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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MB 실용주의 대해부

실용행정 빛난 서울 CEO 4년

청계천 살리고 서민의 발 빠르게

실용행정 빛난 서울 CEO 4년

실용행정 빛난 서울 CEO 4년
‘이명박 정부’엔 ‘실용(實用)주의’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7%대의 높은 경제성장률과 반듯한 나라 건설을 위해선 이념이나 정의, 도덕성 따위의 추상적 잣대보다는 실질을 숭상하는 ‘실용주의’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과거 행적을 되짚어보면 ‘실용’이라는 수식어가 숙명이다 싶을 만큼 그를 따라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현대그룹 재직 시절, 한국형 최고경영자(CEO)의 선구자격인 고(故) 정주영 회장의 지근거리에서 ‘건설 한국’의 신화를 함께 일군 입지전적 인물이다.

정계 입문 이후 짧은 정치 기간엔 그만의 실용주의적 면모가 뚜렷이 드러나지 못했다. 하지만 2002년 이후 만 4년간의 서울시장 재직 시절 화끈한 ‘이명박(MB)식(式) 실용주의’가 가히 폭발적으로 분출됐다.

그는 침체한 서울시를 재빠르게 개혁해 서울시민의 지지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끝내 대한민국호(號)의 운전대까지 넘겨받기에 이르렀다.



그의 실용주의 행정의 상징은 비단 청계천 복원뿐만이 아니다.

도심 재생 프로젝트의 정석으로 평가받는 뉴타운 사업, 전광석화같이 진행된 지하철 및 버스노선 개편과 중앙차로제 시행, 그리고 불과 2~3년 만에 세계적인 수준의 서울시립교향악단을 만들어낸 뚝심 행정을 통해 그는 지방자치단체 CEO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이나 저소득층, 심지어 전문가들의 강한 반발을 산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불도저처럼 자신의 목표 과업들을 순식간에 달성해버린 이 당선인의 마력에 흠뻑 빠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무서우리만큼 독한 그의 실용주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일까.

서울시장 재직 시절에 보인 MB식 공공분야 개혁을 통해 올해부터 펼쳐질 MB노믹스의 행적을 예측해본다.

[행정 혁명] 누구나 상상했지만 실천 못했던 청계천 복원

실용행정 빛난 서울 CEO 4년

복원공사 당시의 청계천. 철거에서 완공까지 불과 2년3개월이 걸렸다.

“청계천 문제는 종합적으로 계획하는 데만 몇 년 걸리고 정확한 실사도 필수적이다. … 실제 사업은 5~10년 걸릴 것으로 본다. 결론은 다음 임기 중 잘된 계획을 만들고, 추진은 그 다음 임기로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혼란이 올 수 있다.”(2002년 4월 민주당 김민석 서울시장 후보)

2002년 봄이었다. ‘이명박 신화’가 시작된 것은.

당시 16대 지방선거를 앞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캠프는 뜬금없이 40년간 콘크리트 더미 속에 잠자고 있던 ‘청계천’을 흔들어 깨웠다. 일개 토목공사를 서울시장 선거 제1공약으로 내세운 것도 파격이었지만, 더 놀라웠던 점은 일부 환경단체와 진보언론이 조심스레 주장하던 환경가치를 보수야당 출신 정치인이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쟁점이 없던 선거판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뚜렷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당시 이 후보는 ‘노풍(盧風)’을 등에 업은 민주당 김민석 후보를 자연스럽게 압도해나갔다.

당시 김 후보의 입장은 보통 서울시민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누구나 ‘청계천 복원’의 대의(大義)엔 동의했지만 “이 사업은 도심 교통문제를 악화시키고, 청계천 상인과 노점상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욱이 어떤 전임 서울시장도 이렇게 큰 사업을 추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강력한 반발은 오히려 서울시 내부에서부터 터져나왔다.

그러나 같은 해 7월1일 이 후보가 제32대 서울시장으로 취임하자 청계천 복원은 급물살을 탔다. 1년 만에 설계도와 청사진이 완성됐고, 철거에서 완공까지 불과 2년 3개월이 소요됐다. 당초 10년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짰던 실무진조차 “믿을 수 없다”고 외칠 정도로 숨가쁜 일정이었다.

