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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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두툼’ 지갑은 ‘홀쭉’ 여성 뮤지션으로 사는 법

경제적 기반 척박해 여전히 배고픈 직업… 기 세지 않고는 못 버텨!

  • 흐른 여성 싱어송라이터 movan@hanmail.net

    입력2008-06-09 17: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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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은 ‘두툼’ 지갑은 ‘홀쭉’ 여성 뮤지션으로 사는 법

    홍대 앞 라이브 클럽 ‘빵’의 공연 모습.

    1990년대 말만 해도 여성이 밴드 음악 혹은 록 음악을 한다는 것은 꽤나 커다란 화젯거리였다. 당시에는 밴드에서 음악 하는 여성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달라붙는 가죽바지에 소리를 꽥꽥 질러대는 ‘로커’의 이미지는 ‘여자’라는 기호와 양극단을 이루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록 음악계에서 여성이란 ‘오빠’들을 쫓아다니는 그루피(groupie)들이었지 뮤지션은 아니었다.

    10여 년 새 인디 음악계에 여성 크게 늘어

    1995년 삐삐밴드를 필두로 자우림, 체리필터처럼 여성 뮤지션을 전면에 내세운 록 밴드들이 공중파에 등장하면서 한국에서 ‘록 = 남자애들의 음악’이라는 등식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홍대 앞 라이브 클럽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디 음악계에서도 그때부터 여성들이 하나둘씩 무대 아래에서 무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성 뮤지션 등장 초기만 해도 록 음악을 하는 여성은 대중매체, 인디 음악계 할 것 없이 재미있는 수다거리였다. 많은 언론은 “얼굴도 예쁜데 노래도 잘하네”와 같은 언설로 여성 뮤지션들의 등장에 화답한 반면, 인디 음악계는 음악성 없이 외모와 희소성으로 승부하는 ‘얼굴마담’들이 ‘진정한’ 록 음악을 망친다는 식의 시선으로 시비를 걸었다. 어떤 관점에서든 희소성이라는 문제는 여성 뮤지션들에게 양날의 칼과도 같았다. “여자도 음악을 하네”라는 말은 대중의 주목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여성이라는 틀에 갇히는 위험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어쨌든 여성들은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고 열심히 해온 것 같다. 최소한 인디 음악계에서만큼은 ‘여성 뮤지션’이라는 범주로 묶기엔 너무나도 많은 여성들이 활약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원이 여성인 펑크밴드 숄티캣, 프런트 우먼의 막강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네스티요나, 깨질 듯한 여성 보컬이 매력인 소규모 아카시아밴드 등의 밴드 외에도 소히, 한희정, 나비, 시와, 이주영 등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진 솔로 싱어송라이터들까지. 주말이 되면 홍대 앞에 산재한 클럽 중 아무 곳이나 들어가보시라. 이들 중 한 팀은 마주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라 연령대나 외모, 음악 스타일, 연주하는 악기도 다변화됐다. 음악을 시작한 시점이나 계기, 미래에 대한 전망도 각기 다르다.



    남들은 음악을 접을 시점인 20대 후반에 기타 하나 들고 음악을 하겠다며 라이브클럽 오디션을 보고 공연을 시작했던 나는 특이하다면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랫동안 음악을 듣기만 했던 내가 용감하게도 ‘한번 해보자’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대학원 석사 논문이었다. 여성학을 공부하던 나는 여성 록 뮤지션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공연을 보면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내 오랜 꿈을 실행에 옮겼다. 집에 있던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보컬을 구하는 게 귀찮아 노래도 함께 불렀다. 당시로서는 어쿠스틱 솔로 싱어송라이터들이 공연을 하는 거의 유일한 클럽이던 ‘라이브클럽 빵’에서 공연을 시작해 지금도 주로 ‘빵’에서 공연을 하고 있고, 지난해에는 ‘몽유병’이라는 타이틀로 EP(Extended Play·미니앨범)를 발매하기도 했다. 지금은 올 여름 발매를 목표로 정규 1집 앨범을 녹음하는 중인데, 돈이 안 돼도 음악을 계속하겠지만 이왕이면 1집으로 돈도 벌었으면 좋겠다는 ‘대범한’ 꿈을 키우고 있다.

