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4

2007.12.11

마지막 황제와 마지막 쇼군의 차이점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12-05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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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황제와 마지막 쇼군의 차이점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

    소련에서 중국인 전범(戰犯)들이 송환되던 1950년 하얼빈 역에서 한 남자가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친다. 바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줴뤄 푸이(愛新覺羅 溥儀·1906~1967)였다. 12명의 청나라 황제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인 3세에 선통제로 등극했고, 가장 짧은 기간인 3년밖에 재위하지 못한 푸이는 유일무이하게 ‘등극-퇴위-복벽’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황제였다.

    1908년 세 살배기의 그는 서태후의 뜻에 따라 입궐한 다음 날 광서제가 운명해 그 영전에서 곡을 했고, 서태후의 병상 앞에서 쾌유를 빌었으나 사흘 뒤 서태후도 세상을 떠났다. 푸이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에 따르면 그가 황위에 오르던 날 추위에 떨며 “집으로 갈래”를 외치면서 울먹였으나, 친부는 “울지 마, 곧 끝나려고 해” 하며 어린 황제를 달랬다고 한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는 역사의 격랑에 떠밀려 황제에서 정원사로 추락한 이 어린 황제의 일장춘몽을 망국의 설움조로 보여줬다.

    푸이, 3세에 등극 3년 재위 영화 같은 우여곡절 생애

    중국 소설가 쑤퉁의 가상역사 소설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도 가상의 나라인 섭국(燮國)을 배경으로 열네 살에 제왕이 되었다가 줄타기 광대로 전락한 어린 황제의 삶을 다룬다.

    주인공 단백 또한 푸이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왕의 자리에 올라, 아버지의 후궁들과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무상한 권력보다는 하늘을 나는 새를 동경하며 숨막히는 궁정생활에서 벗어나길 바라던 사춘기 소년 단백은 결국 불행한 제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남은 반생을 고죽산에서 ‘줄타기 광대’로 지낸다. 단백에게 충성을 바치다 칼과 창을 맞고 죽은 연랑, 단백을 폐하고 제왕에 올랐지만 무능한 군주가 돼버린 형 단문, 단백의 총애를 받지만 기생으로 전락한 후궁 혜선 등의 삶도 모두 한바탕 꿈같기는 마찬가지인데, 역시 소설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인생무상이란 것이다.



    제11대 청나라 황제인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아들로 태어난 푸이도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 때 위안스카이의 압박을 받아 6세 나이로 황제 칭호와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당했지만, 한때나마 영화롭던 청제국의 황제였다. 퇴위 후 자금성 안의 황제였을 뿐인 그는 열네 살 어느 날 궁 밖에 나가본 뒤 변화한 시대의 흐름에 놀라고, 영국인 가정교사를 맞아 서양문명에 눈뜨곤 서양으로의 유학을 꿈꾼다. 그리고 황실 재산을 좀먹는 환관들을 축출하고 새 인물을 기용하는 등 나름 황궁 내 개혁을 시도하는 한편, 17세의 완용공주를 황후로, 12세의 문연공주를 후궁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1924년 군벌의 쿠데타를 피해 톈진의 일본조계지로 피신했는데, 그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던가.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만주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일본인들의 획책에 넘어간 푸이는 유학의 꿈을 접고 만주국의 강덕황제(재위 1934~1945)에 오른다. 그러나 만주국 황제는 허울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은 일본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일본에 농락당하기만 하는 푸이의 우매함에 격분한 완용황후는 아편중독에 빠지고, 운전사와의 밀애로 아이를 가진 문연공주는 푸이의 곁을 떠난다. 1945년에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증인으로 출두, 화장실에 들어가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50년에는 다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겨져 9년 동안 사상개조와 혁명교육을 받은 뒤 특사로 출감, 평범한 정원사로 지내면서 자금성을 찾아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북경만주학회 옌 총니엔의 ‘대청제국 12군주열전’(산수야)에는 청나라 황제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이한 일치현상 두 가지가 나와 있다. 첫째, 청 태조 누르하치는 지금의 무순 시에 속하는 허투알라(赫圖阿拉)에서 흥기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무순전범관리소에 수감됐다. 무순은 청나라의 발원지이자 마지막 황제의 감옥인 것이다.

