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5

2008.07.22

“성난 촛불 바다에선 상식 통하지 않았다”

“농업 패러다임 교체 완수 못한 아쉬움, 국익 최선 진심 밝혀질 것”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8-07-14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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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어요. 외교통상부는 국익을 위해 외교를 했고, 통산교섭본부장 역시 자신의 임무를 다했죠. 나 역시 주어진 상황에서 내게 주어진
    • 권한을 갖고 최선을 다했어요.”
    “성난 촛불   바다에선  상식 통하지 않았다”
    광장(agora)에서 ‘우익’과 ‘좌익’의 만남은 극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베트남 참전용사 ‘포레스트’가 얼떨결에 반전시위대 앞에 서게 된 장면이 나온다. 그의 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고, 뭔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연출됐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그 상황을 마이크가 꺼지는 설정으로 교묘하게 비켜갔다. 영화비평가들은 그 장면을 보고 “실제 대본을 쓰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표현의 어려움에 공감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대한민국에서도 벌어질 뻔했다. 6월10일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촛불집회에서 말이다. 이튿날 미국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1면 메인 화보를 장식할 정도로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 역사적 현장에, 쇠고기 파문의 주역 중 한 명인 정운천(53) 농림수산식품부(이하 농식품부) 장관이 자유발언을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

    “대한민국 오적(五賊) 중 하나인 정 장관이 성스러운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대신 그에게 위해(危害)를 가해선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적들이 원하는 상황입니다….”

    당시 마이크를 잡았던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 관계자는 정 장관의 집회참석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만일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면 도대체 어떤 말을 쏟아냈을까? 성난 민심은 그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 상황에서 과연 소통이란 게 가능했을까? 이 같은 궁금증을 안고 장관 교체 결정이 난 직후 정 장관에게 만남을 청했고, 우여곡절 끝에 인터뷰가 성사됐다.

    정 장관을 만난 날은 서울에 첫 폭염주의보가 내린 수요일(7월9일). 그는 에둘러 표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기자를 향한 첫마디가 “매국노로 격하된 사람에게 들을 말이 뭐 있다고…”였으니 말이다.



    - 마음의 상처를 받은 건가요. 실제 서운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촛불집회에 가니 그렇게(매국노) 말하더군요. 일부의 생각이란 걸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어요. 섭섭하다, 아니다를 떠나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반성할 필요를 느꼈죠. 물론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표현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만요. 모든 것을 돌아보고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하나의 에너지로 삼을 생각이에요.”

    대책위 초청했으면 광장에 다시 갔을 것

    - 그날(6월10일) 촛불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건가요.

    “네. 보좌진 대부분이 반대했어요. 하지만 내가 고집해 자유발언 시간에 맞춰 가자고 했죠.”

    - 만일 마이크를 잡았다면 무슨 말을 하려 했나요.

    “꼭 무슨 말을 하겠다기보다, 그런 어마어마한 촛불 민심에 정부의 반응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주무장관인 내가 책임감을 갖고 반응해보자는 마음이었죠. 그곳에서 돌팔매를 맞더라도 소통이 된다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정부가 계속 벽만 치고 있다는 불평이 나오고 국민도 소통을 원하니까(그곳에 간 거죠). 대통령이 직접 갈 수는 없잖아요.”

    -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는데요.

    “맞아요. 장관실에 돌아오니 밤이 깊었더라고요. 원래 하루 전에 대책회의 측에 (자유발언) 요구를 했지만 오지 말라고 하더군요. 꼭 무슨 말을 하려 했다기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건데…. 할 수 있으면 좋고,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 그럼 미리 준비된 원고는 없었겠네요.

    “물론이죠. 원고로 표현할 수 없는 게 있잖아요. 액면 그대로 얘기하려 했어요.”

    - 촛불집회 초기, 혹은 거절당한 이후에 다시 갔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더 좋았겠죠. 실제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에요. 그러나 장관의 정무행위는 일반인과 다를 수밖에 없어요.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 만큼, 대책회의에서 초청하는 형식이었다면 더 좋았겠죠. 그런데 불러주지 않더군요. 만일 다시 가서 또 거절당했다면 모양새가 사납잖아요.”

    - 원래 정면승부를 택하는 체질인가요.

    “네. 이제껏 후퇴해본 적이 없어요. 6월27일 원산지 표시제 홍보를 위해 대전을 방문했을 때도 시위대에 뒤엉켜 봉변을 당한 적이 있어요. 농산물품질관리원에 들어가야 하는데, 시위대가 정문을 막아서더라고요. 그렇다고 장관이 뒷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맞으며 들어갔어요.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 무언가요.

    “나올 때가 오히려 더 고민스럽더라고요. 시위대가 안 가고 서 있는데 또다시 봉변당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뒷문으로 갈 수도 없고요. 그래서 그분들에게 대화를 제의해 이해를 구했어요. 결국 무사히 홍보행사를 마치고 정문으로 나올 수도 있었죠. 그때 한 꼬마아이가 다가오더니 날달걀을 하나 주더라고요. 아이 엄마가 투척하기 위해 갖고 왔는데, 직접 만나 설명을 들으니 던질 이유가 없어 선물로 건넨 거예요. 그 달걀을 지금도 기념으로 갖고 있어요.”