    열정은 ‘두툼’ 지갑은 ‘홀쭉’ 여성 뮤지션으로 사는 법

    흐른은 여성학을 공부하다 홍대 앞 클럽에서 음악을 시작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듀오 그룹을 거쳐 2005년부터 솔로로 활동 중인 그는 올해 여름 첫 정규 음반 발매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음악은 여전히 배고픈 직업이다. 아니, 여전히가 아니라 갈수록 더 배고픈 직업이 돼가고 있다. 같은 클럽에서 공연하는 소히, 나비 등의 싱어송라이터들과 종종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곤 하는데, 다들 부모님께 용돈 타거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버틸 수 있는 나이는 지난지라, 대화는 언제나 “음악으로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이런 고민을 반복하는 이유는 음악으로 먹고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대학가 축제 때 1년치 먹고살 돈 비축” 우스갯소리도

    음반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1980년대와는 달리 무료로 MP3 파일을 내려받아 음악을 향유하는 지금, 음반은 소위 ‘돈 안 되는’ 사업이다. 음반사업은 없고 음원사업만 남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영미권처럼 라이브 공연을 보는 문화가 발달해서 공연 수익으로 먹고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의 경우 입장료 수입 분배는 클럽에 따라 각양각색이며, 그것도 관객이 많지 않아 클럽 운영조차 버거운 터라 애초부터 클럽 공연을 하는 뮤지션들은 대부분 ‘페이’를 받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니 대학가 축제가 몰려 있는 5월이나 10월에 ‘행사’를 열심히 뛰어서 1년 먹고살 돈을 마련해놓아야 한다는 뮤지션들의 농담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그나마 행사라고 해봤자 공연당 몇십만원을 받아 멤버 수대로 나누고 뒤풀이 한번 하면 남는 돈도 얼마 되지 않는다.

    열정은 ‘두툼’ 지갑은 ‘홀쭉’ 여성 뮤지션으로 사는 법

    “온갖 어려움은 우리 여성 뮤지션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음악을 하는 한,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라고 흐른은 말한다.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갖는 것도 녹록지는 않다. 어떤 뮤지션인들 안정적인 벌이를 확보해 마음 편하게 음악 하는 것을 꿈꿔보지 않았을까마는, 안정적인 벌이를 확보할 만한 ‘괜찮은’ 직업을 가지면서 음악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일정 시간 일을 하는 근대적 임금생활자 인간형은 시간과 에너지를 유연하게 쓰면서 작업하는 뮤지션의 라이프스타일과 쉽게 양립하지 않는다. 임금노동자에게 작업장 외에서의 시간은 말 그대로 ‘여가’인데, 뮤지션에게 음악은 ‘여가’가 아닌 ‘노동’이기 때문이다.

    결국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음악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잠재력 있는 예술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후원자(patron)’가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와는 달리 공적인 예술 후원체계가 전무하다시피 한 현대 한국사회에서 각자 알아서 ‘남편’이라는 사적인 후원자를 구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결혼은 여자의 무덤이니, 시대에 뒤떨어진 가부장적 판타지니 하는 비판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음악 하는 여성들은 기가 너무 세서 음악 하는 남성들조차도 싫어한다는 소리가 있으니.

