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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푸념 속 차기 정권 줄 대기

신규 사업 추진 전면 중단, 예산·세법 처리도 잇달아 제동…이럴 땐 복지부동만이 살 길

  • 세종=손영일 동아일보 기자 scud2007@donga.com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푸념 속 차기 정권 줄 대기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푸념 속 차기 정권 줄 대기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 [세종=뉴스1]

11월 30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기재부) 4동 건물 앞 흡연실에 모인 기재부 관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날 박근혜 대통령의 조기퇴진 발언과 박 대통령의 비선(秘線) 실세 최순실 씨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지만 주된 관심사는 박 대통령의 퇴진 여부였다. 예년 같으면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 발표와 신년 업무 계획 준비가 한창일 때이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장기화하면서 적잖은 차질을 빚고 있다. 



무너진 정책 신뢰

국무총리, 부총리가 연이어 “최순실 게이트에 아랑곳하지 말고 맡은 일에 충실하라”고 당부했지만 어수선한 분위기는 감출 수 없다. 기재부를 비롯해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교육부, 미래창조과학부, 관세청 등 다수 부처가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관료사회는 급격히 얼어붙은 상태다.

최순실 게이트 초반 문체부에 집중되던 국정농단 의혹은 11월 중순을 기점으로 경제부처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정책결정자들이 사단법인 미르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시내면세점의 경우 그간 특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정부는 “특정 사업체를 밀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관광산업 진흥을 위한 조치”라며 강하게 부인해왔다. 하지만 최근 검찰이 면세점 특허 결정과 관련해 기재부와 관세청을 압수수색하면서 정부 측 해명보다 의혹에 더 힘이 실리는 모습이다.

지난해 롯데월드타워 면세점 특허권을 상실한 롯데그룹은 올해 초 K스포츠재단에 17억 원을 기부한 뒤 70억 원을 추가로 냈다 돌려받았다. 워커힐 면세점 특허권 재확보에 실패한 SK그룹 역시 계열사 SK하이닉스를 통해 사단법인 미르에 68억 원을 기부했다. 이후 두 그룹 총수가 박 대통령과 각각 독대했고, 그 과정에서 면세점에 대한 편의를 요청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실제 정부는 그 후 여론의 반대에도 면세점 추가 특허 계획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12월 발표하기로 한 시내면세점 추가 특허를 감사원 감사 후로 미뤄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한진해운 법정관리 역시 정부의 수차례 해명에도 의혹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모기업인 한진그룹이 사단법인 미르에 상대적으로 적은 10억 원을 출연해 미운털이 박혀 결국 법정관리까지 간 것 아니냐는 내용이 의혹의 핵심이다. 조양호 한진해운 회장이 “기사에 나온 것이 90%는 맞다”고 밝혀 논란에 불을 지른 형국이다.



정책·예산·세법에 튄 최순실 ‘불똥’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푸념 속 차기 정권 줄 대기
상황이 이렇지만 정부는 해명 자료를 내는 것 외 뾰족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 한 관계자는 “실무자는 위에서 시키는 것을 검토한 뒤 일을 추진하기 때문에 실제 고위급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국민이 좀처럼 정부의 해명을 믿지 못하면서 경제현장의 혼란은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선 정책결정 과정에서 정부의 지나친 비밀주의와 일방적 의사구조가 자초한 결과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 간 합병 무산이 대표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합병 심사를 7개월 이상 끌다 시장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불허 결정을 내렸다. 이후 설명도 매끄럽지 못한 탓에 최순실 개입 의혹이 제기되는 등 아직까지 뒷말이 무성하다(표 참조).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의혹을 밝히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고, 그다음으로 정책 거버넌스(의사결정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며 “거버넌스가 불분명한 상태에선 정책에 대한 신뢰도 생기기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책에 대한 대국민 신뢰가 무너지면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동력은 상실된 지 오래다. 정부는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기존 일을 잘 마무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그나마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활성화법 상당수가 줄줄이 국회에서 제동이 걸려 박근혜 정부 임기 내 처리가 불가능해졌다.