    - 실제 촛불을 접해보니 어떻던가요.

    “민심이라는 바다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개념, 내가 알던 세상과는 너무 다른 세상이었어요. 서로 공유하는 개념이란 게 있잖아요, 상식이랄까. 그런데 그게 안 통해요. 4월28일 축산단체 사람들과 개방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뒤 원산지 단속을 제대로 하자고 결의했어요. 그런데 4월29일 MBC ‘PD수첩’이 방송된 거예요. 그리고 5월2일 끝장토론이 있었죠. 장관이 나가서 직접 설명하면 들어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어요. 이해는커녕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말았죠. 갑자기 일주일 만에 다른 나라, 딴 세상이 탄생한 거예요. 민심에 불이 붙으니 진짜 못 끄겠더군요.”

    정 장관은 현장 농업인 출신으로 장관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무엇보다 국내산 키위에 ‘참다래’라는 이름을 붙인 당사자로 유명하다. 그는 1984년 전남 해남에서 참다래 농장을 시작해 91년 국내 최초로 농민들이 출자한 ‘참다래유통사업단’을 설립함으로써 농업 분야의 고수익 모델을 입증하기도 했다. 이 같은 내용은 초등학교 5학년 사회교과서에 ‘참다래 아저씨’라는 신지식 농업인 사례로 소개돼 있기도 하다. ‘키위 재벌’ ‘벤처농업계의 이건희’라고 불리며 성공한 농업인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한 그는 결국 시장주의를 내세운 이명박(MB) 정부의 첫 농식품부 장관으로 발탁되는 기염을 토했다.

    - 촛불정국 와중에 ‘정 장관이 키위 수입업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나왔는데….

    “모 국회의원이 그렇게 말했죠. 꼭 한 번 화내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무역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끼리 농사만 짓고 사는 게 아름답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거예요. 나는 외국산 키위를 참다래로 만든 개척자예요. 뉴질랜드와 제휴해 참다래를 우리 대표 농산물로 성공시켰다고요. 그런데 ‘수입업자’라고 말해버리면 본말을 전도하는 거죠. 많이 슬펐어요.”

    “성난 촛불   바다에선  상식 통하지 않았다”
    - 130여 일의 장관 생활, 너무 짧지 않았나요.

    “4개월 가운데 절반인 2개월을 광우병 허상과 싸우느라 허비했고, 제대로 일한 것은 2개월에 불과해요. 그런데 그 짧은 기간에 많은 일을 했어요. 먼저 농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었죠. 과거에는 가치를 창출해 돈을 번다기보다 사회보장적, 계획경제적 농업정책이 중심이었잖아요. 이 같은 공급 패러다임에 수요 패러다임을 도입하려 노력했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반발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게임의 룰을 바꾸고 싶었어요. 공급보다 수요를 고려하고, 경쟁을 자극해 지원하겠다는 게 제 생각이었죠. 만일 전체 농식품부 예산 13조7000억원을 무조건 돈 버는 농업에만 쓴다고 했다면 난리났을 거예요. 하지만 시장경제 농업과 사회보장적 농업으로 나누고, 일단 1조7000억원만 시장경제 확립을 위해 쓰겠다니까 반발이 줄어들었죠.”

    - 장관께서는 시장주의자인가요.

    “아니에요. 농업을 ‘시장’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정부는 제도를 만들거나 컨트롤만 하고, 농민 스스로 수요자인 국민을 상대로 직접 비즈니스하면서 가치를 만들어내라는 의미로 들리는데, 우리 농업은 단번에 그렇게 되기 힘들어요. 규모가 너무 작거든요.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건 사실인데, 주체가 정부가 아닌 농민조직으로 바뀌어야 해요. 결국 농업생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공, 유통, 정보기술(IT), 생명공학(BT)을 포괄하는 국가의 중심 산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죠.”

    - 장관직 교체는 언제쯤 예감했나요.

    “예감했다기보다 당연히 내가 책임지려 했어요. 딱히 잘못을 해서 책임지는 게 아니라, 민심이 등을 돌렸다면 주무장관이 책임지는 게 당연하죠. 스타일상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못해요.”

    - 개방을 대세로 본거죠.

    “우리나라는 70%를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예요. 대세가 아니라 이미 개방된 상태죠. 쇠고기도 마찬가지예요. 개방은 됐는데 각종 질병으로 위생조건만 달라진 거예요. 미국 측은 3년 만에 위험통제국가로 복귀했으니 원위치하라는, 그리고 그 조건을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에 맞추라는 게 핵심이었고요. 노무현 정부도 합리적, 과학적 기준으로 개방하겠다고 했잖아요. 그 길목에 내가 딱 버티고 있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 완전 개방에 대한 거부감이 고조되면서 ‘30개월’ 논란이 시작됐는데, 단계적으로 개방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건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이에요. 판단 기준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관점은 달라지죠.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서 수입이 중단되기까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쇠고기가 개방됐어요. 우리 국민은 예전 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단지 최근 몇 년보다 대폭 양보했느냐만 놓고 불평하고 있죠.”

