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4

2017.02.08

인터뷰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 당사자 아니다”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장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7-02-03 16:23:2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곧 정의입니다.”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장(77·사진)은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위안부 합의’와 평화의 소녀상(소녀상) 이전 문제 등을 둘러싼 한일 갈등의 해결책을 물은 참이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국제사회의 반인도적 범죄를 처벌할 목적으로 세운 최초의 상설 국제재판소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 찰스 테일러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 등을 대량학살과 전쟁범죄 등의 혐의로 단죄한 바 있다. 송 전 소장은 ICC 초대 재판관으로 2003년부터 이곳에서 일했고, 2009년부터 2015년까지는 3년 임기의 재판소장을 연임했다.



    잘못 끼운 첫 단추

    현재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장을 맡고 있는 송 전 소장은 국제형사법과 인권법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그를 만난 건 유엔이 공식보고서를 통해 위안부를 ‘전시 성노예’로 규정하는 등 전쟁범죄 피해자임을 명확히 했는데도 반복적으로 불거지는 한일 갈등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방법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널리 알려졌듯 이 표현을 먼저 쓴 건 정부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2015년 12월 28일 한일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합의했다며 “일본이 10억 엔(약 101억 원)을 출연해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 회복,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에 쓰는 조치를 이행할 경우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고 했다. 이와 동시에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과 관련해 “가능한 대응 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도 발표했다. 이후 1년여 동안 대한민국은 이 합의 내용과 소녀상 처리 문제를 놓고 들끓었다.

    최근에는 일본이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에 대한 항의 표시로 1월 6일 주한 일본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고,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하는 등 무력시위에 나서며 한일 갈등도 커지는 모양새다. 이에 대해 송 전 소장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며 “정부가 나서는 바람에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가 특정 국가 간 과거사나 정쟁의 대상처럼 돼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가 존재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피해자는 한국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필리핀, 심지어 네덜란드에까지 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 정부가 단독으로 일본과 합의해 ‘해결’할 사안이 아닌 거죠. ‘최종적’ 해결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끝없이 사과하고 배상하고 있어요. 어느 누구도 ‘이것으로 독일이 할 일을 다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일본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는 ICC 재판관으로 일하던 시절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그에게 일본 전쟁범죄를 ICC에 제소할 수 있는지 물었지만, 그가 직접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2002년 7월 발효된 ‘국제 형사 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로마규정)은 ICC가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침략범죄에 대해 관할권을 갖는다’고 규정하면서 ‘로마규정이 발효하기 전의 행위에 대하여 이 규정에 따른 형사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한계도 명시했기 때문이다. 송 전 소장은 “하지만 국제사회가 움직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범죄 혐의자를 형사법정에 세우지 못할지라도 일본의 책임은 다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송 전 소장이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곧 정의’라고 밝힌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ICC가 생기기 전까지는 국제법을 위반한 대량학살, 침략범죄가 벌어져도 책임자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문제의식이 높아지면서 로마규정이 체결되고 밀로셰비치를 법정에 세울 수 있게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본을 변화시키고, 전쟁범죄의 책임을 다하게 할 수 있는 건 개별 정부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힘뿐”이라고 강조했다.



    합의 무효 대신 시민사회 나서야

    실제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세계 각국을 돌며 지속적으로 위안부의 참상을 고발했다. 미국 하원은 2007년 일본군 위안부가 ‘집단 강간, 강제 유산, 수치심 그리고 신체 절단과 사망 및 자살까지 초래한 성적 폭행 등을 유발했으며 잔인성과 규모 면에서 전례가 없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 중 하나’라는 내용의 결의안도 채택했다.  

    그러나 아직 일본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기엔 힘에 부친 듯 보이는 게 현실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해 10월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 편지를 보내는 문제는 털끝만큼도 생각한 적 없다”고 했고, 최근엔 “일본 정부가 합의에 따라 10억 엔을 냈으니 한국 측이 제대로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말하는 등 위안부 문제를 돈으로 해결했다는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송 전 소장은 이에 대해 “소녀상 설치를 이유로 자국 대사를 소환하는 등 현재 일본이 보이는 반응은 ‘대국’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조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유력 정치인들 역시 앞다퉈 일본 비판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중에는 “10억 엔을 돌려주고 12·28 합의를 전면무효로 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송 전 소장은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잘했든 잘못했든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 일이다. 한국은 정부가 합의서에 서명해도 언제든 뒤집는 나라라는 인식이 국제사회에 퍼지면 나라 위상이 어떻게 되겠나”라는 것이다.

    송 전 소장은 일제강점기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이후에는 언론인과 정치인 등으로 활동하다 암살당한 고하 송진우 선생의 손자다. ‘korean’으로 시작하는 e메일 주소가 적힌 명함을 들고 세계를 누비며 활동해온 그는 “일본에 대한 나의 시각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라며 “하지만 현 상황에서 기존 합의를 무효화하자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과거를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나라입니다. 국제적 영향력도 막강합니다. 그런 나라를 상대로 전쟁범죄 책임을 물으려면 더욱 집요하게, 끈질기게 노력해야죠. 복잡하게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서 한일 정부 간 협력은 불가피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와 별개로 시민사회는 끊임없이 보편적 인권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세계인의 공감을 얻어나가야 합니다. 인류의 양심이 움직이고, 그것이 거대한 힘이 될 때 진정한 정의가 실현될 겁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