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4

2008.05.06

어두컴컴한 역사의 상처 그 모든 것 껴안는 바다와 뻘

세월 수모 딛고 일어선 격조와 품위의 땅 …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 작가들과 뗄 수 없는 인연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04-30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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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컴컴한 역사의 상처 그 모든 것 껴안는 바다와 뻘

    강화도 논둑길을 걸어가는 어느 부부의 모습.

    어떤 지역을 떠올렸을 때 그 순간 어떤 사람이 동시에 떠오른다면, 그 지역과 그 사람은 아주 행복한 인연을 맺었음이 틀림없다. 사람의 이름이 특정 지역과 가역반응을 교호한다면 이는 그 둘 모두에게, 그리고 그 사람과 그 지역을 애틋하게 여기는 모두에게 아름다운 정서적 스킨십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주 하면 박경리 선생이 있어 그 땅의 매우 높고 강건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변산의 윤구병이라면 아득한 갯벌의 잔상이 우리 삶의 아득한 미련들을 거듭 환기시켜준다. 순천 앞바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의해 더욱 매혹적이며, 남해 금산이 바로 그와 같은 제목으로 1980년대의 컴컴한 우물 속으로 들어간 이성복에 의해 기이한 산으로 돌변한다.

    이와 같은 상호작용은 예컨대 ‘영광 굴비’나 ‘순창 고추장’, 혹은 ‘아산 현충사’나 ‘천안 유관순’과도 다른 언어감각인 것이다. 앞의 토속적 정한이나 뒤의 위인열전과 달리 통영의 윤이상과 제주의 이중섭, 양구의 박수근과 춘천의 김유정은, 아직 일반인에게는 낯설 수도 있지만, 종래에는 ‘바이마르의 괴테’와 같은 항렬에 놓여야 마땅한 관계인 것이다. 그 지역이 사람을 빚어내고 그가 다시 그곳에 화룡(畵龍)의 지극한 점정(點睛)이 되는 것은 아주 갸륵한 풍경인 것이다.

    그렇다면 강화도는 어떨까? 역사적 관점에서 이 어두컴컴한 섬은 강력한 제국의 침입에 의해 수모를 겪었고 또 그것을 이겨내고자 한 강건한 땅이 된다. 조선 인조 14년(1636) 겨울에 시작된 ‘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정은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 원손, 대군 등을 강화도로 옮겼다. 그해 추위는 매서워서 굶어죽은 이와 얼어죽은 이가 싸우다 죽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까지 더해져, 지금 강화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문화유산’은 제국의 군대와 싸워야 했던 피의 흔적으로 인하여 어두컴컴하다.

    어두컴컴한 역사의 상처 그 모든 것 껴안는 바다와 뻘

    마니산 남쪽 끝자락의 동막리 해수욕장 풍경.

    강화의 깊은 그늘은,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소론이 정치적 위기를 겪자 1709년 강화로 거처를 옮긴 양명학자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1649~1736)에 의해 더욱 짙어진다. 정제두는 주자학처럼 이원적인 상응논리를 따르지 않고 상즉의 일원론을 펼쳤다. 그는 이(理)와 기(氣), 성(性)과 정(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지(知)와 행(行), 심(心)과 리(理)를 상즉하는 관계로 보았다. 그는 88세까지 장수하였는데, 천성적으로 벼슬을 꺼려하여 무려 30여 차례나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고 늘 향리에 머물렀다. 정통 주자학의 법리에서 멀찍이 벗어나 그는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사상이 어긋난 학자)으로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제두의 양명학이 ‘앙시앵 레짐’의 완전한 철폐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식들에게 ‘반드시 스승을 찾아야 하고 언제나 경서를 가까이할 것’을 권면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실학자들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위기의 조선을 구할 방도를 찾았고, 그 방법으로 왕권의 위상을 재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은 구한말의 영재 이건창,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등으로 이어졌다.



    넉넉한 대지와 바람·물빛 충만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문득 강화도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곳에도 해가 뜨고 꽃이 피고, 날마다 찬란한 기후의 위로를 받을 터인데, 무슨 전투나 치르고 상처나 받고 실각한 사람이나 은거하는 곳처럼 ‘윤색’되는 듯하여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그럼에도 늘 강화도에 갈 때마다 ‘석양’을 보러 달려가거나, 가없는 갯벌을 밟거나, 마니산의 긴 그림자를 따라 운행하는 수가 많아서, 강화도는 또 그런 인상으로 강렬한 바가 있으니 이리저리 망설여진다.

