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0

2005.08.30

문학과 게임의 만남 … 게임 시나리오 뜬다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5-08-25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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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게임의 만남 … 게임 시나리오 뜬다

    ◁ 소설 ‘영원한 제국’ ‘하비로’의 작가 이인화 교수는 최근 온라인 게임 ‘쉔무’ ‘길드워’의 시나리오를 썼다. <br>▷무협 소설가 좌백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무협 온라인 게임 ‘구룡쟁패’의 시나리오를 썼다.

    1980년대에는 단편소설 공모에 문학청년들이 매달렸어요. 이들이 1990년대에는 영화 시나리오 공모로 옮겨갔고, 2000년대 이후에는 게임 시나리오 또는 게임 기획 공모로 발길을 돌렸죠. 공모전 상금이 200만원밖에 안 돼도 엄청나게 몰려요. 금전적인 욕심보다는 그냥 좋아서 몰입하는, 이른바 ‘문청’적인 열기가 확 느껴지죠. 이렇게 21세기 세상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바뀌고 있는데, 아날로그적 창작만을 강요하는 건 마치 ‘필사’ 시대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이는 역설적으로 난관에 봉착한 문학의 돌파구를 디지털 글쓰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소설 ‘영원한 제국’으로 필명을 날렸던 이인화(39·본명 류철균·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 그는 이제 자신의 프로필에 게임 시나리오 작가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연구자라는 직함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지난 학기 국문과에서 디지털미디어학부로 옮기면서 그는 주로 게임 시나리오나 디지털 문화론 등을 강의해왔고, 4월 말 서비스를 시작한 엔씨소프트의 온라인 게임 ‘길드워’의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는 연구서를 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기술을 표현 수단이나 매체 환경으로 받아들인 이야기 예술.

    이 교수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3년 온라인 게임 ‘리니지2’를 접하면서다. 360도 회전하는 전면(full) 3D 형식으로 구현된, 현실 세계만큼이나 얽히고설킨 가상의 삶에 폭 빠진 그는 무려 42시간 동안 게임만 한 적도 있고, 덕분에 퇴행성관절염을 앓았으며, 아내와 여러 차례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요즘은 하루에 3시간 정도만 게임에 투자하려고 노력한다지만, 이제는 새로 서비스되는 게임을 하지 못하면 마치 신작 소설을 읽지 못했을 때와 같은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게임 마니아가 됐다.

    하지만 이인화 교수는 단지 새로운 문화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게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온라인 게임 ‘쉔무’와 ‘길드워’가 바로 그의 작품. 특히 ‘읽는 게임’을 표방한 ‘길드워’는 배경 스토리를 보여주는 동영상만 80분이나 되고, 전체 시나리오 분량이 장편소설 3권에 이른다. 게임 시나리오 창작에 관심이 있는 10여명의 문하생들과 함께 작업했다. 이 교수는 “게임 시나리오 창작은 소설이나 영화 시나리오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자가 고정된 ‘상수’라면 후자는 가변하는 ‘변수’이고, 또 전자가 라이팅(writing)이 중요하다면 후자는 에디팅(editing)이 중요하다는 것.

    “게임의 스토리는 사용자가 만들어가는 겁니다. 이는 늘 개발자의 예상을 뛰어넘어요. 이런 측면에서 시나리오 작가의 소임은 사용자의 감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스토리를 적재적소에 집어넣는 것이죠.”



    이제 게임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새로운 서사 양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즉 게임에 문학성이 가미되고 있는 것. 한국게임산업개발원 부설 게임아카데미의 박승순 교수는 “그래픽 기술이 발전하면서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가 다양해졌다. 따라서 게임에서 스토리, 즉 서사적인 측면이 강화되는 추세”라고 강조했고, 이 교수 역시 “게임 시나리오 창작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10년만 지나면 보편적인 장르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팬터지나 무협, SF 소설 등 장르 문학이나 만화 등은 분야의 특성상 이미 게임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온라인 게임 ‘리니지’의 원작 역시 만화다. 하지만 과거엔 이런 작품들이 게임의 모티브를 주는 정도에 그쳤다면, 이젠 이 분야 작가들이 직접 게임 시나리오 창작에 나서고 있다. 4월부터 서비스되는 인디21의 온라인 무협 게임 ‘구룡쟁패’의 시나리오 작가 역시 무협 소설가 좌백(40·본명 장재훈)이다.