상인들 4000여 회 만나 설득 또 설득

사업 시행 초기 전문가들은 무려 22만명에 이르는 청계천 상권 상인들과 1500여 명의 노점상을 설득하는 일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에 이 시장을 비롯한 서울시 핵심 관계자들은 청계천 상인들과 무려 4000여 회의 지루한 만남을 반복하면서 복원을 현실화했다. 그 어떤 보상 약속도 없이 장기간 공사를 이끌어낸 점은 하나의 신화로 통한다.

하지만 걸림돌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청계천 복원공사 때문에 도심 교통이 나빠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빗발쳤다. 이 시장은 태연하게 “오히려 도심 내 교통 흐름이 좋아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복원 과정에서 자동차 없이 걸어서 청계천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여기에 버스노선 개편과 중앙차로제라는 승부수까지 더해지자 도심 교통은 그의 장담대로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2004년 세계적 권위를 지닌 베니스국제건축비엔날레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토목공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이라는 아이디어와 사회갈등을 치유하는 과정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환경, 역사, 도시를 동시에 복원해낸 기념비적 프로젝트라는 수상 설명이 뒤따랐다.

2005년 10월1일 복원된 청계천은 새로워진 서울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개방 후 58일 만에 방문객이 1000만명을 돌파했다. 이젠 방문객 수를 세는 일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청계천은 빼놓을 수 없는 필수 관광지로 떠올랐다.

청계천 복원에 성공하자 이 시장과 공무원들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봇물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녹색의 서울광장 조성이 추진됐고, 동대문운동장 철거 논의와 세운상가-광교에 금융 클러스터 조성 계획까지 급물살을 탔다. 상당 부분은 현실로 구체화됐고 나머지는 후임 시장에게 인계됐다.

이 같은 신바람 행정에 신이 난 것은 낡은 서울 도심에 실망해 있던 강북 주민들이었다. 낡은 도심에 청계천 물길이 열리자 강북에 동서로 녹지축이 형성돼 그 일대가 관광벨트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니 동대문, 명동, 종로가 활력을 되찾고 자연스레 상가가 활성화됐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보다도 이 당선인 본인이다. 이후 청계천은 이 당선인의 리더십과 실천의 힘을 증명하는 ‘핵심 소재’가 됐기 때문이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이 당선인은 청계천 복원사업에 대해 “시장이 되기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실제 청계천 복원이라는 새 역사를 임기 내에 완성하리라고 본 사람은 그 자신 외엔 없다는 게 옳을 것이다.

[교통 혁명] 확 뜯어고친 대중교통체계

실용행정 빛난 서울 CEO 4년

서울 여의도의 환승센터. 이명박 서울시장으로 인해 서울 대중교통 시스템의 풍경이 확 바뀌었다.

“불편과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서울시 대중교통 개편 나흘째인 2004년 7월4일, 서울시는 낯선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이 시장이 정치 입문 후 처음으로 사과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대중교통체계가 극심한 혼란을 야기하자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그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새로 도입한 버스전용중앙차로에서 버스들이 뒤엉킨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촌극이 벌어졌고, 버스번호와 노선이 바뀐 탓에 시민들은 어느 버스를 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급기야 분노한 누리꾼(네티즌)들은 이 시장을 상대로 국민소환 서명운동에 나섰다. 이러한 대중교통 혼란은 반 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6년 6월2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제5차 세계대중교통협회 아시아태평양지역 총회가 열렸다. 40개국에서 온 교통전문가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등 500여 명은 서울시의 대중교통체계 개편에 찬사를 보내면서 서울시의 아이디어를 자국에도 도입하겠다고 너도나도 나섰다. 이들은 특히 BMS(Bus Management System)와 서울 TOPIS(Seoul Transport Operation · Information Service) 등 대중교통에 접목된 정보기술(IT)에 관심과 부러움을 나타냈다.

