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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혈액제제 뭐가 안전하냐”

美 피츠버그大 이형기 교수 … “제조·품질관리 시스템 허술, 안전 보장 못해”

“한국 혈액제제 뭐가 안전하냐”

“한국 혈액제제 뭐가 안전하냐”

식약청은 에이즈 감염 혈액이라도 ‘불활화 공정’을 거치면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에이즈 또는 법정전염병 감염 혈액으로 만든 의약품의 시중 유통과 관련,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불활화(不活化) 공정’을 거치더라도 의약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돼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불활화 공정을 거쳤기 때문에 안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과 제약사의 해명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으로, 향후 적지 않은 파문이 예상된다.

식약청은 9월5일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의 혈액을 원료로 한 주사제 의약품(알부민, 글로불린, 혈우병치료제 등 혈액제제) 2만6000병이 시중에 유통됐다는 ‘주간동아’의 보도에 대해 “바이러스 제거 과정인 불활화 공정을 거쳤기 때문에 혈액제제를 통한 에이즈 감염은 있을 수 없고, 혈액 검사와 관리, 회수 등 모든 시스템이 미국·유럽 등 의료선진국과 같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라는 취지의 해명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또 식약청은 에이즈 감염 혈액이 들어간 사실을 통보받고도 보관 중인 제품을 판매한 제약사의 행위에 대해서도 ‘제조공정에 투입하지 않은 원료에 대해서만 폐기 조치를 내리고 창고에 보관 중인 제품은 그대로 판매하도록’ 규정한 국내 ‘룩백 시스템(Look Back·바이러스에 오염된 혈액 또는 혈액제제 원료 혈장의 격리, 폐기, 회수 등에 관한 규정)’이 선진국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적법한 행위라고 항변했다.

식약청·제약사 해명 정면 반박

이렇듯 보건복지부와 식약청 등 보건당국이 ‘면피성’ 해명으로 일관하자, 미국 피츠버그 의대 이형기(의학·이학박사) 교수는 최근의 혈액안전 사고와 관련한 분석 자료를 내고 사고 수습 과정에서 식약청이 취한 조치와 국내 혈액안전 시스템 전반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객원연구원을 역임한 이 교수는 “‘불활화 공정을 거치면 안전하다’는 국내 혈액제제 생산업체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혈액제제에 대한 ‘우수의약품생산관리기준’ 또는 ‘제조·품질관리기준(GMP)’이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식약청이 그동안 정기적·부정기적 실사를 통해 실제로 GMP가 해당 생산업체에서 엄격히 준수되고 있는지 확인했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밝혔다. 즉 혈액제제를 만드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혈액과 혈액성분의 분리, 보관, 유통, 불활화 등 각 공정에 대해 정부 차원의 확실한 기준이 세워져야 하고 이에 대한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국 혈액제제 뭐가 안전하냐”

식약청의 주장과는 달리 ‘불활화 공정’ 만으로는 의약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 미국 피츠버그 의대 이형기 교수의 분석 보고서.

이와 관련, 1998년 미 하원의 요청에 따라 미 연방정부 감사원이 제출한 보고서에는 심지어, “지금까지 수많은 발전이 이루어졌음에도 혈장 완제품(혈액제제)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된 제 공정이 GMP를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바이러스 제거 및 불활화 공정과 관련된 GMP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혈장 제품의 안전성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1999년 이래 국제규제기관회의를 통해 채혈(헌혈)과 혈액제제 생산과 관련된 GMP의 제도화를 강력히 요구해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식약청은 미 FDA처럼 GMP 규정을 준수하고, 제약사에 대한 정확한 실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식약청은 혈액제제와 관련해서는 GMP 규정과 제도 자체를 만들지도 않았다. 단지 혈액제제를 포함한 생물학적 제제에 대한 일반적인 GMP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GMP 규정마저도 구체적인 기준과 평가지침 등이 없어 무용지물 상태다. 올 1월이 돼서야 입안 예고됐으나, GMP 공정 전반에 대한 검증은 의무화되어 있지 않은 상황. 이 박사는 “이는 FDA가 혈액 및 혈액성분의 GMP 규정을 따로 명시한 것과 대조된다”며 “식약청이 담당하고 있는 혈액제제의 안전성 관리 기반이 제도적으로 매우 허약함을 단적으로 보여준 증거”라고 밝혔다.

