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2

2008.02.05

동양史에서 찾는 21세기형 리더십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8-01-30 18: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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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史에서 찾는 21세기형 리더십
    지난해는 정조에 관한 역사극과 책이 큰 인기를 얻었다. 올해도 사극 ‘대왕 세종’ 방영을 비롯해 ‘세종처럼-소통과 헌신의 리더십’ 등 세종 관련 서적이 쏟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 ‘오늘의 동양사상’(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7 가을·겨울호에 실린 특집 ‘흔들리는 리더십, 동양에서 길을 찾다’는 동양사를 통해 리더십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글에서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는 ‘나라의 병을 고치는 과정-의국론(醫國論)’으로 정조와 세종의 리더십을 비교한다. 정조와 세종은 둘 다 호학(好學) 군주였고 신분을 초월해 인재를 발탁했을 뿐 아니라, 각각 집현전과 규장각이라는 싱크탱크를 효과적으로 운영한 지식경영자였다.

    하지만 세종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성격에다 자기통제력이 강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듣기 좋아하는 경청의 리더로 신하들을 뒤에서 밀어주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군주였다. 반면 정조는 다변가이면서 논쟁을 좋아하는 임금으로 앞에서 신하들을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과제를 던져놓고 “함께 의논하여 아뢰라”고 한 뒤 결과를 기다린 반면, 정조는 규장각 학자들을 가르치고 숙제검사를 하며 시험을 치른 선생님이었다. 또한 정조는 국정 목표를 미리 설정해놓고 신하들에게 동참하도록 설득하거나 위협하는 개혁의 감독관이었다. 선왕 태종에 의해 공신과 외척 등이 제거된 후 즉위한 세종과 달리, 정조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외척세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정치적 소수로 즉위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발언권을 견제하면서 개혁을 카리스마적으로 리드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통제 강한 세종, 듣기 좋아하는 경청의 리더



    조광수 영산대 교수(중국학)는 중국의 현대를 만든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을 비교한다. 우선 전자는 호랑이 기운과 원숭이 기운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 성격에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진 열형(熱型) 리더이고, 후자는 집요한 흔형(?型) 리더다. 또한 마오쩌둥은 자신의 목표를 집단 목표보다 우선시하며 대중조작을 통해 자기 뜻을 관철하는 선동가형에다 자기지향적 리더였다. 대장정을 마치고 쓴 시 ‘심원춘설(沁園春雪)’에서 마오쩌둥은 진시황과 한무제는 인문적 소양이 부족하고, 당태종 이세민과 송태조 조광윤은 풍류를 몰랐으며, 칭기즈칸의 뛰어난 점은 활을 잘 쏘는 정도였다면서 역사적 인물들을 깎아내린다. 그리고 “진정한 영웅은 지금 이 대목(바로 마오쩌둥)에서 찾아야 한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만심을 뽐내기도 했다.

    반면 덩샤오핑은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집단의 당면 문제를 착실히 해결해나가는 임무지향형 리더다. 창업형이라기보다는 세종대왕처럼 수성형으로, 마오쩌둥만큼 창의적이거나 폭발적이지 않고 극단을 싫어하는 온건한 조정자였다. 마오쩌둥이 평생 정치투쟁과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며 산 데 반해, 그는 경제 현대화라는 실용적 목표를 추구했다. 또한 정조처럼 직접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하기보다는 강온(强溫) 대표들을 균형 있게 배치해 국정을 꾸려가고, 자신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큰 방향을 이끄는 절묘함을 보여줬다.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사태 때는 지도부를 압박해 강경진압을 결정했고, 자신이 후계자로 키우던 자오쯔양(趙紫陽) 당총서기를 학생들에게 우호적이란 이유로 경질하기도 했다. 1992년 남순강화 때는 아흔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생산력과 국가발전, 인민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지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실용의 대가였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의 영웅들이 리더십의 표본이다. 소설가 도몬 후유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과 ‘오다 노부나가의 카리스마 경영’(작가정신)에서 두 사람의 리더십을 소개한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내와 자식까지 죽이는 아픔을 견뎌냈으며, 권력을 가진 자에겐 급여를 적게 주고 급여가 많은 자에겐 권력을 주지 않으면서 조직의 질서와 체계를 중시한 인내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반면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버린다”는 오다 노부나가는 독특한 개성, 개방성과 결단력, 조정이나 가문, 불교 등 기존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정책을 펼쳤다. △정보력 갖춘 자를 등용 △전력투구하지 않는 부하는 축출 △부하들의 출세욕을 자극하고 활용 △직접 생각─조사─실행하는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전국시대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독단과 성급함 때문에 ‘잔혹한 악마’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결국 부하에게 불의의 죽음을 당한다.

