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8

2007.10.30

RIGHT ON TIME 기계식 시계, 디지털 시대 뛰어넘다

정교한 톱니바퀴들의 진화 … 복고 바람 타고 명품 중의 명품으로 완벽한 부활

  • 김민경 THE WEEKEND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7-10-24 1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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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GHT ON TIME 기계식 시계, 디지털 시대 뛰어넘다

    시계의 원형을 보여주는 그랑 레귤레이터(Grand Regulateur). 올해 공개된 2007 그랑 레귤레이터에는 포켓 워치 무브먼트를 변형한 크로노스위스 칼리버C673무브먼트를 사용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자시계’를 차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것이 ‘쿼츠 무브먼트(배터리로 가는 시계)’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전자시계를 소비한다.

    초등학교 때 처음 선물로 받았던 ‘밥 주는 시계’가 매일 조금씩 늦어지는 데 반해 쿼츠는 알아서 정확하게 가는 데다 가격도 싸 잃어버리든 깨지든 크게 아쉽지 않다. 가게에서 아이들 사탕을 사도 시계를 끼워주고, 이런저런 홍보물 시계도 넘쳐나니 가히 공해를 이룰 정도다. 이처럼 시계의 존재감이 사라진 시기에 기계식 시계가 ‘기적처럼’ 돌아왔다.

    정확성에 염증 느끼고 태엽에 대한 향수?

    “난 일곱 살 때 시계 공방에 들어가 40대에 유명한 기계식 시계회사에서 크로노그래프(스톱워치) 전문가로 일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일본산 쿼츠시계가 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어느 날 사장이 내게 더는 기계식 시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졸지에 직장을 잃었지만, 기계식 시계 컬렉터들의 개인적인 주문이 이어졌다. 집을 은행에 저당잡혀 기계식 시계 브랜드를 세웠는데, 이제야 내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이른바 ‘쿼츠의 시대’에 초창기 원형시계에서 영감을 얻은 ‘레귤레이터(분침과 시침, 초침 다이얼이 분리된 시계)’를 내놓아 기계식 시계의 르네상스를 알린 독일 장인 게르트 랑의 말이다.



    일본의 쿼츠시계로 인해 ‘몰락한 귀족’처럼 보였던 기계식 시계는 ‘정확성’에 사람들이 염증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 도대체 정확하지 않은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1990년대 말부터 많은 이들의 로망으로 등극했다. 사람의 움직임에 의해 내부 회전추(로터)가 회전하며 태엽을 감아주는 자동식은 물론, 직접 태엽을 감는 수동식도 사랑의 대상이다.

    위성항법장치(GPS)가 거미줄처럼 지구를 뒤덮은 오늘날, 현대인에게 시계 따위의 ‘근대적 발명품’이 새삼 필요해진 것일까. 더구나 음력 표시 기능인 ‘루나’, 경주를 위한 크로노그래프, 수도사를 위해 소리가 울리게 했다는 리피터, 100년 넘는 시간이 담기는 퍼페추얼 캘린더, 중력의 영향을 상쇄하는 뚜르비용 같은 기계장치는 실생활에서 필요성을 느낄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기계들은 더 정교하고, 더 작아지고, 더 복잡해져야 하기에 이들 ‘컴플리케이션 워치’는 아주 한정적으로 만들어지며 가격은 수억원대에 이른다. 그럼에도 한없이 복잡해 보이는 기계시계에 매혹되는 이유는 정교한 톱니바퀴들이 우주의 불가해한 ‘신비’에 대항하는 인간 의지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RIGHT ON TIME 기계식 시계, 디지털 시대 뛰어넘다


    화려한 시계 역사는 무엇보다 바다를 향한 인간의 도전에서 시작한다. 식민지 개발이 본격화한 1700년대 바다에 많은 재산과 목숨을 내놓은 유럽 제국들은 배의 위치를 알기 위해 지구의 경도(經度)와 싸워야 했다. 당시에도 바다 위에서 두 지점의 시각을 알면 그 시간차를 지리적인 거리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위대한 시계 제작자’ 호이겐스가 발명했다는 진자시계는 폭풍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갈팡질팡했고 온도와 습기, 중력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1714년 영국 의회는 ‘경도법’을 제정하고, 경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거액의 상금을 약속한다. 즉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위해 어디서든 작동되는 시계 - 해상시계에서 손목시계까지 - 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규칙성이 만들어내는 신적 존재로서 시간의 기세에 눌린 사람들과 별의 운행을 통해 시간을 재려 한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은 ‘하찮은 시계공’들을 비웃으며 정확한 시계는 반드시 하늘에서 발견되리라고 믿었다.

    이 같은 경도와의 전쟁을 혼자서 해결해낸 사람이 영국 요크셔 촌마을의 시계공 존 해리슨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진자 대신 파도에도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스프링식 시소 장치를 구상해 단숨에 ‘휴대용 정밀시계’의 제작기술을 완성시켰다. 경도와의 싸움에서 인간이 승리한 것이다. 이후 시계의 크기를 줄이고 오차를 줄이고,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계공들의 노력이 오늘날 기계식 시계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럭셔리 브랜드들, 수공업 브랜드 합병

    천문학자들이 시간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밤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시계공들은 자신의 책상에서 돋보기로 작은 톱니바퀴들을 맞춰 시계를 만들어냈으니, 시계만큼 인간 이성의 승리를 보여준 근대적인 디자인도 없을 것이다.

    ‘경도’의 저자 데이바 소벨의 표현을 따르면, 기계식 시계는 ‘제4의 차원, 즉 시간을 이용해 3차원적 공간인 지구의 각 지점을 하나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세계 각지의 위치를 알아냄으로써 하늘의 별들을 쓸모없게 만들었고, 그 엄청난 비밀을 회중시계 속에 가둬’놓은 것이다.

    이런 특징은 기계식 시계가 현대의 어떤 럭셔리 상품보다 높은 가격으로 팔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웅변한다. 다국적 럭셔리 기업들이 서둘러 스위스와 독일, 영국의 기계시계 수공업 브랜드들을 합병한 이유다. 스와치가 블랑팽과 브레게를, 리치몬드가 A.랑헤·소네와 IWC를, LVMH가 제니스 등을 거느리는 식이다. 거센 바다의 폭풍을 이겨낸 기계식 시계는 이제 유행과 소비의 격랑에 놓였다.

    300년 전 천체에 맞선 시계 예찬론자들이 있었고, 30년 전에는 쿼츠에 맞서 크라운(용두)을 돌리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시계에서 현재의 나를 찾으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수백만원에서 수억원을 주고라도 소유하려는 것은 자신만의 ‘시간’을 정복하려는 욕망일 게다.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럭셔리 브랜드들은 과거로 돌아가 ‘원형적’ 시계들과 그 장인들의 의지에서 영감을 얻어온다.

    그 결과 바젤과 SIHH 같은 시계박람회에서 회중시계만한 오버사이즈 손목시계가 대세로 자리를 잡았고, 최초의 해상시계처럼 시침과 분침, 초침이 분리된 손목시계가 선풍적 인기를 얻는다. 또한 워치메이커들에 대한 오마주로서 아예 포켓워치 무브먼트를 손목시계에 사용하기도 한다.

    많은 시계 컬렉터들은 보는 즐거움이 큰 시계로 톱니들의 맞물림, 코일의 움직임, 마찰에 저항하는 보석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스켈리턴을 꼽는다. 갤리선의 돛 같기도 하고, SF 영화의 타임머신 같기도 한 기계들이 끝없는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움직이는 것을 들여다보노라면, 시계가 아니라 시간의 비밀을 엿보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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