서울 지하철의 변화도 흥미롭다. 2004년 7월21일 새벽 4시, 서울지하철노조는 전면 파업을 선언했다. 이에 이 시장은 “파업을 감수하고라도 노조의 무리한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며 선을 그었다. 서울메트로(전 서울지하철공사)도 같은 달 22일 ‘지하철 근로자 1인당 평균연봉이 4480만원에 달한다’는 내용의 신문광고를 통해 노조 파업의 부당성을 알렸다. 결국 노조는 사흘 만에 파업을 접었다. 파업 주동자들은 해고되거나 사법처리됐다.

2년이 지난 2006년 10월27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사측인 서울메트로와 서울지하철노조가 한자리에 모여 창사 이래 처음으로 ‘노사화합 대축제 한마당 체육대회’를 열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민주노총 소속으로 대표적인 강성 노조다. 민주노총이 2주 후 총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서울지하철노조는 불참을 선언하면서 “노조 스스로 경영 개선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이날 당시 강경호 사장과 정연수 노조위원장은 줄다리기 시합 때 한 팀이 되어 힘을 합쳤다.

청계천과 함께 대중교통체계 개편은 ‘서울시장 이명박’의 대표적 성공 과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버스 준공영제 실시, 중앙버스전용차로제 및 지선-간선체계, 환승할인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한 ‘버스 개혁’은 초기 혼란에도 성공적인 사업으로 평가된다. 연평균 5.4%씩 감소하던 버스 승객이 개편 후 16.3%나 증가(2007년 상반기 기준)했으며, 버스 서비스에 대한 시민 만족도도 58%에서 개편 후 86%로 급상승했다.

지하철의 경우 2조원에 이르는 건설 부채 경감이 눈부시다. 이 당선인은 서울시장 재임 초기인 2003년 2월부터 ‘부채 다이어트’에 나섰다. 고금리 해외부채를 금리 2% 이하인 사무라이펀드 등으로 바꾸고, 예산 절감에서 발생한 잉여금을 원금 상환에 썼다.

이 같은 노력으로 시장 취임 당시 4조8300억원에 이르던 지하철 건설 부채는 2006년 말 현재 2조8000억원으로 2조원가량 줄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싼 금리로 갈아탄 것만으로도 4년 동안 이자비용을 1300억원이나 줄였다”면서 “2010년이면 건설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초기 극심한 교통 혼란 … 지금은 찬사 쏟아져

건설 부채를 서울시가 책임지는 대가로 이 시장이 서울메트로에 주문한 것은 ‘흑자 경영’이다. 이를 위해 한라중공업 대표이사를 지낸 강경호 씨가 공채 1기 사장으로 서울메트로에 투입됐다. 강 전 사장은 “이 시장의 요구는 간단명료했다. 경영합리화를 통해 자급자족하라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최저가 낙찰제 도입,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 아웃소싱, 고부가가치 동영상 광고개발 등 경영합리화에 나서 적자 규모를 큰 폭으로 줄였다. 강 전 사장 취임 전 매년 3500억원 규모였던 적자는 2005년 817억원으로 크게 감소했다.

서울지하철노조가 5년 주기로 파업을 벌여 시민들의 발목을 잡고, 서울시와 부속합의서 형태로 물밑 봉합을 해온 오랜 관례도 척결됐다. 2004년 7월 ‘사흘 파업’을 끝으로 더 이상의 파업은 없었다. 이는 이 당선인이 “노조 문제에 있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한 덕이 크다. 서울지하철노조는 파업 카드 대신 대화와 협력을 택했다. 이에 이 당선인은 경영 현안과 관련해 노조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로 화답했다.

이 당선인의 ‘대중교통 개혁’에 남은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버스준공영제에 따른 적자 지원금이 연간 1600억원에 이른다. 교통체계 개편 전에는 1000억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추가된 600억원은 서울시민들이 누리게 된 편의를 감안하면 그리 많은 수준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아직 흑자 달성을 하지 못한 서울메트로의 경우 지하철-버스 환승 할인, 심야운행, 정기권 발행 등으로 인한 적자를 서울시가 보전해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 현안이다. 그럼에도 불법 파업을 일삼던 서울메트로가 서울시민의 충실한 발로 돌아온 대목에선 누구나 이 시장의 공을 인정하고 있다.

