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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가다④

유물 가득하던 고창고성엔 수탈 흔적뿐

100여 년 전 서양탐험대 싹쓸이 … 투루판엔 승려 현장이 설법하던 사원 그대로 남아

유물 가득하던 고창고성엔 수탈 흔적뿐

유물 가득하던 고창고성엔 수탈 흔적뿐

계곡 옆 절벽에 굴을 파 만든 베제클릭 천불동.

기차가 투루판(吐魯蕃) 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동도 트지 않아 캄캄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내릴 때를 놓쳐서 다음 역까지 가기 십상이라고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서둘렀다. 투루판 겨울 날씨는 생각보다 매서웠다.

둔황이 서역의 관문이라면 투루판은 진정한 서역이다. 행정구역으로도 간쑤성(甘肅省)에서 이제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로 들어선 것이다. 역 앞에 준비된 버스를 타고 식당을 찾았다. 투루판은 총면적의 80%인 4만km2가 해수면보다 낮다. 가장 낮은 곳은 한가운데에 있는 아이딩호는 수면이 해발 -154m다. 어둠 속에서 버스가 계속 내리막길을 달리는데, 마치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식당 입구에 들어서자 서역의 향취가 짙게 풍겼다.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벽에는 낙타를 탄 대상과 민속춤을 추는 무희의 모습을 태피스트리로 짜서 걸어두었다. 둔황에서 밤새도록 서쪽으로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아침식사를 식당에서 하는 것인지,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인지 식당에는 손님이 많았다. 널찍한 식당 여기저기에서 신기해하는 눈빛이 우리에게 집중됐다.

본격적인 서역 행보 시작 … 투루판 면적의 80% 해수면보다 낮아

투루판 사람들은 둔황 사람보다 코가 높고 눈이 움푹 들어갔다. 노인들 얼굴의 주름조차 이 지역 고유의 애환이 서린 듯 우리네 노인들과 달라 보였다. 정방형의 이슬람식 모자를 쓰고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는 두 할아버지의 모습이 이국적이다.



여기저기로 한눈파는 사이 가이드(황미선)가 일정을 설명해주었다.

“오전에는 고창고성과 아스타나 고분을 둘러보고 점심식사 후에는 교하고성이랑 카레즈를 볼 예정입니다.”

유물 가득하던 고창고성엔 수탈 흔적뿐

나뭇잎 모양의 강섬 위에 만들어진 교하고성.

황미선 씨는 우루무치에 사는 조선족 여성이다. 그의 말투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다. 버스를 다시 타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실크로드 여행은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보다 길을 밟아가는 데 의미가 있다. 그 길은 장건, 법현, 현장, 신라의 혜초가 지난 길이고 무수한 대상들이 왕래한 길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누구가 과거에 지나간 길’이야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유독 실크로드를 지나간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는 건 무엇 때문일까. 험난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하고 미지의 세계와 소통하는 통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길이지 그 시절에야 지금처럼 포장도로는커녕 제대로 된 이정표조차 없었을 터.

요즘 유행하는 오지탐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실크로드는 그렇게 오지였고, 그래서 또 의문은 꼬리를 문다. ‘도대체 그 위험한 곳을 왜 그렇게 열심히 다녔을까.’

유물 가득하던 고창고성엔 수탈 흔적뿐

독일 탐사대 르콕 일행이 머물던 투루판 지역의 산악지대(왼쪽 사진). 투루판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주민들.

장건은 기원전 139년에 한 무제의 명을 받고 서쪽으로 떠났다. 흉노를 치기 위해 월지와 동맹을 맺으려는 무제의 계획에 궁정 관리였던 장건이 자원해 나섰다. 하지만 가는 길에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흉노는 적절히 예우했고, 장건은 결혼해서 자식까지 두었으나 축제날을 틈타 도망해 월지에 도착했다. 월지는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 흉노 정벌에 관심이 없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던 장건은 다시 흉노에게 체포됐다. 하지만 두 번째는 아내까지 데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장건은 그 후 두 차례나 더 서역을 다녀왔다. 실크로드 이야기는 바로 장건에서 시작한다. 그의 보고로 서역 문물이 알려졌고, 그의 발자취로 비단길이 열렸다. 무제는 그를 위대한 여행가라고 불렀다.

그나마 장건은 조금 이해가 된다. 법현이나 현장, 혜초는 장건처럼 군사적인 목적에서 길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2세기 이후 인도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 불교를 전파하는 승려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고, 중국의 구법승들은 불교 경전을 수집하고 성지를 순례하려고 이 길을 통해 인도로 갔다. 붓다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겠다고 그 험한 길을 나선 모습은 요즘으로 치면 돛단배로 태평양을 건너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격이 아닌가. 실크로드는 노정이 험난한 만큼 그 길을 지난 사람들의 강한 정신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중개무역 융성했던 오아시스 도시들 툭하면 침략당해

그런데 ‘길’을 여행한다는 생각에서 내가 간과한 것은 그 중간 중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아시스 도시들은 실크로드라는 길이 뚫리기 전부터 그곳에 존재했었다. 그들은 실크로드의 교역에 힘입어 발전했다. 대상들에게 쉴 장소를 제공하고, 중개무역을 하면서 성장하고 소국가를 형성했다. 하지만 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하려는 흉노를 비롯한 유목민족과 중국의 침입도 자주 받았다.

