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3

2007.12.04

“너 죽고 나 살자” 아수라장 정치판

‘LA發 태풍’ 김경준 귀국 일주일 “범법자 후보” “세탁 정당” 원색 비난전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7-11-28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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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죽고 나 살자” 아수라장 정치판
    11월15일 오전 11시20분경(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 활주로에 대기 중이던 한국행 비행기를 향해 버스 한 대가 조용히 다가갔다. 잠시 후 미국 연방보안관들에게 이끌려 버스에서 내린 40대 초반 남성이 한국 검찰 호송팀에 넘겨져 비행기에 올랐다.

    2001년 12월 미국으로 도피한 뒤 BBK 주가조작 사건의 주범으로 수배돼온 김경준(41·사진) 씨는 6년 만에 그렇게 송환길에 올랐다. 비행기 이륙은 낮 12시10분, 한국 시간으로는 16일 새벽 5시10분이었다.

    한국에는 며칠 전부터 ‘LA발(發) 초강력 태풍 경보’가 내려져 있던 상태. 실제로 이날 오후 6시쯤 김씨가 인천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대선판은 숨막히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김씨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BBK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 다스의 BBK 투자금 190억원의 출처, 다스의 실소유주 의혹 등 그동안 무수히 제기됐던 의혹의 열쇠를 쥔 당사자 가운데 한 명. 이른바 이번 대선의 최대 변수다.

    이후 일주일간 여야는 한 치 양보 없는 공방을 이어가며 수사를 진행 중인 검찰을 흔들어댔다. 여의도 국회와 각당 후보의 선거캠프, 서초동 검찰청사 기자실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논평과 성명서가 발표됐고, 5분이 멀다 하고 브리핑이 이어졌다. 생사를 건 진실게임 속에서 진실은 거짓으로 덮이고, 거짓은 또 진실로 둔갑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 숨막히는 현장 속으로 안내한다.



    11월16일 김경준 송환

    김씨를 실은 비행기가 태평양을 건너오는 동안 여야 정치권은 이른 아침부터 벌집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이 후보의 BBK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을 연일 제기했던 대통합민주신당(이하 신당)의 선제공격이 시작됐다.

    먼저 김효석 신당 원내대표가 이날 오전 9시30분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포문을 열었다. “한나라당이 김경준의 귀국을 앞두고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민란을 선동하더니 대놓고 검찰을 협박한다. 마치 삼류 조폭영화를 보는 것 같다. 주연은 이명박 후보이고 조연은 한나라당인데, 2막이 오르면서 새로운 조연이 떠오른다. 그 조연이 홍준표 의원인 것 같다.”

    송두영 부대변인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명박 후보는 수사 결과에 따라 후보 자격을 상실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박근혜 전 한나라당 총재가 당내 경선과정에서 이 후보를 겨냥해 ‘불안한 후보’ ‘의혹투성이 후보’ ‘국민이 실망하고 분노할 후보’라고 말했을까. 한나라당이 마치 정권을 잡은 것처럼 즐겼던 ‘오만의 잔치’는 오늘로 끝났다.”

    이명박 소유 건물 성매매업소 의혹 터지자 신당 융단폭격

    이회창 후보와 문국현 후보 측도 한나라당과 이 후보에 대한 공세에 가담했다. 이회창 후보 측 강삼재 대변인은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 후보직 사퇴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했고, 문 후보 측 장유식 대변인은 “검찰은 ‘죽을 각오’로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과 이 후보는 무시와 비아냥, 음모론으로 저항했다. 이날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국민성공대장정 서울대회에 참석한 이 후보는 “나를 음해하려는 세력도 자기네끼리는 ‘한나라당 얘기가 맞다. 우리 한번 해보는 거지’ 이러고 있을 것이다”면서 “저들도 바보가 아니니 무엇이 사실인지 알면서 공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준표 의원은 같은 자리에서 “최근 (김경준 씨 측에서) 협상 제의가 들어왔으나 역공작으로 불씨를 남길 수 있어 거절했다. 그러자 김씨는 저쪽(대통합신당을 지칭하는 듯)이랑 협상해 이 후보에게 생채기를 내 낙마시켜주면 형량을 줄여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것”이라며 뒷거래 의혹을 제기했다.

    11월17일 김경준 영장청구

    국내 송환과 동시에 검찰에 압송된 김씨는 다음 날까지 조사를 받았다. 영장청구를 위한 검찰 수사가 빠르게 전개되면서 정치권에는 긴장감이 고조됐다. 이날도 날선 공방은 이어졌다.

    한나라당 정광윤 부대변인은 전날 이 후보의 사퇴를 요구한 이회창 후보 측을 향해 격한 비난을 쏟아냈다.