미국 FDA는 1990년대 이후 혈액을 취급하는 모든 산업체에 대한 현장 실사를 강화, 2년에 한 번은 사전 통보 없이 정기적인 실사를 펼친다. 그러나 우리 식약청은 혈액제제 자체가 아닌 생물학적 제제 GMP 규정의 준수 여부에 대한 실사조차도 제약사에 미리 통보한 후 하고 있다. 그나마 가장 마지막에 한 것이 2001년이니 지난 4년간은 전무한 실정이다.

이 박사는 “국내 현실이 이런데도 식약청이 ‘불활화를 하면 제품의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강변한 것은 GMP의 중요성을 모르는 소치이거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얄팍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식약청이 FDA와 표면상으로 동일하거나 유사한 규정에 따라 조치를 취했으므로 혈액제제의 안전성이 확보된다고 주장한 것은, 공식을 알면 누구나 복잡한 수학문제의 정답을 맞힐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매우 위험천만한 발상”이라고 질타했다.

그뿐만 아니다. ‘혈액안전 시스템이 선진국과 동일하다’는 식약청의 주장도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세계적인 혈액제제 생산회사인 박스터와 사노피-아벤티스 측에 혈장 원료의 생산 공정을 확인한 결과, 대한적십자사나 국내 제약업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혈액 원료에 대한 검사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대한적십자사는 헌혈 혈액에서 분리한 약 1250명 분량의 혈장을 대형 풀(pool)에 함께 섞은 반제품 상태를 혈장제제로 제약사로 보낸다. 제약사는 적십자사로부터 받은 혈액제제 반제품을 희석해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공정을 거친 다음 완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적십자사가 하는 바이러스 검사는 대형 풀에 섞인 생산물을 대상으로 한 단 1회뿐인데, 그것도 검사 결과의 신뢰성에 논란이 많은 효소면역검사(EIA)만 했을 뿐이다.

검사법 자체도 문제지만 1000명분 이상 분량의 혈액이 섞이면 사실상 어떤 검사법으로도 바이러스를 검출해내기가 어렵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해외 두 제약사는 최종 생산공정에 투입하기 전 500명분 미만의 혈장 원료를 섞는 미니풀에서 최고의 안전도를 자랑하는 PCR검사(DNA의 원하는 부분을 증폭해서 검사하는 방법으로, 핵산증폭검사인 NAT도 그 일종)를 하고, 최종 생산공정이 끝난 뒤에도 또 한 번의 PCR 검사를 한다. 2중의 안전장치가 채워져 있는 셈. 반면 국내 제약사는 미니풀 검사 없이 1000명분 이상의 생산풀에서만 PCR 검사를 실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국적 제약사는 바이러스 잠복기 동안 일어날 수 있는 검사 잘못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혈액에서 분리한 원료 혈장을 헌혈 받은 날로부터 60일 동안 보관했다 생산공정에 투입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는 이렇게 하라는 규정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적십자사는 2004년과 2005년 초까지 원료 혈장을 30일간만 보관하고 이를 그대로 생산공정에 투입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에이즈 감염자 김모(23) 씨의 혈액도 채혈일로부터 50일 만에 출고가 된 경우다. 60일 보관 규정만 준수됐어도 이 혈액의 출고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미 제약사에 공급된 혈액이 바이러스에 오염된 사실이 추후에 밝혀질 경우 미국에서는 검사기관이 직접 제조사에 통보해 원료 투입을 중지하는 룩백 시스템을 갖고 있으나, 우리는 검사기관인 적십자사가 식약청에 보고하고 이를 식약청이 검토한 후 다시 제조사에 통보하는 불필요한 절차를 거치고 있다. 김모 씨 건의 경우도 식약청은 적십자사로부터 통보를 받은 때로부터 3일이 지나서야 제약사에 이 사실을 유선상으로 통보했고, 문서상으로는 6일이 지난 후에 통보했다. 늑장대응을 한 것이다.

국회 보건복지위 고경화 의원(한나라당)은 “식약청이 국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기보다는 제약사의 제조 비용을 걱정하고, 제약사의 입장만 대변하는 것이 큰 문제”라며 “이번 기회에 혈액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2005.10.04 504호 (p36~37)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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