    “팬터지 게임을 하면서 무협도 게임으로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무협 게임들이 쏟아지더라고요.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만들다 보니 무협적인 배경을 제대로 살리지도 못했고, 심지어 담지 말아야 하는 것을 담은 경우도 수두룩했어요. 그래서 무협 게임의 고증과 자문을 맡아왔는데, 그러던 중 제 소설 가운데 하나를 시나리오로 해서 무협 게임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예 게임에 맞는 시나리오를 새롭게 쓰겠다고 했죠.”

    그는 문파 개념을 게임의 캐릭터 분류 시스템으로 도입하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문파 내부의 관계도 계급이 아닌 사제지간으로 바꿨다. 또 전체적인 스토리는 물론 사용자 개개인의 캐릭터가 만들어가는 삶이 어색하거나 엉성하지 않도록 세부적인 부분에 신경을 썼다. 이런 노력 덕분에 ‘구룡쟁패’는 무협의 세계를 잘 구현하면서도 게임적인 재미를 살린 게임이란 평을 듣는다. 현재 인디21의 콘텐츠 기획 이사이기도 한 좌백은 앞으로도 무협 소설과 무협 게임 시나리오 작업을 병행할 계획이다.

    이인화 교수와 함께 ‘길드워’의 작가군으로 참여한 신용성(29) 작가는 영화에서 게임으로 발을 옮긴 경우다. 영화학과 출신인 신 작가는 1990년대 중반 게임 시나리오 제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게임과 인연을 맺었다.

    “물론 영화 시나리오도 많이 썼죠. 하지만 영화는 이미 올드 미디어가 됐고, 발전 가능성이 많은 뉴 미디어가 바로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제법 돈벌이도 되고 해서 게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죠.(웃음) 그러던 중 1999년 문화관광부 주체 게임 시나리오 공모에서 수상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길을 걷게 됐어요.”

    올해 초 미국의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게임 제작 관련 교육과정을 수료한 신 작가는 “게임은 ‘네버 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라는 점에서 소설이나 영화와 다르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면서도 ‘끝’이 없기 때문에 앞의 장르들보다 더 많은 콘텐츠를 쏟아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게임의 스토리텔링이 강화되는 현 추세에서 단순히 게임을 좋아한다거나 톡톡 튀는 감각만으로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될 수 없고, 다양한 지식과 경험, 문화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는 것.

    다양한 지식과 경험 문화적 소양 갖춰야

    한국게임산업개발원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 현재 게임 시나리오 작가 수는 1241명이다. 타 분야에서 활동하다 게임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게임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젊은이들도 많다. 매해 있는 시나리오 공모전에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 몰리고 있고, 공모전도 지방자치단체나 일반 단체가 시행하는 것까지 하면 수십 개에 이른다. 또 국어국문학 분과 중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가장 많은 연구자들이 몰리고 있다. 하지만 현재 게임계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 역시 시나리오다. 박승순 교수는 “서사적인 측면이 강화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대전(對戰) 중심의 온라인 게임이 강세인 우리나라의 풍토상 스토리가 전면에 부각되기는 힘들다”고 설명했다. 즉 대다수 사용자들이 배경 이야기를 몰라도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 이에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게임 제작사들도 많은 실정. 따라서 21세기 ‘문청’들의 열기를 제대로 발산시키려면 정부와 게임 제작사, 그리고 사용자들의 전폭적인 이해와 지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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