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3

2008.02.19

특검 바늘방석 “우리 떨고 있니?”

삼성 임원들 수사 향방 몰라 ‘전전긍긍’ … 대다수 사생활 포기 “병원 갈 시간도 없어”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입력2008-02-05 15: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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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검 바늘방석 “우리 떨고 있니?”
    “A전무님, 충혈된 눈이 낫지 않네요. 안과에 가보세요.”“안약 넣으면 낫겠지요. 병원 갈 시간이 없네요. B 상무도 입술 부르튼 지 오래됐지요?”

    최근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의 A 전무와 B 상무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지난해 11월 ‘김용철 변호사 폭로 사건’ 이후 전략기획실 임원들은 거의 매일 비상근무를 한다. 휴일을 잊은 지 오래다. 회사 안팎과 자주 긴급 연락을 하느라 휴대전화 배터리가 금세 소모돼 예비용을 늘 갖고 다닌다. 한 고위 임원은 허리에 이상 징후가 생겨 회의시간에 똑바로 앉아 있기조차 힘들지만 너무 바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있다. 전략기획실 소속 어느 임원은 “몇 달 새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빠졌고 피부가 새까맣게 변했다”면서 “단골 식당에 갔더니 주인이 못 알아보더라”고 털어놓았다.

    이학수 그룹 부회장이 실장을 겸임하는 전략기획실은 그룹의 두뇌 조직으로 그룹 전체를 총괄 조정한다. 그 뿌리는 1959년 신설된 삼성물산 비서과다. 그 후 회장 비서실로 확대됐고, 외환위기 직후엔 구조조정본부로 명칭이 변경됐다. 2006년 3월 전략기획실로 이름을 바꾸고 그룹의 사람(인사)과 돈(재무)에 관련한 전략을 세우고 이끌어간다. 그만큼 책임이 크고 권한도 막강하다.

    사법처리 결과 따라 전략기획실 개편 가능성

    전략기획실 소속 임원들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하다. 계열사에서 발탁된 핵심 인재들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파견근무 형태지만 전략기획실에서 능력을 검증받으면 소속 계열사로 돌아가지 않고 전략기획실에 오래 머문다. 경영을 보는 안목을 키운 임원은 계열사 사장으로 진출하기도 한다. 사장단에는 전략기획실 출신 최고경영자(CEO)급이 20명 가까이 된다. 전략기획실 출신이 아닌 계열사 사장들은 콤플렉스를 가질 정도다. 때문에 전략기획실 임원들은 조직 충성도가 높고 자부심도 상당하다.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가 본격 진행된 지난 연말 이후 전략기획실 임원 대다수는 사생활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개인적인 식사, 골프 약속을 지키기도 어려웠다. 집안 행사에도 참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임원은 “조카 결혼식에 갈 수 없어 축의금만 보냈는데 삼성 사태 때문에 고생한다는 걸 친지 어른들이 이해해줘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가장 노심초사하는 부분은 삼성 특별검사팀 수사의 향방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사법처리 결과에 따라 전략기획실 체제에도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자신들의 자리와도 연관되는 사안이다. 이들은 1월15일 전략기획실이 특검팀에 의해 압수수색당한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과거부터 돌발 사안에 대비한 ‘시나리오 플래닝’을 세워 대처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미국 뉴욕에서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도 삼성경제연구소는 즉시 몇 개의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원유가격이 폭등하거나 국제 금융시장이 이상 징후를 보이면 여러 가상 상황을 파악해 대책을 세운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번 삼성특검 사태에 대해서는 시나리오 플래닝을 적용하기가 곤란하다. 내부 요인에 의해 사건이 불거졌고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기가 매우 껄끄럽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상 시나리오라고는 하지만 제 몸에 칼질하는 그림을 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물러날 임원, 임기 연장 기대 은근히 즐기기도

    특검 바늘방석 “우리 떨고 있니?”

    삼성 비자금 특별검사팀 수사관들이 1월25일 서울 중구 을지로 삼성화재 본사에 대한 압수수색 후 압수품을 들고 나오고 있다.

    전략기획실 임원들뿐 아니라 삼성그룹 전 계열사 임원들에게도 불똥이 튀고 있다. 특검팀 활동으로 계열사에 대한 압수수색이 실시되고 임원들이 줄지어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검팀은 1월25일 새벽 3시30분 미지급 보험금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삼성화재를 덮쳤다. 서울 을지로 본사, 경기 과천 삼성그룹 전산센터 등에 보관 중인 박스 127개 분량의 서류와 전산자료도 압수했다. 삼성화재는 마침 이날이 창립 56주년 기념일이어서 외부 인사를 초청해 조촐한 기념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삼성화재는 압수수색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기념식을 취소했다. 이에 앞서 특검팀이 1월15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의 전략기획실을 급습했을 때도 삼성전자의 기업설명회 날짜와 겹쳤다. 특검팀은 1월26일엔 원종운(54) 제일모직 전무를, 27일엔 정기철(54) 삼성물산 건설부문 부사장을 소환 조사했다.

    특검팀의 ‘칼날’이 삼성그룹 여러 계열사를 대상으로 번뜩이자 그룹 임원 전체가 좌불안석 상태다. 삼성전자 한 임원은 “한마디로 초비상 상황이며 일부 심약한 임원은 심리적 공황에 빠졌다”며 “투자, 인사 등 새해 들어 추진해야 할 일을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이번 사태를 은근히 즐기는 임원도 있다. 이번 인사에서 퇴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임원이 바로 그들이다. 매년 1월 초순 또는 중순에 사장단을 포함한 임원 정기인사가 있었는데 예년처럼 진행됐다면 벌써 물러났을 분들이다. 2월 말 주주총회 직전에 등기임원 관련 인사만 최소 폭으로 단행되고 정기인사는 특검이 마무리되는 3월 이후로 연기된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일반임원 인사에 대해서는 ‘1년간 동결설’마저 나돈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 금융회사 임원의 말이다. 임원 인사가 1년간 동결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참 부장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가뜩이나 치열한 임원 승진 인사에서 올해 일정 인원이 ‘별’을 달지 못하면 내년엔 경쟁률이 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 임원 승진 후보에 올랐다가 탈락한 어느 홍보담당 부장은 “지난해 12월 이건희 회장의 취임 2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승진 인사가 있을 것으로 전망돼 기대감에 부풀어 지난 한 해 동안 온몸을 던져 일했다”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니 허탈해지고 정확한 흐름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삼성그룹 인사가 늦어지자 ‘삼성 인사 특수’를 기대하던 관련 업체들도 애를 태운다. 삼성은 첫 임원인 상무보에게는 2500cc급 승용차를 제공한다. 그랜저TG, SM7, 뉴오피러스 가운데서 고르게 한다. 전무급에게는 에쿠스, 다이너스티에 운전기사를 배치한다. 사장급은 에쿠스나 외제차를 지원한다. 지난해엔 승진 임원이 472명이었다. 인테리어 업자들은 임원 사무실을 꾸미는 작업으로 매년 재미를 봤지만 올해는 감감무소식이어서 속이 탄다. 축하 화분을 파는 꽃집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삼성그룹의 인사 지연과 투자계획 미정 때문에 불안감은 재계 전체로 퍼지고 있다. 삼성의 선도 투자에 이어 후속 투자를 추진하는 관련 업체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의 경제정책 브레인들 사이에서도 “7% 성장 목표에서 한걸음 물러나 6% 성장을 내세웠는데 삼성 상황이 불투명하니 이마저도 달성하기 어려울까 걱정”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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