    중국 저술가 쓰마안은 ‘CEO 칭기즈칸처럼 경영하라’(일빛)에서 칭기즈칸의 성공 비결이 읍참마속(泣斬馬謖)의 리더십에 있다고 소개한다. 칭기즈칸이 재물을 약탈하지 말라는 기율을 어긴 자신의 숙부 다리타이, 사촌 형 코차르, 당숙 알탄을 처벌한 이야기를 통해 3명의 근친을 잃었지만 대신 더 많은 인재와 부하를 얻었기에 대업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팡원뤼는 ‘제갈량 리더십’(랜덤하우스중앙)에서 제갈량이 강유를 후계자로 택한 까닭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 강유가 공과 사를 분명히 가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제갈량이 오호장군의 한 명인 마초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마초의 주군이던 장로가 부하에게 임무를 나눠주고 책임지게 하는 것은 알았지만, 믿지 못하는 속성을 이용한 덕이었다고 덧붙인다. 사람을 쓸 때는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가는 사람은 쓰지 말라는 ‘용인불의 의인불용(用人不疑 疑人不用)’이 리더십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사에서 리더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교만이었다. 춘추시대 오왕 부차는 연거푸 승리를 거둔 뒤 오만해져 적을 풀어주는 후환을 남겼다. 결국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월왕 구천에게 망하고 말았다. 적벽대전에서 우위에 있던 조조가 손권과 유비에게 패한 것도 그의 시 ‘횡삭부시(橫朔賦詩)’에 나오듯 지나치게 자만에 빠진 탓이다.

    지도자 신뢰가 정치의 기본 … 가장 큰 적은 교만1972년 9월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국교회복 협상을 했을 때의 일이다. 두 사람이 공동성명 문안에 사인한 뒤 저우언라이가 다나카에게 한 장의 메모를 주었다. ‘논어’에 나오는 ‘언필신 행필과(言必信 行必果)’라는 구절이었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착수한 일은 반드시 해낸다’는 뜻이다. 양국이 성명한 내용을 잘 지키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다나카도 ‘믿음은 만사의 근원(信は萬事の原)’이라는 글을 저우언라이에게 전했다.

    자로가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가”라고 묻자 공자는 “식량을 충분하게 하고(足食) 군비를 충분히 하며(足兵), 백성이 정치를 신뢰하게 하는 것(民意)”이라며 족병-족식의 순으로 버리지만 민초들의 신뢰를 잃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도 성공한 최고경영자(CEO)의 공통점은 신뢰를 받는 것이라 했는데, 공자 역시 신뢰가 정치의 기본이라고 한 것이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는 ‘오늘의 동양사상’에서 지금의 한국사회에 필요한 리더십은 정조와 같은 ‘앞에서 끄는 리더십’이 아니라, 세종의 ‘뒤에서 미는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또한 지도자의 독단적 결정에 의해 나라를 이끌려는 자기지향적, 선동가형 리더십보다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의사소통 행위를 존중하는 조정자형 리더십, 유가의 신뢰와 경청의 리더십, 노자의 아래에 처하는 겸손 리더십이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세종도 왕위에 올라 첫 번째로 한 말이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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