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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어 난 지독한 우울증”

올리비아 뉴턴 존 파트너 패트릭 김 실종 2년째 … 첫 히트곡 가사와 닮은꼴 심금 울려

  • 시드니=윤필립 통신원 phillipsyd@naver.com

“당신이 없어 난 지독한 우울증”

“당신이 없어 난 지독한 우울증”
1970~80년대 청춘을 보낸 한국 남성들에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기억되는 팝가수 올리비아 뉴턴 존. 청순한 외모와 달콤한 목소리로 많은 남성 팬을 거느렸던 그녀가 2년 넘게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녀의 우울증은 한국과 인연이 있다. 10년 가까이 함께 살았던 한국계 남자 패트릭 김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생긴 우울증이기 때문이다.

올리비아는 ‘전 세계에서 그녀의 노래가 방송되지 않은 날이 없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지금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녀가 호주 국적이기 때문에 호주인들은 그녀를 ‘호주의 노래새’ ‘호주의 연인’이라 부른다. 패트릭은 왜 그토록 사랑스러운 그녀 곁을 떠났고, 왜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걸까?

올리비아의 청순함은 단아한 외모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마약과 무분별한 섹스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70, 80년대 팝뮤직계에서 그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순결을 지켰다. 동료들이 ‘수녀’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반면 1981년 발표해 공전의 히트곡이 된 ‘피지컬(Physical)’은 섹시미가 물씬 풍기는 노래였다. 당시에는 흔치 않던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해 팔등신 몸매를 뽐내며 뭇 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후 올리비아는 섹시스타의 상징으로 8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뮤지컬 영화 ‘그리스’에서 그녀가 입은 검은색 바지는 바람에 펄럭이던 마릴린 먼로의 드레스와 더불어 가장 섹시한 패션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리비아는 1948년 영국 케임브리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브라이언 뉴턴 존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였고, 같은 대학에 근무하면서 5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막스 본 교수는 그녀의 외할아버지다. 올리비아는 5세 때 가족을 따라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했고, 음악적 재능을 살리기 위해 스무 살 되던 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올리비아는 1971년 영국에서 취입한 밥 딜런의 곡 ‘당신이 없다면(If not for you)’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73년 미국 시장으로 진출해 컨트리 팝 가수로 정상에 올랐다.

1985년 결혼한 올리비아는 이듬해 딸 크로에를 낳고 남부럽지 않은 가정까지 꾸렸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거기까지가 올리비아의 오르막의 끝이었다.

그 후 유방암 발병, 뮤지컬 영화 ‘제너두’의 실패, 남편 회사의 부도 등으로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게다가 자신의 음악 장르인 컨트리 팝과 디스코풍 음악이 쇠퇴하면서 가수로서의 입지도 흔들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유방암을 극복한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

미국에 입양된 한국계 … LA서 운명적 만남

그런데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올리비아에게 ‘함께 있기만 해도 행복한 남자’가 나타났다. 바로 한국계 미국인 패트릭 맥더모트 김이었다. 8세 연하인 패트릭은 두 살 때 홀트아동복지재단을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사람으로, 자신의 한국 성인 김씨를 양부모 성 뒤에 붙여 사용했다. 광고회사 카메라맨으로 잘나가던 패트릭은 96년 LA에 광고를 찍으러 온 올리비아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당신이 없어 난 지독한 우울증”

유방암 발병 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1993년 무렵의 올리비아 뉴턴 존.

당시 우울증 때문에 아내와 이혼한 패트릭과 비슷한 처지였던 올리비아는 동병상련을 느끼면서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후 이들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부부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영어권에서 배우자로 통하는 파트너(partner)로 지냈다. 한국에서 말하는 사실혼 관계다.

올리비아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계기로 재기에 성공했다. 유방암을 극복한 체험을 바탕으로 유방암 환자 지원에 혼신을 다했으며, 환경과 질병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며 환경운동을 펼쳤다. 오랫동안 유엔 환경프로그램의 친선대사로도 활동했다. 2000년 올림픽 당시 필자는 성화를 들고 시드니타운홀에서 오페라하우스까지 달린 그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올림픽 개막 공연을 갖게 됐으니 이보다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며 들뜬 표정이었다.

당시 올리비아는 패트릭과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호주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패트릭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남자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이라며 행복해했다. 그녀는 미국 말리부 해안의 집에서 패트릭과 함께 지내고 있으며, 딸 크로에에게도 패트릭이 아주 자상한 아빠라고 했다. 올리비아가 2005년 ‘난 전보다 강해졌어요’라는 타이틀의 앨범을 발표한 것도 패트릭과의 행복한 생활에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5년 6월30일 패트릭이 캘리포니아 해변으로 밤낚시를 갔다가 실종되고 만 것이다. 이 일로 올리비아는 노래를 그만두었다.

올리비아는 그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원했다. 실종 4개월째 되던 때 미국의 TV 연예프로그램에 출연해 “너무 슬프고 고통스럽다. 나와 크로에는 그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한다”고 말했다.

밤낚시 갔다가 실종 … 노래도 그만두고 귀환 기도

올리비아는 호주명예훈장(The Order of Australia)을 받은 2006년 1월에도 “오늘같이 좋은 날 그가 없다는 게 슬프다”며 패트릭이 멕시코에서 숨어 살고 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스릴 있는 일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실종 당시 각종 부채와 전처와의 갈등으로 힘겨워했던 패트릭의 사정이 알려지면서 그가 죽음으로 위장한 현실도피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또한 멕시코 해안마을에서 그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미국 경찰이 조사에 나서기까지 했다.

얼마 전 ‘호주 우먼스 위클리(Australian Woman’s Weekly)’는 올리비아가 패트릭이 사라진 이후 우울증과 싸워온 사실에 대해 보도했다. “유방암에 걸렸을 때도, 외동딸 크로에가 거식증에 걸렸을 때도 이렇게 절망하진 않았어요. 하염없이 슬프고 암울해서 며칠 동안 운 적도 있어요.” 올리비아의 고백이다.

“돈과 명예가 행복의 조건은 아닙니다. 나는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밤마다 울면서 지냈어요. 사랑을 잃으면 천국은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을 잃은 새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요. 나이가 들면서 더 확실해지는 게 있습니다. 성공이 나의 밤을 포근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거지요(Success doesn’t keep me warm at night).”



주간동아 618호 (p74~75)

시드니=윤필립 통신원 phillipsy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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