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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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도피 욕망의 베팅 파멸에 이르는 길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입력2008-07-30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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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도피 욕망의 베팅 파멸에 이르는 길

    ‘갬블러’의 허준호. 그는 1999년 이 작품의 한국 초연 이래 10년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카지노 보스로 출연했다.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1799~1837)의 ‘스페이드의 여왕’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청년 헤르만이 일확천금의 꿈에 취해 카드 도박에 빠지며 몰락하는 비극이다. 헤르만은 도박의 지존이 되고자 과거 도박계 ‘스페이드의 여왕’이자 사랑하는 여인 리자의 할머니인 백작부인에게서 카드 다루는 비법을 빼앗으려다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고 결국 그 망령에게서 비법을 얻게 된다. 광기에 사로잡힌 채 만류하는 리자를 뿌리치고 도박장에 도착한 헤르만은 두 번을 연속으로 이겨 환호하지만, 그의 모든 것을 걸고 벌인 최후의 베팅에서 리자의 전 약혼자 에레츠키 공에게 진다. 1890년 차이코프스키가 만든 동명의 오페라에서는 도박으로 인한 파멸을 더욱 극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헤르만과 리자의 동반자살로 결말이 난다.

    뮤지컬 ‘갬블러’는 바로 이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캐릭터와 플롯을 가져와 1980년대 팝 음악계를 풍미했던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곡 중 에릭 울프슨의 히트곡을 엮어서 만든 ‘고전적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작사·작곡은 물론 대본까지 담당한 에릭 울프슨은 이를 위해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연상시키는 해설자 겸 카지노 보스를 등장시켰으며 헤르만은 ‘청년’으로, 리자는 ‘쇼걸’로 그리고 카드의 비법인 골든키를 가지고 있는 백작부인으로 극의 기본 캐릭터를 설정했다.

    ‘스페이드의 여왕’에 앞서 에릭 울프슨에게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준 것은 도박을 콘셉트로 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음반 ‘턴 오브 프렌들리 카드(The Turn of a Friendly Card)’다. 1980년 발매된 이 음반은 한 중년 남자가 현실도피를 위해 도박장에 가서 가진 것을 다 걸었다가 잃는다는 이야기 구조로 돼 있다. ‘갬블러’에는 이 음반의 타이틀 곡 ‘The Turn of a Friendly Card’ 외에 ‘Games People Play’ ‘Time’ ‘Snake Eyes’ 등 많은 곡이 사용됐다. 또한 ‘Eye in the sky’ ‘Limelight’ 같은 다른 명곡도 이 작품에서 들을 수 있다.

    ‘갬블러’는 1996년 독일 뮌헨에서 초연돼 큰 호응을 얻었고, 1999년 한국에서 아시아 초연을 가진 이후 이번까지 네 차례 공연됐다. 또 한국어로 2002년과 2005년 일본 투어를 열기도 했다. ‘갬블러’의 중심은 초연 이래 현재까지 굳건히 카지노 보스 역을 맡고 있는 허준호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파워풀한 가창력이 줄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등장만으로도 무대를 쥐락펴락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또한 이건명(청년), 배해선(쇼걸), 전수경(백작부인), 김호영(드래그퀸) 등 여타 출연진도 화려하다.

    허준호 카리스마 여전 … 안무와 편곡 안정감



    하지만 도박장에서의 탐욕과 사랑이 공존하는 대중적인 소재와 주제에도 작품의 대본은 2008년 시각에서 볼 때 다소 낡은 듯하다. 아바(ABBA)의 히트곡을 엮어 만든 ‘맘마미아’의 성공이 돋보이는 이유는 기존 음악과 새롭게 창조된 드라마의 조화 때문이다. 하지만 ‘맘마미아’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초기 주크박스 뮤지컬인 ‘갬블러’는 주요 히트곡이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스며들지 못하고 관념적으로 무대를 휘감고만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곡들을 극의 중심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는 카지노 보스가 부른다는 점에서도 드라마의 취약성을 찾을 수 있다.

    이와 함께 원작에서는 백작부인이 리자의 할머니지만 ‘갬블러’에서는 쇼걸과의 관계가 후견인으로 설정돼 있다. 이 때문에 쇼걸에게 청년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장면이나 자신의 골든키를 가져간 청년에게 저주를 내리는 장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

    상징적인 가사와 독특한 앙상블의 춤, 언더스코어(인물들의 움직임에 정확히 일치된 음악)가 많은 감미로운 음악 등 훌륭한 요소들이 부족한 드라마 구조 위에서 연출적으로 파편화되고 충돌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아쉽다. 허준호 김호영을 제외한 중심 캐릭터들이 수동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는 점과 부족한 존재감도 극복돼야 할 사항이다. 하지만 초연에 비해 ‘망자들의 춤’처럼 도박장에서 파멸당한 넋을 기리는 안무를 추가한 점이라든지, 세련된 세트와 의상이 주는 안정감은 더해졌다. 무대 후면에 자리한 8인조 라이브 밴드의 연주는 에릭 울프슨도 만족을 표시했던 깔끔한 편곡으로 귀를 즐겁게 한다. 공연은 LG아트센터에서 8월3일까지 계속된다(문의 02-577-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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