    둘째, 청나라가 발흥할 때의 황후는 여허나라(?赫那拉) 씨이며 청나라가 망할 때의 태후도 여허나라 씨, 즉 서태후와 융유태후(광서제의 황후)였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황제로 칭한 뒤부터 1912년 선통제가 퇴위할 때까지 2132년 동안 중국에는 492명의 황제가 배출됐다. 푸이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일 뿐 아니라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다. 그의 퇴위는 대청제국의 종결이며 중국 황제제도의 종결이기도 하다. 또한 황제제도를 공화제로, 군주제를 민주제로 대체한 획기적 사건이기도 했다.

    일본의 저술가 모로 미야는 ‘이야기 일본’(일빛)에서 마지막 황제 푸이와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의 ‘극과 극 퇴위 후’가 일본과 중국의 역사를 바꿨다고 한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제15대 쇼군, 즉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1837~1913)도 단백이나 푸이처럼 최고 권력자에서 평민으로 추락한 인물이다.

    그런데 아시아 최초의 ‘입헌’국가인 메이지 정부는 바로 265년 동안이나 계속된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요시노부가 쇼군에 즉위한 다음 해인 1867년 대정봉환, 즉 정권을 천황에게 이양했기에 탄생했다. 일본 역사의 3대 수수께끼 중 하나인 사카모토 료마 암살사건은 시대적 추세의 압박과 그 추세를 잘 읽은 요시노부의 결단력이 교토의 천황을 도쿄에 무혈입성할 수 있도록 했다는 걸 알게 해준다.

    요시노부, 천황에게 정권 이양 후 여유자적 전원생활

    요시노부가 1867년 대정봉환을 선포한 지 한 달 후 대정봉환의 초안을 작성하고 신정부의 조직 편제를 맡은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당하고 만다. 당시 메이지유신을 이끈 세력은 두 계파였다. 하나는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의 오쿠보 도시미치와 조슈번(야무구치현)의 이와쿠라 도모미로 이들은 유혈혁명을 주장했다. 또 한 파는 도사번(고치현)의 사카모토 료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주장했다. 요시노부는 후자를 지지했다. 그래서 요시노부는 유혈혁명파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비밀조서를 주고받고 군사를 일으키려 하자 갑자기 대정봉환을 선포한다.

    하지만 유혈혁명파인 토막파 처지에서는 요시노부와 료마의 뜻대로 내전을 피하고 파죽지세로 메이지 유신정권을 수립하면 정국의 주도권을 요시노부와 료마의 도사번에게 넘겨주는 꼴이다. 그래서 그들이 료마를 암살했다는 설이 많다. 막부 측 자객집단인 신센구미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도 추측되지만, 료마를 죽인 이와 그 배후 인물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쇼군의 권좌를 내놓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향인 순푸(시즈오카 시)에 은거, 서른두 살의 왕성한 혈기를 죽이고 1913년 사망 때까지 전원생활을 고집하면서 카메라 촬영, 사냥, 유화, 가면극에 빠져 살았다. 또 쇼군 당시에는 30명의 측실을 두었지만, 순푸에 은거할 때는 가장 총애하던 애첩 두 명만 데리고 살았다.

    모로 미야는 또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푸이의 차이를 하반생의 기록 유무에서도 찾는다. 푸이는 자서전을 남긴 반면, 요시노부는 하고픈 말을 일부러 참았는지 아니면 삶에 초탈했는지 40년간 침묵을 지켰다. 그가 남긴 건 두 애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열두 명의 후손뿐이다. 결국 모로 미야가 보기에 ‘마지막 황제’ 푸이보다 ‘마지막 쇼군’이 좀더 현명해, 최고 군주 자리에서 물러난 뒤 막부의 추억을 뒤로한 채 다른 생각, 즉 정치적 욕망을 접었기에 반평생 괴로움에 시달린 푸이보다 훨씬 평화로웠다고 한다.

    제왕의 생애에 관한 책들은 흔히 ‘정치는 유가 또는 법가 아니면 도가’라는 걸 다룬다. 쑤퉁의 소설도 왕의 화려한 삶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황제의 삶 또한 “비 오는 밤에 놀라 깨어났을 때의 꿈결 같은 것”이라고 한다. 도가적이다. 만약 마지막 황제와 마지막 쇼군이 쑤퉁의 소설을 읽는다면 누가 더 잘 이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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