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6

2005.12.27

‘삶은 苦海’ 가장 위대한 진리

  •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입력2005-12-26 09: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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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반드시 몸이나 마음의 고뇌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자기 뜻’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의미로 ‘무언가에 의해 구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즐거움이나 기쁨이 고통의 반대라 생각하지만 엄밀히 따져보자. 과연 그럴까? 즐거움이나 기쁨은 순간적이다.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행복, 영원히 변하지 않는 즐거움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불교에서는 지금 누리고 있는 즐거움이나 기쁨조차도 진정한 것이 아니다.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상을 흔히 ‘무상하다’ 해서 ‘헛되다’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무상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의미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믿은 착각, 원래 없던 것을 있다고 믿었던 오해가 고통을 불러일으키며, 이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기 경전인 ‘우다나’ 같은 불전에서는 “무엇인가에 의해 압도되는 것은 모두 고통이며, 자유로운 것은 모두 즐거움”이라고 고(苦)와 낙(樂)을 정의했다. ‘자유’를 기준으로 ‘고’와 ‘낙’을 정의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불교는 한마디로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종교다. 허무나 염세가 아니라 삶에 대한 실체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영적 성장에 심리학을 적용했으며 ‘아직도 가야 할 길’(열음사)이라는 저서로 국내에도 유명한 스캇 펙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삶이 고해라는 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고통은 가르침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하며, 더 나아가 문제가 주는 고통까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문제가 가장 특별하다고 믿으며 왜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자신과 가족,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만 고통스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지 불평한다. 아들을 잃은 소설가 박완서 씨나 암 투병 중인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도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왜 굳이 나만 (고통받는 대상에서)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을까”라 물으면서 비로소 고통 앞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카를 융은 “노이로제(신경증)란 늘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라고 했다. 회피는 게으름이고 훈련 부족이다. 몸의 군살을 빼려면 운동이 필요하듯 정신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고통으로 내모는 온갖 환상과 기만과 고정관념이라는 기름기를 빼려면 정신의 훈련과 운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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