‘지역전략산업육성을 위한 규제프리존의 지정과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규제프리존특별법)의 경우 여야 이견이 없어 19대 국회 말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다른 법안 처리와 연계되면서 20대 국회로 미뤄졌다. 올해도 법안 통과가 사실상 무산된 상태다. 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나서 법안 통과를 호소하고 있지만 법안 처리가 후순위로 밀렸다. 박근혜 정부가 정권 역점 법안으로 추진하던 ‘노동개혁 5대 법안’과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도 물 건너갔다. 단기간 내 성과가 나지 않는 사업의 경우 야당에서 대놓고 “그건 다음 정부에서 할 일”이라며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년에도 2%대 성장이 예상되는 등 한국 경제의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지만 주무부처인 기재부는 경제컨트롤타워를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11월 초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차기 경제부총리로 내정됐지만 탄핵정국이 펼쳐지면서 청문회 준비가 중단된 상태다. 결국 ‘떠나는’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다시 각종 현안을 챙기고 나섰다. 어정쩡한 동거가 장기화하면서 현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총리와 구분해 경제부총리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의견이 나오지만 여야 셈법이 엇갈리면서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을 앞당겨 발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정작 실무부처에선 그 안에 담을 내용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벌써부터 기존 정책을 표현만 바꿔 재탕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여야 정치권은 문화·체육·한류사업과 창조경제사업 등을 ‘최순실표 예산’으로 명명해 대거 삭감키로 뜻을 모았다. 이들 사업은 어느 정도 예산 삭감이 예상됐지만, 실업급여 등 고용 관련 예산도 대폭 삭감돼 논란이 일고 있다. 여기에 더해 세법도 최순실 꼬리표가 붙었다는 이유로 대거 폐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확한 검증 없이 단지 체육·문화 관련 법안이란 이유만으로 최순실 씨나 그 측근 인사와 연계됐다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장애인 운동경기부를 만든 기업에게 세제 혜택을 주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장애인 운동경기부 운영비의 법인세 세액공제율을 20%에서 30%로 상향 조정하고, 세액공제 기간을 운동경기부 설치 후 5년에서 7년으로 늘리는 것이 법안의 핵심이다. 장애인 체육활동을 지원한다는 명분이 충분해 조세소위원회(조세소위) 전까지만 해도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일부 야당 의원이 스포츠 관련 법안이란 이유로 “최순실법으로 오해받을 여지가 있다”고 난색을 표하면서 결국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에서 계류 결정이 났다.



바닥에 떨어진 공무원 사기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푸념 속 차기 정권 줄 대기

황교안 국무총리가 11월 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왼쪽)[세종=뉴스1] . 강요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조원동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이 11월 23일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된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며 침통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동아일보]

영상콘텐츠 제작비에 대한 세액공제 신설 법안은 “차은택법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으며 통과가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영화·드라마 등 영상콘텐츠 국내 제작비와 관련해 중소기업은 10%, 중견·대기업은 7% 법인세 세액공제를 해주는 것으로 차씨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기 어렵다.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해 신성장동력·원천기술 연구개발(R&D) 세액공제의 대상과 공제율을 확대하는 세법개정안 역시 곤욕을 치렀다. 일부 야당 의원이 “삼성그룹이 최순실 씨에게 자금을 제공한 대가로 ‘신성장산업 연구개발 세액공제’ 혜택을 받게 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려는 방안으로 연초부터 강력히 추진해오던 법안이지만, 최순실 게이트로 정책의 순수성을 의심받게 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순실 게이트로 관료사회도 큰 충격을 받았다. 후배들에게 존경받던 엘리트 관료가 잇달아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내가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라는 자괴감을 호소하는 이가 부쩍 늘었다.  

상당수 관료가 자신들이 힘들게 작성한 보고서를 최씨가 받아봤다는 사실에 충격과 분노를 표출했다. 경제부처 한 국장급 인사는 “청와대가 그렇게 보안을 강조하고 공직사회에 솔선수범을 요구해왔는데 정작 대통령은 비선을 통해 공식문건을 대거 유출했다”며 “과연 공직사회에 영(令)이 설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사회부처 한 과장급 인사는 “이 정부 들어 공공개혁을 얼마나 강조했느냐. 청와대, 대통령의 자기 부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조원동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최상목 기재부 제1차관 등 존경받던 정통 관료들이 이번 사태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공직사회 후배들이 느끼는 허탈감은 심각한 수준이다. 총리실의 한 국장급 인사는 “조 전 수석은 나의 공무원 롤모델이었다”며 상실감을 드러냈다.

