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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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롤 타워인가 오너 친위대인가

재계 기조실, 계열사 업무 조정과 방향 설정 삼성 해체 소식에 다른 기업들 ‘촉각’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입력2008-05-07 13: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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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트롤 타워인가 오너 친위대인가

    4월22일 기자회견장에 들어서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의 뒤를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맨 오른쪽)이 따르고 있다.

    그룹 총괄기구는 두뇌인가, 주먹인가?”삼성그룹이 4월22일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면서 전략기획실을 해체한다고 밝히자 재계에서는 그룹 총괄기구의 기능에 대해 이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두뇌’로 보는 시각은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선 그룹 전체를 관장하는 유능한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점에 근거를 둔다. 반면 ‘주먹’으로 여기는 시각은 주로 기업 외부에 널리 퍼져 있다. 오너의 ‘황제 경영’을 위한 친위대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룹 총괄기구는 ‘타도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삼성그룹이 전략기획실을 6월 말까지 없애고 계열사마다 독자적인 경영체제를 이루겠다고 발표한 것은 ‘주먹’으로 보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보인다. 삼성특검을 초래한 만병(萬病)의 뿌리가 전략기획실에 있다는 비판을 수용한 것이다. 전략기획실의 이학수 실장(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이 물러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똘똘한 임직원들 각 계열사에서 차출

    재계의 그룹 총괄기구에는 흔히 기획조정실, 종합기획실, 구조조정본부, 비서실 등의 명칭이 붙어 있다. ‘기조실’ ‘종기실’ 등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삼성그룹에서는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 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자 시절의 ‘비서실’,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자의 총애를 받던 ‘종기실’이 특히 유명하다. 이러한 그룹 총괄기구는 계열사 간 업무를 조정하고 그룹 경영 전체의 방향을 설정하는 구실을 한다.

    외환위기 이전 정부는 툭하면 ‘30대 그룹 기조실장 회의’를 소집했다. 기조실장들에게 정책을 설명하고 “고분고분 따르라”고 지시하는 형식이었다. 정부가 물가를 잡겠다고 나설 때, 수출을 늘리려 민간기업을 독려할 때 이런 회의가 활용됐다. 기조실장끼리도 정보를 주고받으며 정부 정책에 대한 공동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수재의연금, 불우이웃돕기 성금 등 ‘준조세’를 낼 때도 서로 의견을 조율해 금액을 결정했다. 이렇듯 ‘기조실’은 기업에게도, 정부에게도 편리한 존재였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재벌 그룹의 기조실 때문에 방만한 경영이 이뤄졌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기조실의 축소, 명칭 변경이 대세를 이뤘다. 이 또한 정부의 종용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도 ‘30대 그룹 기조실장회의’가 사라지자 불편이 컸다. 개별 기업과 일일이 접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룹 총괄기구의 업무는 다양하다. 일간지에 그룹 이미지 광고를 게재한 뒤 광고비를 계열사 매출액에 따라 분담하는 사소한 일도 총괄기구의 몫이다. 그룹이 오페라 공연을 협찬한다면 공연티켓 분배, 협찬비 분담 등도 총괄기구에서 처리한다. 중장기 투자에 대한 우선순위 결정, 계열사 인사 교류 등 거시적인 업무를 맡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임무는 계열사 간의 이해(利害) 충돌을 조정하는 일이다. 정부기구로 따지자면 과거의 경제기획원과 비슷한 성격이다. 그룹 총괄기구엔 계열사에서 차출된 ‘똘똘한’ 임직원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오너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한다.

    컨트롤 타워인가 오너 친위대인가

    지주회사로 전환한 LG그룹(위)과 SK그룹은 그룹 총괄기구 유무 논란에서 자유롭다.

