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7

2008.01.01

“그도 나처럼 불쌍한 사람…”

  • 입력2007-12-26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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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도 나처럼 불쌍한 사람…”
    “나는 아직도 말도 안 되는 연애사건을 일으키곤 한다. 대개는 그런 사건으로 창피와 망신만 당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것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종교나 사회주의에 심취한 적이 있는데, 그때 사실은 사랑에 빠졌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랑에 빠지지 못해서 종교나 이념에 깊이 몰두하게 된 것이지. 그때는 예술도 지금보다 더 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의 편지’(반 고흐 지음·신성림 옮김·예담출판), 140쪽에서 발췌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뒤적였다. 내가 아직 젊었을 때, 서른일곱에 권총으로 자살한 화가처럼 피가 뜨겁던 시절, 내 옆에 있었던 누군가가 내게 그 책을 선물했다.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지고 언제든 다시 펼쳐보기 쉽게 접힌 페이지가 수두룩한, 그냥 책장에 묻히는 전시용 서적이 아니라 ‘사랑했던’ 흔적이 역력한 예술가의 영혼이 담긴 서한집을 쳐다보며 나는 묘한 이율배반을 느꼈다. 마흔이 넘은 내게 빈센트 반 고흐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이며, 내가 극복하고픈 순수의 표상이다.

    작품 곳곳에 묻어 있는 위대한 인류애

    그의 끔찍한 고독, 그리고 불행과 동의어인 남다른 재능을 나는 닮고 싶지 않다. 예술이 뭐기에, 예술가가 뭐기에 언제까지나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하나. 죽은 뒤 영광이 무슨 소용인가. 이제는 시효가 지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미술책이지만, 언젠가 내게도 예술이나 문학을 신성불가침한 무엇으로 알고 숭배하던 때가 있었다. 렘브란트와 반 고흐의 자취를 따라 먼 길을 떠나던 그 시절이 아득한 옛날처럼 떠오르니, 참으로 무상하며 무서운 게 세월이다.

    10년 전인 1997년 유럽을 여행하던 중 반 고흐가 생을 마감하기 전 기거한 작은 마을 오베르에 들렀다. 지금은 ‘반 고흐의 집’으로 변해 관광객으로 붐비는 여인숙의 2층. 두어 발짝 움직이면 끝인,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좁아터진 화가의 방을 들여다보며, 그리고 그 밑에 번창한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며 나는 절망했던가, 분노했던가. 너무 분개한 탓인지 내가 아끼던 검은 모자를 상점에 두고 나왔다.



    땀 흘리는 소외된 자들에게 깊은 애정

    파리 근교의 초라한 고미다락방에서 나를 엄습하던 두려움은 현실이 됐다. 반 고흐처럼 무모하고 사는 데 서툰 나는 일정한 거처 없이 오래 방황했다. 생애 처음 수도권에 장만한 작은 아파트를 대출금 이자가 부담스러워 팔고 멀리 이사하던 바로 그날, 버스 안에서 원고청탁 전화를 받았다. 전시회를 보고 글을 쓰라니…. 예술을 향유할 처지가 아니지만, 짐을 다 풀기도 전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30대를 하릴없는 여행으로 낭비하지 않았다면, 중년의 문턱에서 밤낮으로 집 걱정 따위는 하지 않을 텐데. 1년이 멀다 하고 이삿짐을 싸고 푸는 내가 한심해, 미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가만큼이나 불쌍해 이 엉성한 글의 제목을 ‘반 고흐 나처럼 불쌍한 사람’이라고 정했다.

    시청역 1번 출구로 나와 서울시립미술관까지 이어지는 골목길은 사람들로 붐볐다. 전시회 포스터 앞에서 친구끼리 연인끼리 가족끼리 기념사진을 찍는 그들의 얼굴은 구김살 없이 밝았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들이 나온 젊은 엄마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지만 1만2000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내고 기꺼이 미술을 관람하려 외출을 감행한 사람들이 평일에만 하루 평균 4000명에 육박한다니….