“조 전 수석이 과장급으로 있거나 대통령비서실에서 근무할 때 작성한 보고서는 지금 봐도 일품입니다. 요즘 동기끼리 ‘너라면 과연 청와대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겠느냐’고 묻곤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조 전 수석이라면 단호히 거절했어야 하는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일각에선 “이럴 때일수록 공무원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경제부처 한 사무관은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단하는데도 대한민국이 이만큼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은 관료사회가 흔들리지 않고 뒷받침했기 때문”이라며 “오로지 국민만 보고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서기관은 “충격을 받았지만 우리가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위기 상황일수록 관료사회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차기 정권 줄 대기 심화

탄핵소추안 처리와 헌법재판소 결정, 그리고 차기 대통령선거까지 당분간 국정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대내외 악재가 겹치면서 한국 경제위기론은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관료사회마저 무너지면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미증유의 국가위기를 또다시 맞이할 개연성이 크다.

현재 각 부처 장관은 내부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황교안 총리는 최근 각종 정부부처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정부와 국무위원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본연의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내부적으로는 설령 탄핵소추안이 결정되더라도 대통령 권한대행체제를 중심으로 예정된 사안들을 차질 없이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총리실은 조심스레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사례를 참고해 권한대행체제에서 ‘꼭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이 황 총리에 대한 거부감이 큰 상황에서 얼마만큼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야당 일각에선 황 총리 탄핵까지 거론하고 있다. 설령 탄핵하지 않더라도 최소 기본 임무만 맡게 하는 등 권한대행 기능을 대폭 축소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정책조정 기능과 공직사회 감시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면서 공직사회의 복지부동과 차기 정권 줄 대기가 심화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실제 박근혜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개인비리에 연루돼 경질됐지만, 최근 언론과 야당 쪽에 “정권의 정책에 반대해 미움을 샀다”는 식으로 해명해 후배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민주당 측 한 인사는 “최순실 게이트와 직접 연루된 몇몇 부처에서 국·과장급 인사들이 자료를 잔뜩 들고 와 제보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2017년 첫 400조 원대 편성◆ 지역예산 따내기 경쟁에 민생예산은 뒷전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푸념 속 차기 정권 줄 대기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태년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오른쪽)가 11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안 등 조정소위원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최순실 게이트’로 개점휴업이던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11월 7일부터 예산안조정소위원회를 열고 뒤늦게 가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예산안 심의가 예년처럼 여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서 ‘그들만의 논리’에 따라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사상 첫 400조 원대 예산이 편성되면서 심의해야 할 사업이 많아졌지만, 주어진 시간이 짧다 보니 벼락치기 심의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예산안 심의와 함께 탄핵, 특검, 국정조사 등 정치 일정이 동시에 진행돼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결과 감액 규모는 예년에 비해 줄었고, 증액 요구는 크게 증가했다.

기획재정부와 국회에 따르면 한류사업·창조경제 등 최순실 관련 예산 4000억 원을 포함해 2조5000억 원가량이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감액됐다. 이는 전체 예산안의 0.6% 정도로, 매년 1%(3조~4조 원) 남짓 감액하던 것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그만큼 국회가 정부 예산을 꼼꼼히 들여다보던 범위가 줄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국회가 증액을 요청한 사업 규모는 40조 원에 이른다. 이는 최근 몇 년간 증액 요구액의 2배에 달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지방의 도로·철도 등 지역 민원사업이 주로 증액 대상에 포함됐다”며 “예산을 많이 배정받은 의원은 더 가져가려 하고, 그렇지 못한 의원은 한 푼이라도 더 늘리려고 하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회가 선심성 지역예산 따내기에 열을 올리면서 정작 민생예산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장애인·기초생활수급자 등의 취업을 돕는 예산과 청년취업진로 사업 등 민생예산이 상당수 포함된 고용예산이 6400억 원가량 삭감된 것이다. 특히 야당이 노동 관련 법안 통과를 일체 막으면서 법률 통과를 전제로 편성한 예산이 모조리 삭감됐다.

예산을 둘러싼 구태도 여전했다. 정부가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을 계기로 ‘쪽지예산을 없애겠다’고 밝혔지만 이를 비웃듯 국회는 여전히 밀실에서 증액 사업을 정하고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예산안조정소위원회 안에 여야 3당 간사로 구성된 증액소소(小小)위원회를 만들어 비공개로 증액 사업을 선택한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국회가 탄핵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예산안을 꼼꼼히 들여다보기보다 자신의 지역구 예산 챙기기에만 골몰하는 모습”이라고 비판했다.







주간동아 2016.12.07 1066호 (p20~23)

세종=손영일 동아일보 기자 scud2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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