    이미 개방시대, 위생 조건만 달라져

    - 일본과 비교하면 미국에 ‘퍼줬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요.

    “모두가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일본은 광우병 소가 29마리나 발견된 나라예요. 전수 조사를 하기 때문에 미국에 큰소리칠 근거가 있는 거죠. 때문에 우리와 직접 비교하긴 힘들어요. 더구나 대한민국은 주권국가인데 우리가 먼저 개방할 수는 없을까요? OIE 기준대로 먼저 개방하고 다른 것을 더 얻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는 OIE 기준을 뒤집을 만한 근거가 약했기 때문에 협상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밖에 없었어요. 문제는 협상결과가 최근 몇 년간의 수입 기준과 차이가 크기 때문인데, 마치 정교한 시나리오처럼 뇌관이 폭발해버린 거죠.”

    -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관하는 촛불집회에 가보니 ‘음식이란 예(禮)에 속하는데, 미국의 쓰레기를 받아먹으면 안 된다’는 식의 자존심 논리가 거셌어요.

    “100년 전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폈을 때 90% 이상의 국민이 쇄국정책이 국익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일종의 생각 차이라고 할 수 있죠. 30개월 이상이 문제다, 우리만 미국의 쓰레기를 가져온다는 식으로 호도하고 있는 거예요. 객관적으로 문제를 들여다보자고요. 미국이 연간 3500만 마리 1100만t을 도축하는데 600만~700만 마리는 30개월 이상이에요. 그것도 분쇄육만 500만t 이상이 생산되고요. 이런 상황에서 30개월 이상이 쓰레기라는 표현은 경제학도 모르고, 비즈니스도 모르고, 마케팅도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과거 한국에 수입된 미국 쇠고기가 30개월 이상이 대부분인 것도 아니잖아요. 더구나 30개월이라는 구분도 큰 의미가 없어요. 20개월, 22개월이 첫 번째 상품가치를 가진 소라면 30개월 이상은 거의 없고 다섯 번 출산한 소, 즉 80개월이나 120개월로 넘어가게 되죠. 즉, 24개월 이하와 80개월 이상으로 나뉠 뿐이에요.”

    그는 이번 쇠고기 파동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러나 장관 교체가 확정됐기 때문인지 “미국산 쇠고기 국면은 어느 정도 넘어갔다”며 말을 아꼈다. 옆에 있던 보좌진이 “이젠 정보가 많이 개방됐으니 점차 이해하는 국민도 많아질 것”이라며 장관을 위로했다.

    그의 인생을 정리한 책의 제목은 ‘거북선 농업’이다. 실제 그는 인생의 멘토(조언자)로 이순신 장군을 택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란 격언은 그의 돌격구호였고, 자신이 쌓아온 사람 간의 신뢰는 그가 이루고자 했던 필생의 이상이었다. 그런 그는 최근 사석에서 “마치 이순신 장군처럼 백의종군하게 됐다”며 허탈하게 웃었다고 한다.

    - 앞으로 무엇을 할 건가요.

    “현장으로 돌아가야죠. 농업 분야의 장관감은 많은데, 현장 노하우를 갖고 있는 전문가는 많지 않아요. 내가 가진 노하우를 제대로 써먹을 거예요.”

    - 외교통상부나 청와대의 희생양이라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모두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어요. 외교통상부는 국익을 위해 외교를 했고, 통산교섭본부장 역시 자신의 임무를 다했죠. 나 역시 주어진 상황에서 내게 주어진 권한을 갖고 최선을 다했어요. 6월3일엔 검역주권을 갖고 문제가 생기면 국민이 안심할 때까지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잖아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러한 국면에서 국민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민주주의적 절차인데, 그런 서비스를 제대로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러워요. 그래서 사과드린 거고요. 국민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처리했다면 좋았을 텐데….”

    - 실제 국민들의 소외감이 컸습니다.

    “국민의 뜻을 받들기 위해 재협상에 준하는 추가협상도 하고 고시도 두 번이나 연기했어요. 절대 귀를 막고 있지 않았어요. 그리고 국익을 최대한 손실하지 않는 선에서, 국정을 책임진 위정자로서 판단하려 노력했어요. 언젠가는 이러한 진심을 믿어줄 거라 생각하고요.”

    그는 쉽사리 인터뷰를 끝내지 못했다. 기자는 4년 전인 2004년 2월, 그의 첫 저작인 ‘거북선 농업’ 출판기념식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3000명이나 모인 인파에 놀라 “혹시 출마를 준비 중인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정치가 아니라 나의 농업철학을 꼭 농정에 접목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 바람대로 그는 현장 농업인에서 장관으로 수직 상승했다.

    그러나 MB 정부의 첫 농식품부 장관인 그는 미국산 쇠고기 완전개방 파동으로 MB 정부의 첫 번째 악역(惡役)으로 기록됐다. ‘광우병 오적’ ‘MB의 희생양’이란 편향된 시선을 넘어 그의 진심이 통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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