    “이회창 씨는 어떤 말로 위장한다 해도 정권 교체 훼방꾼일 뿐이다. 이명박 후보의 뒷다리를 잡겠다는 흑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겉으로는 ‘한나라당의 제2중대’로, 속으로는 ‘여권의 제2중대’로 행세하고 있는 이회창 씨야말로 전형적인 야누스다. 대권중독증에 걸린 사람은 바로 국민과의 정계 은퇴 약속을 번복하고 새치기로 끼어든 이회창 씨다.”

    신당 유은혜 부대변인은 전날 한나라당 측에서 제기했던 김씨와의 뒷거래 의혹에 대해 “정권을 잡으면 ‘정치검찰을 색출하겠다’며 검찰을 협박하는 홍준표 의원, ‘BBK 공작에 DJ 측근 개입’ 운운하며 허위 주장하는 박계동 의원, 이름도 대지 못하면서 ‘여권 중진인사가 김경준 씨의 국내 송환을 주도하고 있다’고 거짓 주장하는 정형근 의원 등 정치공작 3인방을 보면 한나라당은 원조 공작정당임이 분명하다”고 비난했다.

    이해찬 공동선대위원장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국민대통합위원회 출범식에서 “이 후보는 거의 범법자 현행범”이라면서 “내가 판사였다면 종신형에 처했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추방해 달나라로 보내야 한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11월18일 김경준 구속수감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한 김씨를 검찰이 구속하자 이번에는 한나라당의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수사 추이를 지켜보며 방어자세를 취하던 한나라당이 적극 공세로 돌아선 것. 한나라당 박형준 대변인은 신당과 정동영 후보를 향한 비난을 쏟아냈다.

    “정동영 후보와 신당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입만 열면 공갈 협박이다. ‘저능력’ ‘저신뢰’ ‘저품격’의 ‘3저 후보’임을 만천하에 확인시켜주고 있다. 대통령 후보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격마저 벗어던지고, 동네 선거 수준의 상대 헐뜯기에 혈안이 돼 있다. 지금이라도 정동영 후보는 구강청결제를 사용해 더러워진 입을 씻기 바란다.”

    박 대변인은 또 범여권 통합논의에 대해 “당을 쪼갰다 붙였다를 반복하는 정당 세탁은 대선과 내년 총선을 위해 국정 실패의 책임을 세탁하려는 저질 쇼에 불과하다. 위장폐업 후의 신장개업은 탈세범의 상투적 수법이다. 신당은 열린우리당의 땟자국을 지우자는 세탁 정당이요, 민주당과의 합당 쇼는 신규 투자자를 앵벌이 시키기 위한 세탁”이라고 말했다.

    이에 신당은 전날 공작정치 3인방으로 몰아붙였던 한나라당 홍준표 정형근 박계동 의원을 허위사실 공표를 통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한편 맞불도 놨다.

    김현미 대변인은 “한나라당은 아마 매일 밤 잠을 못 자고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검찰과 국민을 협박하는 것이고, 하나는 김경준 씨를 거짓말쟁이로 몰아 불리한 진술과 검찰수사 결과를 거짓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보면 이 후보는 공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정 후보는 이날 창조한국당 문 후보에게 당대당 합당 및 후보 단일화 논의를 공식 제의했다.

    11월19일 이명박 소유 건물 성매매업소 논란

    검찰은 김씨에 대한 수사 진행 상황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런 가운데 이 후보 소유 건물에서 영업 중인 한 유흥업소가 성매매를 알선했다는 의혹이 한 언론을 통해 불거지면서 여야 간 전선이 확대됐다. 문제의 건물은 양재동 소재 영일빌딩으로 이 후보의 회사인 대명통상에서 관리 중이다.

    신당은 오전부터 융탄폭격을 시작했다. 김 대변인의 현안 브리핑 내용이다.

    “참으로 뻔뻔하고 이만저만한 양심 불량, 도덕 불감증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이명박 후보는 무조건 돈만 벌면 된다는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피와 눈물뿐 아니라 법과 양심도 없는 분이다.”

    그동안 이 후보에 대한 직설적인 공격을 삼갔던 이회창 후보도 이날부터는 태도를 180도 바꿔 거친 단어들을 쏟아냈다.

    이회창 후보는 이날 경남대 초청 강연에서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상황에 따라 편리한 대로 입장을 바꿔서 말하는 정치인에 지나지 않는다. 후보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한나라당 전체가 후보의 인질이 돼버렸다. 한나라당이 왜 이 후보 한 사람 때문에 욕을 먹고 곤혹을 치러야 하는가”라며 비판했다.

    그러자 한나라당 정 부대변인은 신당 김 대변인을 직접 겨냥해 비난을 퍼부었다. “통합신당은 사기꾼들과 한통속이라 그런지 소속 의원들도 사기꾼을 닮아가고 있다. 특히 김현미 대변인은 요즘 날이면 날마다 국회 기자실에 나타나 오전 오후 가릴 것 없이 허위 날조를 하고 있다. 아예 소설을 쓰고 있다. 그것도 지겨울 정도로 했던 거짓말을 연일 재탕 삼탕하고 있다.”