    안정적 음악활동 위해서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

    이 말은 친하게 지내는 남성 뮤지션이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얘기라며 들려준 것인데, 그 얘기에 화가 나기보다는 여성 뮤지션의 문화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느껴져 쓴웃음이 났다. 나는 이 말을 기가 세지 않고는 음악 하는 여성으로 살아남기 힘들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기가 센 여성의 반대말은 순종적인 여성인데, 척박한 인디 음악계에서 순종적으로 있다가는 일찌감치 음악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았겠지. 무료 MP3 파일의 보편화로 메이저, 인디 할 것 없이 먹고살기 힘든 데다 대중의 관심까지 부족한 인디 음악계에서 얌전히 있다가는 그야말로 ‘음악 접고 결혼이나’ 해야 할 판인데 기가 세지 않고서야 버틸 수 있겠느냐는 소리다. 여성 뮤지션들은 독립적인(인디) 방식으로 음악을 하면서 메이저 음악자본으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나약함, 고분고분함, 의존성 같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의 독립도 배워가는 게 아닐까. 난 우리 사회가 이런 여성들에게 ‘기가 센 여자’라는 부당한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먹고산다는 것은 생계유지의 경제적 면뿐 아니라, 누구와 어떤 라이프스타일로 살 것인가의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 있기도 하다. 그래서 늘 ‘관계’라는 화두가 제기된다.

    결혼이 삶의 여러 방식 중 하나가 아니라 ‘기준’인 한국사회에서 대부분 한 번쯤은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지만, 한국사회의 ‘기준’과 동떨어져 있는 여성 뮤지션들에게 결혼은 우리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때가 되면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안정적인 소득이 없고 남들이 ‘여가’를 즐기는 주말 밤 대부분을 공연장에서 ‘일’하며, 음반작업이라도 시작되면 밤샘을 밥 먹듯 하는 우리는 사회적인 ‘평범함’의 개념에 비춰보면 튀어도 한참 튄다. 이런 우리에게 결혼생활 역시 기존의 관념과는 다르게 직조해야 하는 하나의 실험이 된다. 그것 또한 새로운 길의 개척인 것이다.

    이러한 온갖 어려움은 여성 뮤지션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음악으로 먹고사는 영미권의 인디 뮤지션들을 보며 신세 한탄해본들 여기에 있는 한, 그리고 음악을 계속 하는 한 길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어쩌면 ‘나는 남들과 다르게 살고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외로운 개척자다’라는 선민의식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과금 고지서가 쌓여가고,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해서 떠나고,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쥐어줄 명함 한 장 없고,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음악 한다’고 말하기가 주저되는 시점이 되면 선민의식의 약발도 별것 아닌 게 된다.

    ‘외로운 개척자’ 선민의식도 경제난에 약발 줄어

    어쨌든 음악 하는 여성을 찾아보기 힘들던 시대에 우리보다 먼저 기타를 들고 고군분투하며 길을 열어주었던 선배들의 노력 덕에 이제 사람들은 ‘여성 뮤지션’이라는 이유만으로 후한 점수를 주지도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는다. 이제 음악판에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 것인가와 같은 전망 속에서 총체적인 방향으로 작용한다. 나를 포함해 주변의 서른 즈음 여성들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위기감 속에서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키우며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계속해나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 글쓴이 강정임은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서 ‘여성 록 음악가의 몸의 경험과 새로운 여성 주체성의 형성’이라는 석사 논문을 썼고, 현재 홍대 앞에서 ‘흐른’이라는 이름의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여성 록의 시대

    길길이 뛰는 남성 로큰롤 한물가고, 섬세한 여성 로큰롤 쿨하게 다가와


    열정은 ‘두툼’ 지갑은 ‘홀쭉’ 여성 뮤지션으로 사는 법

    6집 앨범 때의 자우림 멤버들. 김진만, 김윤아, 이선규, 구태훈(왼쪽부터).

    솔직히 우리는 남자들이 하는 짓이 점점 구질구질하게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남자다움을 전시하는 것이 때로는 ‘귀엽기조차’ 하다. 아니면 구역질 나든가. 근육질의 남자들로 이뤄진 ‘우리 동네 사람들’, 빌리지 피플이 ‘YMCA’를 부르던 게 벌써 30년 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빌리지 피플은 동성애자 그룹이었다. 물론 사회적 시스템은 여전히 남성지배적이다. 그러나 문화적 인식의 차원에서 더 이상 남성성은 과시의 대상이 아니라 모자이크 처리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50여 년 전, 로큰롤이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 사정은 정반대였다. 로큰롤은 남성성을 날것 그대로 전시하는 일종의 공개체험이었다. 밥 딜런은 처음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았을 때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고 했다. 이 솔직한 술회는 다른 어떤 논설보다 로큰롤의 본질을 잘 말해준다. 로큰롤은 리듬과 멜로디를 통한 해방의 체험이고 어른들이 그어놓은 일상적 금기의 선을 파기하는 장이다.