    “그도 나처럼 불쌍한 사람…”

    1_ ‘밀짚더미’ 1885, 캔버스에 유화,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br> 2_ ‘장미와 모란’ 1886, 캔버스에 유화,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br> 3_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석판화,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br> 4_ ‘수레국화, 데이지, 양귀비, 카네이션이 담긴 화병’ 1886, 캔버스에 유화, 트리튼 재단, 네덜란드.

    2007년 겨울, 달라진 서울 풍속도를 목격하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축구에 빠져 미술을 외면한 요 몇 년 사이 대한민국은 변했다. 고급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의 저변이 중산층 전반으로 확산된 그만큼 잘살게 됐다는 증거일 텐데. 평일 오후인데도 추운 날씨를 마다 않고 미술관을 찾은 기다란 행렬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가슴 한쪽이 착잡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이른바 ‘뜨는’ 전시,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는 잔치에만 인파가 몰린다.

    혼자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반 고흐의 그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교육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보여주겠다고, 예술을 학습시키겠다고 기를 쓰는 엄마들에게 나는 빈센트가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해 미칠 수밖에 없었던 화가의 내면을 안다면, 그가 감내해야 했던 끔찍한 고독과 고통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는지. 반 고흐의 어처구니없는(?) 휴머니즘을 자식에게 가르치려는 부모가 얼마나 될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전시실 입구에 적절히 붙은 인용문이 말해주듯 ‘반 고흐의 가치는 그의 표현방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그의 위대하고도 새로운 인류애에 있다’.

    아름다운 말이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탄광촌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거리의 가련한 창부를 동정해 자신의 집을 내줬으며, 동료 화가들을 경쟁자가 아닌 동지로 여기면서 예술인공동체를 꿈꿨던 그이지만, 반 고흐 자신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가장 큰 문제였다. 그의 시대로부터 먼 훗날 우리가 불멸의 화가, 위대한 예술가, 천재 또는 새로운 휴머니스트라고 칭송하는 빈센트 반 고흐는 천성적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애정결핍증 환자였다. 웬디 수녀가 지적했듯, 테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드러나듯(예컨대 동생에게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일을 부탁하면서도 전혀 주저하지 않는 그를 보라) 그는 나름대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점이 나의 흥미를 끌어 이 글을 쓴다. 내겐 그의 미술보다 생애가 더욱 연구할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정열적인 인간이었다. 소외된 자들에 대한 그의 깊은 (때로는 정상에서 벗어날 정도의) 애정은 네덜란드 시기의 대표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에 잘 나타난다. 탄광촌에서 일하는 가족의 식사 장면이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비견될 만큼 엄숙한 거룩함으로 빛난다. 거룩하며, 동시에 동물적으로 그려졌다. 지상에서 그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양식인 구운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시커먼 얼굴은 감자처럼 투박하며, 그들의 이목구비는-자세히 근접하면-때로 동물처럼 일그러져 보인다.

    ‘밀짚더미’ 앞에서도 나는 발길을 멈추고 오래 음미했다. 추수를 끝낸 들판에 서 있는, 서로 몸을 기댄 밀짚더미들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가. 아를이나 오베르 시기에 비해 색채는 단조롭지만, 특유의 꿈틀거리는 터치가 이미 개성을 획득해 화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노동의 숭고함을 웅변하는 모티프도 새롭다. 가난이나 고통, 노동을 관념이 아니라 생생하게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반 고흐는 위대한 리얼리스트다.

    그러나 내가 정말 내 집 거실에 걸고픈 빈센트의 작품은 화사한 꽃 그림이다. 색채의 대비가 눈부신 ‘장미와 모란’ 또는 ‘수레국화, 데이지, 양귀비, 카네이션이 담긴 화병’을 보면서 생활에 지친 눈을 쉬고 싶다.

    장황한 설명 없이, 보는 즉시 몸으로 전달되는 그림을 남겨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 불멸의 화가가 생전에 그의 동시대인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해 고통스러워했다니. 인생과 예술의 아이러니가 기막히다.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며 한시도 마음이 평화롭지 못했던, 죽도록 떠돌면서 집을 짓지 못한 그는 나처럼 불쌍한 영혼이었다. 그래도 그에겐 친구처럼 가까운 동생 테오가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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