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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키우는 ‘열공’, 두터워진 형제애

문경 삼남매 보통 청소년으로 변모 내년 출소 엄마와 새 생활 ‘기대 반 설렘 반’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꿈 키우는 ‘열공’, 두터워진 형제애

꿈 키우는 ‘열공’, 두터워진 형제애
“기적이 있었어요. 윤호(가명·16)가 전교 2등을 했답니다!”‘인권피해자를 위한 오픈클리닉’(대표 조용범)이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지난해 11월 ‘주간동아’가 보도했던 문경 삼남매(제561호 ‘문경 삼남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다’참조)가 지난 1년 동안 믿기 어려운 기적을 일궈냈다고 한다.

평생 술에 취해 가정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를 어머니가 우발적으로 살해한 2년 전, 삼남매는 보통 청소년과 달리 생에 대한 의욕이 없었다. 10년 넘게 계속된 가정폭력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가 심각했고, 환시 환청 환각 등 소아정신분열 증세마저 보였다. 첫째 세정(가명·17)이는 타인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자해가, 둘째 윤호는 환시·환청과 위축된 심리상태가, 막내 재호(가명·14)는 툭하면 터져나오는 폭력성이 특히 문제였다.

“이젠 PTSD 등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

그랬던 아이들이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2006년 4월부터 토요일마다 심리치료사이자 과외교사, 보호자 등 다역(多役)을 자처한 오픈클리닉 연구원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생긴 변화다. 임상심리학 박사인 조용범 대표는 “세 아이 모두 PTSD나 소아정신분열 증세 등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완화됐다”고 평가했다.

먼저 윤호는 ‘공부장이’가 됐다. 2년 전만 해도 수학시험에서 한두 문제 맞히는 실력이었던 윤호가 고등학생이 돼 전교 2등 자리를내내 고수하고 있다. 윤호의 꿈은 오픈클리닉 연구원들처럼 심리학자가 되는 것. 고려대 심리학과 진학이 목표란다. 자신처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돌봐주고 싶은 생각에서다. “선생님은 제 라이벌이에요.” 해리포터를 닮아 연구원들 사이에서 ‘완소훈남’이라 불리는 윤호는 가끔 장난 섞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얼마 전 윤호는 성적우수생으로 뽑혀 한 복지재단으로부터 장학금 100만원을 받았다. 윤수정 연구원은 “윤호가 이 돈을 단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누나 병원비를 내주고 동생에게 책을 사줬다”며 대견해했다.

세정이는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자해하는 버릇과 열심히 싸우고 있다. 요새는 오픈클리닉 연구원들이 지도해준 대로 손목에 고무줄을 차고 다닌다. 샤프심으로 손목을 긁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마다 대신 고무줄을 튕긴다.

유기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세정이는 연구원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곤 했다. 그런 행동이 점차 사라지더니 요즘은 아주 의젓하다. 예전에는 함께 급식을 먹을 친구가 없어 학교생활을 힘들어했는데 얼마 전부터 3명의 친구들과 단짝으로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세정이의 꿈은 선교사다. 요새는 자기 성적으로 신학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기도 한다.

재호는 못 말리는 개구쟁이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충동적으로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을 더는 하지 않는 ‘절도 있는’ 개구쟁이다. 자기 몫의 집안일을 형이나 누나에게 자주 미루는 통에 ‘새싹(연구원들이 잘한 일에 대해 주는 포인트. 잘못을 저지르면 새싹을 빼앗는다)’이 가장 부족한 처지다. 그래도 밥 먹을 땐 먼저 식사를 마친 뒤 연구원들과 누나, 형에게 물을 한 잔씩 돌릴 정도로 젠틀맨이다. 그렇게 신사답게 군 다음 “새싹 하나 주세요”라며 손을 벌려 연구원들을 웃게 한다.

제빵기술 배우는 엄마는 출소 후 빵집 낼 계획

꿈 키우는 ‘열공’, 두터워진 형제애

오픈클리닉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문경 삼남매. 왼쪽부터 세정 양, 재호·윤호 군.

툭하면 누나나 형에게 퍼붓던 욕설도 많이 줄었다. 하루 2~3시간으로 컴퓨터와 TV 사용을 제한한 규칙도 잘 지키고 있다. 공부를 재미없어하는 것이 연구원들의 걱정이지만 그래도 문경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이에스더 연구원은 “얼마 전에는 수학문제집을 갖고 와 가르쳐달라고 하더니 40분 동안 집중했다”며 달라진 재호를 칭찬했다.

두터워진 형제애도 1년 사이 나타난 기적이다. 처음 오픈클리닉을 찾았을 때, 삼남매는 각자 멀리 떨어져 앉아 간식을 먹곤 했다. 서로 관심 없고 싸움만 잦은 삼남매에게 가족이란 단어는 없었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있었던 지난날의 폭력을 생각한다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윤호가 재호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재호는 아픈 누나를 대신해 설거지를 한다. 재호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면 누나와 형은 가만 재호의 얘기를 들어준다. 그 다음 서로 이야기를 나눠 이견을 조절한다. 물론 재호의 ‘억지’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재호는 그 일로 마음 상해하지 않는다. 이에스더 연구원은 “예전에는 말싸움에 그쳤는데 요새는 셋이서 토론을 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평했다.

9월에는 새싹장터를 열었다. 그동안 모은 새싹을 가지고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게 한 행사다. 먼저 윤호가 야구모자를 샀다. 형의 모자가 부럽지만 새싹이 모자라 아쉬워하는 재호를 보고 윤호는 자기 새싹으로 똑같은 야구모자를 사서 선물했다. 채송희 연구원은 “가족에게 선물을 사주고 받는 게 이 형제들에게는 낯설지만 설레는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경 삼남매에게 남은 과제는 내년에 출소하는 엄마와 가정을 이루는 일이다. 교도소에서 제빵기술을 배우고 있는 엄마는 출소 후 문경에서 빵집을 낼 계획이다. 조용범 대표는 “엄마 역시 PTSD 등 심리적 장애가 많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하다”며 “이제 조금씩 엄마와 함께 사는 생활에 대해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가 아빠한테 용서 안 한다고 했는데, 용서도 안 했는데 돌아가셔서 너무 슬프다.”(세정)

“내 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보다 높게 오를 수 있다고. 그러기 위해선 공부해야 한다. 내 목표는 일단 고려대 심리학과! 목표를 위해 열공, 고고씽~.”(윤호)

“나의 마음속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악마의 마음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옛날얘기이고 요즘은 걱정이 없다. 얼른 어른이 돼서 내 맘대로 하고 싶다. ^^”(재호)

-최근 문경 삼남매가 쓴 ‘내 마음의 소리’ 중에서

오픈클리닉(www.openhrc.org)은 문경 삼남매 외에도 가정폭력, 성폭력, 5·18, 기타 범죄 등의 인권피해자를 치유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오픈클리닉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면서 찾아오는 피해자 수도 느는 추세다. 때문에 지원 역량이 갈수록 달리는 형편. 윤수정 연구원은 “재정적 후원뿐 아니라 심리, 사회복지, 정신건강 분야 연구원이 필요하며 아이들 공부 봐주는 등의 자원봉사자들이 더 많이 오픈클리닉에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피력했다.

후원 SC제일은행 433-20-262146(예금주 오픈클리닉 조용범), 문의 02-563-3853




주간동아 614호 (p34~35)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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