    이어 강성만 부대변인은 이회창 후보를 향해 “정권 교체 세력의 분열에 대해 국민과 역사 앞에 참회 선언부터 하라”고 요구했다.

    11월20일 이명박 후보와 부인 운전기사 위장취업 논란

    신당 강기정 의원은 이날 이 후보에 대한 의혹을 한 가지 더 추가했다. 이 후보가 자신과 부인의 운전기사를 개인사업체인 대명기업, 대명통상에 위장취업 시켜 회사경비를 부풀려 세금을 탈세했다는 것. 그러면서 정치자금법 및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이 후보가 최소한 대선 후보로 출마한 2007년 4월부터는 정치자금법상 운전기사도 회계책임자를 통해 급여가 지출되는 것이 정상이라는 지적이다. 강 의원은 이 같은 이유를 들어 이 후보의 후보 사퇴를 촉구했다.

    한나라당 박 대변인은 이에 대해 “폭로를 위한 폭로”라면서 범여권 통합과 후보 단일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 후보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창조한국당이 동시에 두 곳에 청혼하는 난봉꾼을 거절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동영 후보는 표를 얻을 능력이 없다. 금융 사기꾼의 입만 쳐다보면서 이 당 저 당 집적거리고 있다.”

    전날 민주당과의 통합 협상이 무산되고, 이날 문 후보에게서 통합 전제조건으로 후보 사퇴를 요구받은 사실을 비꼰 말이다.

    문 후보는 기자회견을 갖고 정 후보에 대해 “스스로 더는 희망을 줄 수 없는 무능한 정치세력임을 인정하고, 부패와 무능을 넘는 대한민국 재창조를 위해 후보 사퇴를 공식 요청한다”고 발표했다.

    이면계약서 원본 안 밝히자 한나라당 대대적 역공세

    11월21일 김경준 부인 이보라 기자회견

    김씨의 누나 에리카 김 씨의 기자회견이 예고되면서 한나라당은 초비상 상태였다. 최대 관심사는 김씨 측 변호사가 예고한 이면계약서의 공개 여부였다. 그러나 이날 기자회견은 김씨의 부인 이보라 씨에 의해 진행됐고, 이면계약서의 사본 일부만 공개됐다.

    이를 두고 여야 정치권은 또 한 차례 거센 공방을 이어갔다. 신당 측은 검찰 수사 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도 검찰에서 충분히 진상규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한나라당 측은 이면계약서의 존재 자체를 전면 부인했다.

    한나라당 박 대변인의 주장이다. “이보라의 기자회견도 가히 가족사기단다운 ‘가짜 약 팔기’였다. 에리카 김이 출연할 듯이 잔뜩 애드벌룬을 띄우고, 무슨 경천동지할 이면계약서라도 있는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변죽만 울리다 끝났다. 전형적인 ‘가짜 약 팔기’ 수법이다. 신당은 이 ‘가짜 약장수’의 호객꾼 노릇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심재철 원내 수석부대표는 “결국 뻥튀기로 확인됐다. 어제 요란을 떨면서 폭풍 전야, 중대 분수령, 한나라당에 긴장감이 감돈다는 등의 온갖 미사여구가 동원됐지만 결국 사기꾼의 헛소리로 밝혀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1월22일 이명박 친필 서명 논란

    전날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에리카 김씨가 이날 오전 국내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이면계약서의 실체를 거듭 주장하고, 이 후보와 동생 김씨가 만난 것은 1999년이라면서 이 후보의 출입국기록과 여권을 공개하라고 압박하며 거칠어진 여야 공방에 기름을 부었다.

    신당은 전날 이 후보의 친필 서명 검찰 제출과 관련해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엇갈린 입장을 지적했다. 이 후보는 “검찰이 친필 서명을 요구한다면 안 해줄 이유가 없다”고 말한 반면,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검찰의 친필 서명 요구는 후보에 대한 직접 수사를 개시하겠다는 의미로 보고 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신당 송두영 부대변인은 “이 후보는 검찰 수사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검찰 수사를 피해가려는 얄팍한 꼼수를 쓰고 있다. 진실은 감추고 말로만 법대로 하자는 한나라당의 천박한 이중플레이가 지겹다”고 힐난했다.

    반면 한나라당 박 대변인은 이날 오전 에리카 김씨의 라디오 인터뷰에 대해 “역시 변죽 울리기, 가짜 약 팔기였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시로 이어지는 반박과 재반박. 최종 승부를 코앞에 둔 여야 정치권 처지에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생존게임이지만, 지켜보는 국민은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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