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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이랜드 사태 130일

비정규직 잡은 비정규직보호법

일부 기업들 법망 피하려 시행 전 대량해고 사태

  • 여정민 프레시안 기자 ddonggri@pressian.com

비정규직 잡은 비정규직보호법

비정규직 잡은 비정규직보호법
“우리가 언제 이런 법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까? 비정규직보호법 때문에 오히려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는데, 이상수 장관님은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하실 수 있나요?”(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김소연 분회장)

10월11일 비정규직보호법 시행 100일을 맞아 노·사·정 대토론회가 열린 서울 중구 서소문 올리브타워 20층.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가 주최한 이 토론회는 발제자 3명이 연단에 오르기도 전 무산됐다. 기륭전자, 코스콤, 이랜드그룹(뉴코아, 홈에버)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산발적인 항의와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날 토론회 취지는 “비정규직의 고용 개선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이들은 자신들의 고용문제 개선을 위한 토론회를 파행으로 만든 것일까.

이상수 노동부 장관의 격려사 도중 시작된 이들의 ‘고함’은 2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비정규직의 시위로 방에 갇혀 있다 경찰보호를 받으며 토론회장을 빠져나간 이 장관의 모습은 비정규직보호법을 둘러싼 갈등의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비정규직 업무 통째 아웃소싱 추진하기도



이랜드그룹이 경영하는 대형 유통업체 홈에버에서 계산원으로 일했던 호혜경 씨와 보라매서울대병원 영양실에서 일해온 김은희 씨, 우리은행 창구 텔러로 근무했던 김은미 씨(가명)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들은 모두 일하는 곳만 달랐을 뿐 여성 비정규직이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하지만 올 7월 이뤄진 정규직과의 차별시정과 2년 고용 후 정규직 전환을 골자로 한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전후로 이 세 사람 앞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호혜경 씨와 김은희 씨는 회사로부터 각각 4월과 7월 계약해지 통보를 받고 일터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김은미 씨는 분리직군제 도입을 통한 무기계약 근로자로 전환됐다. 임금은 여전히 정규직과 차이났고 승진 기회도 없지만 고용만큼은 안정된 것.

비정규직보호법 시행 당사자인 비정규직의 ‘운명’이 확연하게 엇갈리고 있다. 일부에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소식이 들렸으나, 기업이 법망을 피해가기 위해 비정규직을 계약해지하거나 업무를 외주화(아웃소싱)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이랜드 사태를 들여다보면 일부 기업의 행동 패턴을 읽을 수 있다. 뉴코아는 외주화를 선택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계산대에서 일해온 이 회사는 정규직을 다른 업무로 전환배치하고 계산 업무를 통째로 외부 업체에 맡기는 아웃소싱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근로계약 기간을 명시하지 않는 백지계약서가 등장해 노동부로부터 시정명령을 받기도 했다.

공공기관 · 공기업도 대량해고 마찬가지

홈에버는 기존 비정규직 근로자를 계약해지하고 새 사람으로 그 자리를 채워넣는 방식을 택했다. 홈에버 방학점에서 비정규직 계산원으로 4년째 일해온 김미희(45·가명) 씨는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느닷없이 계약서를 다시 쓴다느니 계약기간을 변경한다느니 하며 신경전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1월부터 5월까지 계약해지된 비정규직은 홈에버 사측에 따르면 모두 350명이다. 이 가운데는 까르푸(홈에버의 전신) 시절 체결돼 현재까지 유효한 단체협약에서 계약해지를 금지하고 있는 18개월 이상 근무자도 있었다.

대량해고가 이뤄진 것은 공공기관이나 공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코레일(옛 한국철도공사)은 지난해 말 비정규직 200여 명이 담당하던 새마을호 승무업무를 외주화했다. 송파구청도 비정규직 195명 가운데 35명을 법 시행 하루 전날인 6월30일자로 계약해지했다.

2000년부터 증권선물거래소의 전산업무 자회사인 코스콤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해온 정인열 씨는 “나는 협력업체 직원이었지만 도급이나 파견 같은 단어 자체를 몰랐다”고 했다. 같은 사무실에서 동고동락하던 동료들과 월급봉투 두께는 달랐지만 배우는 과정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그런 정씨는 현재 증권노조 코스콤비정규직지부의 부지부장으로 한 달 넘게 파업을 이끌고 있다.

이랜드그룹 비정규직도 마찬가지다. 홈에버 목동점에서 일해온 황명희 씨는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까 싶어 다녔던 직장일 뿐 ‘투쟁’이라는 단어는 들어보지도 못했다”며 “매일 집과 회사만 오가며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엄마들이 비정규직보호법이 뭔지나 알았겠느냐”고 반문했다.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계기로 그는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이렇듯 최근 벌어진 비정규직 노사분규는 대부분 우리 주변의 평범한 직장인, 아주머니들이 주인공이다. 비정규직보호법을 피해가려는 일부 기업들의 ‘선택’이 이들에게 머리띠를 묶게 한 것이다. 도급업체나 파견업체에 소속된 간접고용 근로자에 대한 차별시정 및 보호장치가 빠진 비정규직보호법의 허점을 일부 기업들이 악용한 결과다.

법 적용보다 앞선 정규직 전환

우리은행 필두로 신세계·보건의료 잇단 희소식


비정규직보호법의 취지를 살려 비정규직을 온전한 정규직으로 전환하거나 별도 직군을 만들어 정규직으로 끌어안는 사례가 기업별로 노사 합의를 통해 나오고 있다. ‘2년 고용 후 정규직 전환’이라는 규정은 법 시행 이후의 계약부터 적용되는 만큼 최초의 정규직 전환 의무는 2009년 7월 나오지만, 일부 기업이 앞당겨 정규직 전환 조치를 발표하고 있는 것.

첫 테이프는 우리은행이 끊었다.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기 전인 지난해 12월 우리은행 노사는 3076명의 비정규직을 무기계약 근로자로 전환하는 데 합의했고, 이들은 3월 고용안정을 보장받는 별도 직군으로 전환됐다. 산업은행 외환은행 부산은행 등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비정규직 전환이 이어졌다. 국민은행도 10월18일 8350명의 비정규직을 내년 1월부터 단계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신세계가 정규직 전환을 했고, 공공부문에서도 “정부가 먼저 모범을 보이겠다”며 내놓은 노동부의 공공부문 비정규 대책에 따라 울산시교육청 1622명 등 7만여 명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고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도 최근 직접고용 비정규직 278명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화했다.

보건의료 노사의 합의는 비정규직보호법이 가져온 ‘빛’이라고 할 수 있다. 보건의료 노사는 산업군 단위에서 노사 합의로 정규직 전환을 이끌어냈는데, 정규직의 올해 임금인상분 가운데 300억원을 내놓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및 처우 개선을 위해 쓰기로 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았다. 각 병원 지부별로 진행된 노사교섭을 통해 67개 병원에서 2384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고, 42개 병원의 비정규직 1541명은 임금 및 단체협약을 정규직과 동일하게 적용받게 됐다.




주간동아 609호 (p54~55)

여정민 프레시안 기자 ddonggr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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