[문화 혁명] 서울시향과 세종문화회관의 화려한 변신

실용행정 빛난 서울 CEO 4년

세종문화회관(사진 위)과 서울시립미술관은 이명박 서울시장을 만나 ‘고객 만족 서비스’의 방향으로 체질을 개선했다.

“로린 마젤(뉴욕필)이나 정명훈 씨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를 초빙하겠습니다. 우리에겐 세계적 도시에 걸맞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이 필요합니다.”

이 당선인은 서울시장 취임 직후 공공연하게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에 정명훈 음악감독을 영입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이 같은 구상에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몽상에 불과하다”는 평가절하도 있었다.

실제로 40년을 이어온 서울시 산하 예술단체들의 실상은 그 수준을 논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서울시 담당자가 이 시장에게 “이제껏 서울의 문화산업은 단체 지원 정도에 그쳤다”면서 “세종문화회관 산하 단체는 철밥통”이라고 솔직히 고백했을 정도다. 세종문화회관 산하 합창단, 무용단, 서울시향은 지원된 금액에 맞춰 찍어내듯 공연을 펼쳤고, 방만한 경영과 예술계의 복마전 인사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경쟁력 없는 공연을 팬들이 외면한 것은 어찌 보면 예고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세계적인 음악감독들이 2류 오케스트라에 부임하는 것은 먼 미래의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시장의 생각은 달랐다. 왜 서울은 베를린, 도쿄, 뉴욕, 빈 필하모닉 같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만들지 못할까? 이런 의문에서 시작된 서울시 문화단체 개혁은 마치 군대 작전처럼 순식간에 이뤄졌다.

노조사태 홍역 딛고 세계 수준 시향으로

먼저 이 시장은 CEO 출신답게 서울시향에 대한 전면적인 컨설팅 작업을 벌였다. 이 결과를 토대로 2004년 (재)세종문화회관의 출연기관인 서울시는 서울시향을 독립법인화 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동시에 노사간 임단협 해지는 물론, 세종문화회관 경영에도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CEO형 사장을 영입해 조직에 신선한 충격을 일으키기도 했다.

노조의 반발을 불러온 결정은 무엇보다 “예술단체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오디션을 통해 단원을 재평가하겠다”는 것. 이에 반발한 노조는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1년간 천막 농성으로 맞섰지만, 이 시장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단원을 새롭게 충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정명훈 감독의 영입이 가능해졌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 것이다. 정 감독조차 “한국에서 좋은 오케스트라가 탄생하기 위해선 20년이 필요하다”고 말해왔지만, 서울시의 지원은 순식간에 세계적 수준으로 탈바꿈했고 오디션을 통해 내로라하는 실력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였다. 이후 정 감독과 서울시향은 ‘물 만난 물고기’로 돌변했다. 서울시향의 ‘찾아가는 음악회’는 서울시민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다.

‘문화 서울’을 향한 이 시장의 개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울의 향후 10년 청사진을 담은 ‘비전2015, 문화도시 서울’을 통해 노들섬 오페라극장 프로젝트를 공개하면서 동북아 문화수도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2005년 초 서울시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 등 공연기관의 야간 개장을 시도했다. 시가 앞장서서 시민들의 생활패턴 변화에 걸맞은 문화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는 논리에서였다. 이 같은 조치는 단순한 영업시간 연장이 아니라 타성에 젖어 있던 조직을 서비스 기관으로 탈바꿈하는 자극제가 됐다.

지난해 10월24일은 서울시와 서울시향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로 기록될 것이다. 제62회 유엔의 날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각국 유엔대사 등 1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 총회장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바로 정명훈 감독과 서울시향이었다.

서울시향이 브람스 교향곡 2번 연주를 마치자 청중은 기립박수를 보내며 앙코르를 외쳤다. 각국 외교사절과 유엔 인사들은 한결같이 서울시향 공연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서울시향이 세계적 수준의 교향악단으로 거듭난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3년 만의 변화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극적인 변화였다.



주간동아 2008.01.15 619호 (p44~49)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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