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7

2008.08.05

빈집

  • 입력2008-07-29 17:1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빈집

    -기형도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사랑을 잃고 부서진 가슴이 뛰어난 연애시를 만들었다. 모든 행이 감탄조의 어미와 조사로 마무리되어 언뜻 탄식하는 기류가 과도하게 감지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도로 숙련된 정신노동의 흔적이 역력하다. 운율을 맞추려 ‘~던 ~들아’가 줄을 바꾸며 다섯 번이나 되풀이된다. 짧았던 밤들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모르던 촛불들아,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대신하던 눈물들아. 그리고 이 ‘용언 + 복수명사’의 결합을 에워싸는 처음과 마지막 연의 3줄은 모두 어미 ‘~네’로 끝난다. 쓰네-잠그네-갇혔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위에 그는 아주 정교한 마음의 조각들을 새겨 모자이크를 완성했다. 병적으로 예민했던 시인에게 사랑은 고통이었지만, 언어의 문을 잠그기 전 그가 완성한 ‘빈집’에 머물며 독자들은 위안을 얻으리라.

    [출전]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