산맥의 만년설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마르거나 전쟁에서 패배하면 사람은 떠나고 도시는 모래에 파묻혔다. 그래서 실크로드 주위에는 옛 국가들의 흔적이 유적지라는 이름을 내걸고 과거의 영광을 대변한다.

우리 여행단보다 약 100년 앞서서 이곳을 찾은 건 서양의 탐사단들이었다. 그들은 보물찾기를 하듯 경쟁적으로 타클라마칸사막에서 유물을 발굴해 갔다. 투루판은 실크로드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들려주는 곳이었다.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로, 이곳에서는 7000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수렵과 채집생활을 했다. 토착민인 차사인은 중국 전한 시대(기원전 221~기원후 25)부터 차사전국을 세우고 그 도읍을 교하고성으로 정했다. 그 후 흉노족 출신이 고창고성을 수도로 고창국을 세워 투루판 분지를 정치적으로 통일했다.

6세기 초에는 국씨를 중심으로 한족 출신 왕들이 다스리는 국씨 고창국이 들어서서 640년 당에 멸망할 때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 9세기 중엽에는 북쪽 초원에서 옮겨온 위구르의 영토가 되었고, 13세기 초에 이르러 몽골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이런 역사 속에서 투루판은 현장이 들러서 설법을 한 사원과 폐허가 된 도시, 독일 탐사대 르콕 일행이 남긴 칼자국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창고성은 투루판 시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져서 화염산의 발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입구에 서니 흙으로 지었다가 황폐화된 도시의 흔적이 눈앞에 넓게 펼쳐졌다. 당나귀가 끄는 관광객용 마차는 빛바랜 차양을 뒷좌석 위에 붙이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지의 규모와 구도는 당나라 때 완성된 것이고, 도시 안의 유적 대부분은 위구르 고창국이 남긴 것이다. 르콕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고대 도시의 곳곳을 갈아 경작지로 쓰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다른 곳에는 남아 있지 않은 마니교의 유물을 발견하는 등 개가를 올렸다. 필사본, 벽화, 천에 그린 걸개그림, 각종 직물 따위의 아름답고 찬란한 유물도 대거 발굴했다.

도시는 생각보다 넓어 마차로도 한참을 달려 사원 터에 도착했다. 현장이 불교 경전을 구하러 인도로 가다가 들러서 국왕의 간청으로 한 달간 설법을 한 곳이다. 당시 국왕은 현장 앞에 엎드려 자신을 밟고 단에 올라가 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불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베제클릭 천불동 역시 고창고성에 이어서 르콕 일행에게 약탈을 당한 곳이다. 계곡 옆의 절벽에 굴을 파서 쉽게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들었는데도 용케 찾아냈다. 르콕이 들어갔을 때 갑자기 모래가 쏟아지며 벽화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관광객들에게 공개되는 굴마다 들어가 보았지만 남은 벽화는 거의 없었다. 둔황의 석굴 사원들은 여전히 지역민들에게 성스러운 장소였으므로 벽화를 함부로 떼내지 못했지만 유물 도둑들이 이곳 벽화를 모조리 가져간 것이다. 도둑들은 벽화의 외곽 둘레에 깊은 칼자국을 낸 뒤 뒤로 톱을 집어넣어서 벽에서 떼어냈다. 벽화가 떼 내어진 자리에는 베를린인도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유물 사진이 걸려 있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처량하고 민망했다. 조금 남은 벽화들마저 중국 문화혁명 때 진흙 칠을 해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진흙을 물로 지우다가 완전히 훼손시킨 것도 있었다. 천불동이 위치한 계곡은 물이 흐르고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그러나 동굴이 심하게 훼손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동굴 앞의 난간 밑으로 르콕이 머물던 폐허가 된 집만이 눈에 들어왔다.

투루판 시 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은 나뭇잎 모양의 강섬 위에 만들어진 도시다. 서울의 여의도처럼 흐르는 물이 교하 고성에 이르러서는 양쪽으로 비껴 지나 다시 합쳐진다. 이 도시는 흙벽돌을 쌓아 올리지 않고 개미굴처럼 바닥을 파 내려가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벽만 남기고 흙을 파낸 뒤 지붕을 얹었다는 이야기다. 자세히 보니 정말로 벽에 지층 모양의 무늬가 그대로 보였다. 교하고성의 건물 지붕과 강 바깥 땅의 높이를 비교해 봐도 똑같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 바라보니 눈 쌓인 톈산산맥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교하고성은 고창고성보다 훨씬 옛 모양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데도 과거에 도시였다는 실감이 안 났다. 5100km2에 이르는 큰 절인 대불사(大佛寺) 입구에 들어섰다. 그제야 사람들이 살았던 기운이 다가온다. 건물 뒤에서 누구라도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옛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행복과 번영을 열심히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흙이 되어 우리들 발밑에 흩어지고, 그들의 도시는 폐허가 돼도 우리는 다시 사원을 짓고 열심히 머리를 숙인다.

지하 수로의 구조를 보여주는 카레즈박물관을 들른 뒤 기차역으로 갔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대기실의 플라스틱 의자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일부는 바닥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은 기차다. 너나 할 것 없이 옷소매가 까맣게 때에 절었다. 어른들은 대부분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감거나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날이 지난 지 거의 20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휴가를 마치고 직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과 우리의 실크로드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기차에 오르니 이틀째라 적응이 돼 내 집처럼 편안했다. 피곤이 몰려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주간동아 2006.05.16 535호 (p64~66)

  • 글·문건영 변호사 사진·서해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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