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3

2008.04.29

병자호란 그 후 조선 민중의 수난사

  •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www.gong.co.kr

    입력2008-04-23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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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그 후 조선 민중의 수난사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긴장감보다 이완감이 지배하는 문화’인 농경문화 탓인지 우리 역사에는 유장함, 느슨함 같은 요소가 많다. 때문에 늘 위험이 눈앞에 다가오고 나서야 허둥대는 상황이 반복되곤 한다. 미리 위험을 내다보고 이를 준비하는 모습이 아쉬울 때가 많은 것이다.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우리도 어느 정도는 그런 약점을 극복해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고(高)유가, 고원자재 난에 대한 우리와 일본의 준비 자세는 여전히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혹자는 이런 태도와 마음가짐을 빗물에 의해서만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논인 ‘천수답’에 비유하기도 한다. 비가 충분히 내리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는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역시 준비보다는 요행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탓이다.

    2007년 베스트셀러인 김훈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동안 남한산성에 갇힌 군주와 백성이 47일에 걸쳐 겪는 고초를 유려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성 바깥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으며, 병자호란을 전후한 국제정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을까? 그리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런 부분을 다룬 책이 주돈식의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시점은 정묘호란 발발 후 9년이 흐른 뒤다. 정묘호란은 1627년의 일이고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년)에 일어났다. 후금(청)에 무릎을 꿇었다면 이후 9년 동안 조선은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청의 선발부대인 마부대 장군과 그의 부하 6000명이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거쳐 평양, 그리고 한양 근교의 양철리(홍제원 부근)에 도착하기까지 조선의 군대는 저항 한번 못했다고 한다. 홍제원에 진을 친 마부대의 군인들은 아무런 보급부대도 없이 적진 깊숙이 들어온 형국이었다. 그런데도 그들과 일전을 치르지 못한 채 조선은 지하 협상을 벌이며 후속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하는 청군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과연 조선이 제대로 된 국가인가, 9년이란 긴 세월 동안 무엇을 준비했나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9년 전 전쟁을 치른 조선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정묘호란 이후의 국방 대비책으로 수도 근위부대인 어영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호위청 군대를 각각 1만명 두며, 수도권 방어군인 총융청을 창설한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군대는 실전 경험이 없는 데다 장수들도 전쟁이라는 것을 몰랐다.

    적이 나타나면 목숨을 걸고 진지를 사수하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없었다. 군대의 장수란 명예직일 뿐이었다. 싸움에선 적당한 명분을 대고 피하는 것이 상례였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인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모두가 도망가고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손수 말고삐를 잡은 채 인조의 대가를 끌고 와야 할 정도였다. 후금이 병자호란을 일으켰을 때 나라의 기강은 이미 땅에 떨어졌으며, 신하나 백성이나 전쟁 의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포위된 왕을 도우려는 군대가 몰려오리라는 기대를 안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인조의 몰골은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리더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 하나의 놀라운 이야기는 어렵게 강화도로 피신한 봉림대군과 그 일행이 경험한 사건이다.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 있는 상황에서도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을 비롯한 패거리는 여자들을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틈을 타 청군은 단 몇 척의 배를 이용해 강화도를 함락한다. 왕족인 봉림대군이 비상시국에 검찰사가 좀더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김경징은 “전장에서 장수는 임금의 말도 거스르는 법”이라며 듣지 않았다. 어떻게 이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백미는 조선인들이 포로로 노예처럼 청나라로 끌려가는 광경이다. 약 60만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팔려가게 된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000만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정말 많은 숫자다.

    처음부터 후금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인구 규모를 늘리는 데 있었다. 이미 정묘호란을 통해 5000명의 조선인 포로를 확보한 후금은 조선 여인들이 아이를 잘 낳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후금은 다시 한 번 조선으로 대규모 노예사냥을 나서는데 이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흘러가버린 먼 시대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는 조상들이 어떻게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게 됐는지를 새겨야 한다. 이 책의 부제는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백성의 수난사’다.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노예로 잡혀갈 일은 없다. 그러나 국력이 쇠퇴하고 타인에게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민족은 언제든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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