’(52.9%), ‘어른 만나는 자리가 불편해서’(13.4%), ‘내키지 않아서’(11.5%), ‘비용부담 때문에’(7.7%) 순이었다.

    ‘친척이 성공했을 경우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내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할 것(70.3%) △약간 질투심이 생길 것(15.7%) △별 느낌 안 날 것(13.8%) 순으로 조사됐다. ‘진심으로 기뻐할 것’이란 응답은 50대 이상(84.5%), 소득수준 하층(89.7%)에서 많았고 20대 이하에서는 ‘별 느낌 안 날 것’(27.7%)이란 응답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19.0%)와 40대(19.4%)는 ‘질투심이 생길 것’이란 응답이 높아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20년 후 친척관계 전망’에 대해서는 ‘약보합세’ 의견이 우세했다. △현재보다 약화되겠지만 어느 정도 유지될 것(54.9%) △현재의 친척관계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25.6%) △현재의 친척관계가 유지될 것(17.1%) 순으로 나타난 것. 흥미로운 것은 ‘현재의 친척관계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은 연령이 높을수록, 읍·면 지역(38.1%), 중졸 이하(54.0%), 소득수준 하층(37.9%)에서 높았다는 점이다.

    KRC 원성훈 사회여론조사부장은 “사회 구성원 스스로 전통적인 가족문화의 변화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변화는 고연령층과 읍·면 지역 등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계층에서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4명 중 3명꼴 “친척이라도 빚보증 거절”
    20대 이하 59% “엄마 쪽 친척이 더 가깝다”

    4명 중 3명꼴 “친척이라도 빚보증 거절”

    지난해 9월 추석 연휴를 해외에서 보내려는 여행객들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아빠 쪽 친척(부계혈족)’과 ‘엄마 쪽 친척(모계혈족)’ 중에는 ‘아빠 쪽 친척’이 더 가깝다는 응답이 약간 많았지만 여성(53.0%), 20대 이하(59.7%), 대학 재학 이상(52.8%) 계층에서는 ‘엄마 쪽 친척’이 더 가깝다는 응답이 많았다. 소득수준별로는 유일하게 상층에서만 ‘엄마 쪽 친척’(49.7%)이라는 응답이 ‘아빠 쪽 친척’(49.2%)을 앞섰다. ‘아빠 쪽 친척’이 더 가깝다는 응답은 남성(60.3%), 50대 이상(64.0%), 읍·면 지역(58.9%)에서 높게 나타났다.

    친밀감이 생기는 이유도 대조적이다. 부계혈족에 대한 친밀감은 주로 명절이나 제사 등 ‘관습에 의한 유대’로 형성된 반면, 모계혈족 친밀감은 교류를 통한 ‘정서적 유대’로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의 가부장적 문화에 익숙한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 간의 상반된 양상이라는 분석이다.

    먼 친척과 가까운 이웃사촌은 ‘동급’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낫다’는 속담은 과연 맞을까. 나이가 많을수록, 시골에 살수록 이 속담은 맞을 확률이 높았다.

    ‘가끔 만나는 친척과 자주 보는 이웃’에 대한 선호도 설문에서 ‘자주 만나는 이웃이 낫다’(48.8%)와 ‘가끔 만나도 친척이 낫다’(48.3%)는 응답이 비슷했다. 하지만 연령별, 거주지별로는 차이가 나타났다. 20대 이하의 경우 ‘이웃이 낫다’는 응답이 33.0%였지만 40대(52.8%)와 50대 이상(53.3%)은 과반이었다. 대도시 거주자는 ‘친척’(52.9%), 읍·면 지역 거주자는 ‘이웃’(56.2%)의 손을 들어줬다.

    KRC 원 부장은 “대도시 거주자와 젊은 세대는 친척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고연령층과 읍·면 지역 거주자는 ‘지역 커뮤니티’에 활발히 참여하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4명 중 3명꼴 “친척이라도 빚보증 거절”


    성균관대 이기동 교수의 ‘주간동아’설문조사 분석

    “친척과의 갈등은 기대치 엇박자 탓”


    “가을을 사는 귀뚜라미는 봄이 오는 줄 모릅니다. 한 방향으로, 추워진다는 것만 생각하죠. 친척에 대해서도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귀뚜라미식 사고’에 매몰될 수 있습니다.”

    성균관대 이기동 교수(유학동양학부)는 한국인 대부분이 친척을 편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원래는 편했지만, 현대 경쟁사회의 영향으로 그 인식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간동아’의 설문조사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다. 그는 “현대 경쟁사회에서 가장 큰 고통인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고리는 친척”이라며 “동족의식과 친밀도가 강한 친척이 ‘편안한 존재’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다만 현대인과 한국인은 개념이 다르다며 ‘현대인=개인주의’지만 ‘한국인=개인주의 불가’라고 했다.

    “한국인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개인주의화가 안 되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남남’이라는 말을 들어도 서운해하죠. 모두가 같은 하늘(人乃天)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특히 친척은 누구보다도 친밀한 ‘하늘’입니다.”

    설문에서는 친척을 만나면 불편하고 갈등이 생기는 경우를 ‘기대치 엇박자’로 봤다. 친밀도가 강한 친척과는 편하게 얘기하지만 너무 과하면 ‘의지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

    “일종의 부작용입니다. 내가 못살면 형님(친척)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형님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죠. 형님도 동생(친척)의 부탁을 외면하면 비인간적인 것 같아 고민이 많을 겁니다. 일본인은 아예 부탁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친척관계에서는 동질감과 안식처 등 좋은 점을 부각하고, 친척의 기대치가 높으면 정중히 거절해 기대치를 낮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젊었을 때는 개인주의가 강하지만 나이 들수록 한국적 민족감정을 회복하게 됩니다. 설문에서 나이가 들수록 친척에 대한 호의가 높아지는 것도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20년 후 친척관계’에 관한 설문결과와 달리, 현대 개인주의 바람으로 멀어진 친척관계는 머지않아 회복될 것으로 내다봤다. 역사가 순환하듯, 개인주의 정점에서는 다시 ‘친척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이 나올 것이란 예측이다. 친척간 귀뚜라미의 우(愚)를 범하지 말라는 얘기로 들렸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