    어느 그룹의 계열사 사장을 지낸 K씨는 “기조실에 파견된 부하 실무자의 눈치를 살필 때도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오너를 가까이서 모시는 그 부하직원에게 오너의 심기를 묻거나, 그룹 내 다른 회사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귀동냥으로 얻기 위해 상전 대하듯 했다”고 털어놨다. K씨는 “특히 사장단 인사 시기가 다가오면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면서 “나에 대한 ‘존안자료’가 어떻게 작성됐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극비 사안이라며 알려주지 않더라”고도 했다.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에서 10여 년간 근무한 한 임원은 “그룹 전체를 위하는 자세로 일하다 보면 원(原)소속 회사를 서운하게 할 수도 있다”면서 “전략기획실이 해체되면 소속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동안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 걱정이 태산”이라며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전략기획실의 다른 임원도 “그룹의 신수종(新樹種) 사업 수립 등 성과를 냈다고 자부하지만 전략기획실의 역할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 때문에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항변했다.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인 어느 삼성 계열사의 현역 사장은 “7월 이후 삼성그룹을 끌어갈 ‘사장단 협의회’가 어떻게 운용될지 확실히 모르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 “전자, 금융, 화학, 기타 등 소그룹별 대표 모임이 활성화되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구학서 신세계 부회장은 4월28일 중국 상하이에서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삼성의 강점 가운데 절반 이상은 오너를 백업(지원)하는 비서실에 있었다”면서 “비서실은 회장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 지원을 하는 곳이지, 오너의 독단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전략기획실의 해체를 안타까워하는 심경에서 한 발언인 듯하다.

    삼성그룹의 전략기획실 해체에 다른 그룹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총괄기구의 규모를 크게 줄이긴 했지만, 해체 또는 추가 축소 쪽으로 물꼬가 틜지 주목된다. 이런 흐름이 정부 주도로 이뤄질지도 관심거리다. 기업들은 ‘기업 프렌들리’ 정부라 해도 역린(逆鱗)을 일으키는 기업은 괘씸죄로 응징받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러나 총괄기구 개편 같은 구체적 반응을 보인 그룹은 아직 없다.

    다양한 명칭으로 그룹 총괄기구 운용

    LG, SK, GS 등 지주회사로 전환한 그룹은 아무래도 느긋한 편이다. 여러 계열사 지분을 가진 지주회사의 총괄기구는 합법적인 권한을 갖는 만큼 정부 눈치를 덜 봐도 되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전략기획실이나 과거 방식의 기조실은 법적 실체조차 없이 계열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식의 지시를 내리는 한계를 지녔다.

    2003년 3월 지주회사 ㈜LG를 출범시킨 LG그룹은 ㈜LG에 인사, 재경, 경영관리, 브랜드 관리, 법무 등 5개 팀을 두고 출자회사 전체를 총괄 조정한다. 지난해 7월 지주회사로 전환한 SK그룹도 지주회사 ㈜SK를 통해 출자회사를 총괄하고 있다. ㈜SK는 출자회사의 독자적 경영을 보장하되 △자산가치 증진 △기업문화 공유 △브랜드 관리 등 3가지 공동 가치를 지향하도록 독려한다.

    현대·기아자동차, 롯데, 금호아시아나, 한진, 한화 등 여러 그룹은 여전히 다양한 명칭의 그룹 총괄기구를 운용하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2006년 9월부터 약 100명 인원의 기획조정실을 두고 있다. 롯데그룹의 경우 롯데쇼핑 소속인 정책본부가 그 임무를 맡는다. 황각규 정책본부 국제실장(부사장)은 비서실이 없는 롯데그룹에서 ‘비서실장’으로 불리며 신동빈 부회장 옆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전략경영본부를 가동 중이고, 한진그룹은 회장 직속으로 구조조정실을 두고 있다. 한화그룹은 기존의 구조조정본부를 2006년 경영기획실로 축소 개편해 운용 중이다. 한화는 최근 브랜드관리위원회를 설치해 그룹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두산그룹은 기획조정실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곳으로 꼽힌다.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박용만 부회장은 거대한 공기업인 한국중공업을 인수해 오늘날 그룹의 주력회사인 두산중공업으로 키우는 주역을 맡은 바 있다.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은 인수·합병(M·A)의 싱크탱크 및 사령탑 구실을 톡톡히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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