    어떻게 그걸 이뤄내느냐도 중요한데, 그 방법은 간단하다. 전시와 구경이다. 예를 들면 엘비스는 아랫도리를 흔들고 늑대울음 같은 목소리를 무대에서 전시한다. 그러면 객석의 여자아이들은 자지러지는 환호성으로 화답한다. 남자들은 욕망을 전시하고 여자들은 공개된 욕망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사적이고 은밀한 욕망 자체가 공개적인 소통 대상이 됐다는 점만으로도 로큰롤은 엄청난 성적 혁명을 이뤄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로큰롤 영역에서 여성은 늘 수동태였다. 그러나 196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구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억눌린 욕망의 대상인 여성이 자기 식의 ‘블루스’를 불러젖히기 시작한 것이다. 로큰롤은 바탕에 블루스의 정신을 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억눌린 자의 외침과 닿아 있다.

    재니스 조플린은 여성 블루스의 폭발을 상징한다. 존 레논은 ‘여자는 깜둥이다(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라는 노래를 통해 여성 블루스의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사랑과 평화(Love & Peace)’의 시대, 히피 시대인 1960년대는 필연적으로 여성의 생산성과 생명력을 찬양하는 히피적인 사고방식으로 여성을 신화화한다.

    사랑과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여성 록 싱어는 로큰롤이라는 제의의 장에서 ‘여사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이처럼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여전히 소수이긴 하지만 여성은 대상에서 주체로 거듭난다.

    성적 정체성의 고전적인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1970~80년대를 거치고 90년대 들어서면서는 로큰롤의 남근성이 문제시된다. 이른바 ‘보스팅(boasting)’, 즉 뽐내는 남자가 촌스럽고 흉물스럽게 느껴진다. 남근록의 시대가 간 것이다.

    여성 록 뮤지션은 크게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남자들의 뽐냄을 여자가 재현하는 방식이다. 1970년대의 캐나다 밴드 ‘하트(Heart)’는 헤비메탈 사운드를 앞세운 여걸들이 이끌어가는 밴드였다. 두 번째 부류는 여성성 자체를 전시하는 경우다. 요즘 대부분의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파이스트(Feist)처럼 신세대의 주목을 받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내면의 방을 음악적으로 공개한다. 프랑스의 케렌 앤(Keren Ann) 역시 비슷하다. ‘Both Side Now’ 등의 걸작을 탄생시킨 70년대 조니 미첼 같은 싱어송라이터는 여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함, 깊이를 통해 남자들의 로큰롤이 주는 날것의 이미지, 폭력성 등을 뛰어넘는다. 세 번째는 가부장적인 세계의 난폭함을 폭로하는 뮤지션들을 들 수 있는데, 두 번째 부류하고 일정 부분 겹친다. 애니 디 프랑코(Ani DiFranco) 같은 페미니즘 뮤지션들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제는 옛날과 많이 다르다. 남성, 여성 어느 쪽의 로큰롤이 진짜 로큰롤인지 따지는 게 큰 의미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남자답게 뽐내고 길길이 뛰는 것은 점점 촌스럽게 느껴지고, 정적이고 섬세한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는 여성적인 로큰롤이 쿨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기운은 커져가고 있다. 여전히 소녀시대나 원더걸스 같은, 남성지배적 시스템에서 인형처럼 상품화되는 여성 뮤지션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자발적인 자기표현 방식으로 록을 채택하는 뮤지션들은 어느 때보다 늘어간다. 자우림은 말할 것도 없고 클래지콰이, 롤러코스터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은 록 밴드의 중심에 서 있다.

    성기완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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