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2

2005.11.29

세상 부귀 등지고 불사이군 절개 지켜

치악산에 들어가 한평생 출사 거부 제자였던 태종 이방원이 직접 찾아오기도

  • 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입력2005-11-28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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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부귀 등지고 불사이군 절개 지켜

    이방원이 스승 원천석을 기다렸다는 태종대.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고려 말에 살았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시조 회고가(懷古歌)다. 그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 치악산으로 숨어든 뒤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런 운곡을 산 밖으로 모시기 위해 태종 이방원이 직접 치악산을 찾아갔다. 이방원은 어린 시절 치악산 동쪽 각림사(覺林寺)에서 운곡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강림우체국이 차지하고 앉은 각림사 터를 지나 치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노고소(老姑沼)가 나온다. 이 부근에서 이방원은 한 노파를 만나 운곡의 행방을 물었다. 치악산 동쪽에는 부곡·고든치골·가래골·횡지암골 등 여러 계곡이 있는데, 노파는 운곡이 머물고 있는 곳이 가래골 삿갓바위(弁岩) 방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엉뚱한 곳을 알려주었다.

    치악산에 태종과 관련한 이름 많이 남아

    태종은 노고소에서 상류로 500m쯤 올라간 곳에 있는 바위에서 스승을 기다리다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 뒤로 태종이 기다리던 바위는 ‘태종대’라 부르게 되었고, 바위 위에는 임금이 머물다 간 곳이라 하여 ‘주필대(駐臺)’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또한 태종이 말 타고 온 길은 ‘마치재’, 수레를 타고 온 길은 ‘수레너머’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세상 부귀 등지고 불사이군 절개 지켜

    태종대 위에 세워진 비석, 주필대.

    한편 임금을 속인 노파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소(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는데, 그곳이 바로 늙은 할미 못인 노고소다. 그리고 노파가 잘못 알려준 계곡은 횡지암(橫指岩)이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운곡은 치악산을 마당 삼아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가래골 삿갓바위 남쪽 봉우리 아래에 누졸재(陋拙齋)라는 초가를 짓고 머물기도 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해마다 봄가을로 산 정상(비로봉)에 단(壇)을 쌓고 고려 왕들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치악산 서쪽의 원주시 행구동 석경마을엔 그의 무덤이 있다. ‘돌갱이’라고 부르는 석경마을은 돌이 많은 산길이라는 뜻이다. 마을 안쪽의 석경사(石逕寺)에는 운곡을 기리는 재실 ‘모운재(慕耘齋)’와 비석,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앞서 인용한 회고가와, 석경마을을 배경으로 한 시조가 적혀 있다.

    청려장(靑藜杖) 드더지어 석경(石逕)을 돌아드니양삼선장(兩三仙庄)이 구름에 잠겼세라.오늘은 진연(塵煙)을 다 떨치고 적송자(赤松子)를 좇으리라.

    세상 부귀 등지고 불사이군 절개 지켜

    원천석이 머문 곳을 태종에게 거짓으로 알려준 노인이 빠져 죽은 노고소(왼쪽). 벌의 허리처럼 잘록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원천석의 묘.

    청려장은 명아주 지팡이고, 양삼선장은 두세 명의 신선이 산다는 집이며, 적송자는 소나무다. 석경은 그냥 돌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돌갱이 마을로 보면 훨씬 구체적이 된다.

    석경사 아래쪽에는 원천석의 묘가 있다. 무학대사가 묘 터를 잡아주었다는데, 요즘도 풍수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소문난 명당이다. 벌허리 명당(蜂腰穴)으로, 벌처럼 자손이 많이 생기는 터다. 묏자리는 마치 말안장을 얹고 올라앉은 것처럼 오목하게 들어갔고, 양옆으로 경사가 심한 땅이다. 길게 뻗어나간 묏자리 끝에 허름한 무덤 하나가 눈에 띈다. 땅의 기운을 받기 위해 몰래 써놓은 무덤처럼 보이지만 원천석의 부인 묘라고 한다.

    묘는 개성을 향하고 있고, 잘 자란 적송자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묘 앞은 두 사람 정도가 간신히 앉을 만큼 옹색하지만 묘한 기운이 감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작은 타협도 하지 않으려는 결기가 느껴진다.

    운곡은 은거하면서 야사(野史) 6권을 저술했는데, 임종을 앞두고 “성인(聖人)이 아닌 자는 열어보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돌함에 보관돼오던 그 문서를 증손자대에서 열어보고는 ‘가문이 멸족당할까’ 싶어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세상 부귀 등지고 불사이군 절개 지켜

    석경사에 있는 원천석의 시비.

    퇴계도 극찬한 한시 1144수 남겨

    운곡은 정몽주나 이색처럼 정치적으로 화려한 이력을 남긴 것도, 길재처럼 사림의 종주로 추앙받을 만큼 똑똑한 제자를 남기지도 못했다.

    무덤 앞의 ‘고려국자진사원천석지묘(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墓)’라는 묘비명에서 보듯 그의 벼슬은 ‘진사’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원천석이 치악산만큼이나 우뚝한 존재가 된 것은 그의 지조와 그의 시(詩)에서 파생된 힘 때문이다.

    그는 한시 1144수를 남겼는데, 퇴계는 “이 시가 곧 역사다”라고 평했다. 퇴계의 평가에 힘입어, 퇴계의 제자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운곡의 봉분을 새로 하고, 한강의 제자 미수(眉) 허목(許穆)은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1670년에 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근자에 와서는 국가에서 묘소 옆에 사당을 지어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은 원천석의 체취로 가득한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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