    한국문학사의 매우 귀한 존재인 박완서의 연작 중편 엄마의 말뚝에서도 강화도는 세상의 모든 상처를 넉넉히 품어주는 대지와 바람과 물빛으로 충만하다. 세 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일찍 남편을 여읜 어머니가 어린 오누이와 함께 서울로 와서 간신히 집 한 채를 마련하는 과정을 뼈대로 삼는다. 현저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무악동) 산꼭대기에 여섯 칸짜리 누옥을 마련한 어머니는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하고 말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무게는 줄거리에 있지 않다. 박완서는 전쟁과 가난 속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인이 어떻게 지난 세월을 견뎌냈는가, 그 내면의 힘은 무엇인가를 명치께가 뻐근해지는 돈후한 문장으로 벼려낸 것이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그 두 번째 작품 엄마의 말뚝 2에서, 소설 속의 어머니는 아들의 유해를 들고 강화도를 찾는다.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 어머니의 모습엔 운명에 순종하고 한을 지그시 품고 삭이는 약하고 다소곳한 여자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금 출전하려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도전적이었다. 어머니는 한 줌의 먼지와 바람으로써 너무도 엄청난 것과의 싸움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한 줌의 먼지와 바람은 결코 미약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머니를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간,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단이란 괴물을 홀로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어두컴컴한 역사의 상처 그 모든 것 껴안는 바다와 뻘

    저녁놀의 위로를 받는 강화도 동막리 풍경.

    시인 함민복은 소슬한 풍경 노래

    그러니까 강화도는 바로 그런 힘을 넉넉히 끌어안아 더러 격려도 하고 위로도 하는, 격조와 품위의 땅이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중진 소설가 구효서가 어느 방송 인터뷰에서 “칡뿌리 캐먹고, 찔레 꺾어먹고, 개암 까먹고 그런 것이 일이었죠. 강화도를 잇는 다리도 없어서 배 타고 오고 가고 그랬어요. 그 시절에 제가 본 것은 책이 아니라 꽃, 바람, 새, 바다, 노을 그런 것이에요. 그것이 기가 막힌 책이죠”라고 회상했다. 지금 우리는 안타깝게도 진정으로 황홀했던 그 황금시대의 문화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이다.

    앞서 ‘그 지역과 사람’이라는 소주제를 잠시 언급하였는데, 오늘의 관점에서 강화도는 박완서와 구효서로도 충분하지만, 반드시 생략해서는 안 될 시인이 있다. 시인은 충북 중원군의 내지 사람이다. 수도공고를 졸업하고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했으며, 서울예대에 진학하여 시를 배우고 시집 우울氏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등을 펴내 1998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는 등, 다시 말하여 강화도와 인연 맺을 일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1996년 어느 날 문득 도회지와 등을 돌리고는 강화도 남쪽 끝자락 동막리에 버려진 농가를 조금 고쳐서 살기 시작했다. 여유 있는 은퇴자들의 ‘귀거래(歸去來)’와는 전혀 다른, 개조된 폐가 속에서 시인은 시를 썼으며, 그보다 더 자주는 바다로 나가서 일을 했고, 물론 그보다 더 많이는 ‘시단 주선(酒仙) 3인’답게 대취한 눈으로 저무는 갯벌을 응시하였다. 소금을 일컬어 ‘달이 밀어준 물을 태양이 바짝 말린 물의 사리, 물의 뼈, 바닷물의 정신’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도 모두 그 대취와 응시의 결과다.

    시인은 자기의 시가 은둔과 절망의 고독이 낳은 어떤 것이 아니라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바다가 들려주는 ‘물컹물컹한 말씀’을 부드럽게 정리한 것이라고 슬쩍 물러선다. 소설가 김훈이 그를 가리켜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는 사람”이라고 말한 그 시인의 이름은 함민복이다.

    그는 극구 사양하겠지만, 어쩌면 강화도는 종종 그의 이름과 함께 불리게 될지 모른다. 그 소슬한 풍경을 상상하며 함민복이 지은, 아니 바다가 들려준 말씀을 정리한 시를 소개한다.

    “부드러움 속에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 집들이 다 구멍이네/ (…) 딱딱한 모시조개 구멍 옆 게 구멍 낙지 구멍/ 갯지렁이 구멍 그 옆에도 또 구멍구멍구멍/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지은 놈 하나 없네.”(뻘밭, 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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