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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대선자금 심부름도 했는데…”

홍석현 씨 보광 세무조사 당시 전방위 구명 로비 … 청와대 핵심 관계자 만나 하소연

“DJ 대선자금 심부름도 했는데…”

“DJ 대선자금 심부름도 했는데…”

1999년 10월2일 보광그룹 탈세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가운데).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이건희) 회장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일반 편지봉투에 스카치테이프로 봉한 것을 보니 특별한 내용은 없고 ‘호의’에 대한 감사의 뜻인 것 같다.”

“세무조사 확인서 손 떨며 서명”

MBC가 공개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비밀 도청팀 ‘미림팀’이 도청한 내용(이른바 안기부 X파일) 가운데 일부다.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현 주미대사)이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현 구조조정본부 부회장)에게 한 말이다. MBC는 홍 사장이 말한 ‘호의’를 정치자금 제공으로 해석했다. 이 문건대로라면 홍 사장은 삼성 측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하는 심부름을 한 셈이다.

그러나 삼성 측이 DJ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에는 당시 홍 사장이 삼성 측을 대신해 이회창 후보에게도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MBC는 이 문건을 토대로 당시 삼성 측이 이 후보 측에 제공한 정치자금은 최소한 100억원대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정황으로 볼 때 이 후보 측에 더 많은 자금을 제공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DJ 대선자금 심부름도 했는데…”

MBC가 폭로한 안기부 X파일 테이프와 녹취 문건들. 97년 대선 전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이 대선자금 분배에 대해 대화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홍 대사가 나중에 ‘유용하게’ 이용한 대목은 DJ에 대한 정치자금 전달이었다. 홍 대사는 1999년 보광 세무조사 당시 이 사실을 근거로 청와대 고위 관계자 등 여권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구명 로비를 했기 때문이다. DJ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홍 대사는 ‘97년 대선 당시 오히려 DJ 측을 도왔는데, 세무조사까지 당해야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고 증언했다.



얘기는 99년 보광 세무조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세청은 그해 6월29일 세무조사에 들어가 홍 사장 일가와 보광그룹이 10가지 위법행위에 관여한 사실을 적발하고 262억원을 추징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9월17일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 일가와 보광그룹 3개 계열사에 대한 조세범칙 조사 결과를 발표한 뒤 홍 사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마친 뒤 대개 당사자에게서 확인서를 받는 절차를 거친다. 당시 국세청 고위 관계자는 “국세청의 엄정한 세무조사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사무관을 홍 사장에게 보내 확인서를 받아오게 했는데, 당시 홍 사장은 확인서에 서명을 하면서 손을 떨었다고 한다”고 기억했다. 중앙지 언론사 사주로서는 처음 당한 경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DJ 대선자금 심부름도 했는데…”

2월18일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임명장을 받고 있는 홍석현 주미대사.

그해 10월2일 검찰이 홍 사장을 구속함으로써 ‘언론 탄압’ 시비가 고조됐다. 당시 한나라당은 “명백한 언론 탄압”이라고 규정하고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해임안을 제출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다. 반면 정부 여당은 “언론사 사주의 개인 비리에 국한된 수사”라며 “의미를 확대하지 말라”고 맞섰다.

홍 사장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자신의 구명을 위해 다각도로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홍 사장이 구속되기 전 중앙일보 측에선 다양한 채널을 통해 여러 제의를 해왔으나 공평 과세라는 조세원칙을 지키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다”고 공언했을 정도.

홍 사장이 청와대 핵심 관계자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홍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97년 대선 당시 ‘중앙일보’의 보도는 결코 ‘편파적’이지 않았다.”

홍 사장의 이런 언급은 보광그룹 세무조사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진영을 도왔다고 판단한 김대중 정부가 세무조사라는 칼을 빼들어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 내비친 셈이다.

홍 사장은 이어 이희호 여사와의 개인적 관계를 거론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처조카와 친구여서 오래전부터 이희호 여사와도 잘 아는 사이다. 이런 인연으로 김대중 대통령 집에도 자주 놀러갔다. 그런 내가 ‘편파 보도’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 다음 홍 사장은 인화성 강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나는 오히려 97년 대선 당시 DJ를 도와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삼성의 대선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

바로 안기부 X파일에 언급돼 있는 내용을 꺼낸 셈이다. 홍 사장의 이 발언은 가볍게 받아넘길 내용이 아니었다. 정치자금법이 개정된 97년 11월14일 이후에 DJ가 이 돈을 받았다면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 설령 그 전에 받았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DJ는 타격을 입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정치자금법 개정 이전에는 정치인에게 아무리 많은 자금을 건넸다고 해도 구체적인 청탁만 없었다면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았다).

“당시 발언 DJ에게 보고하지 않아”

그렇다면 당시 DJ는 홍 사장의 이 발언을 전해 들었을까. 홍 사장을 만났던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홍 사장의 발언은 내용이 내용인 만큼 당연히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DJ는 평소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에는 돈을 받았지만 개정 이후에는 전혀 받지 않았다’고 강조해온 만큼 홍 사장이 전달한 정치자금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홍 사장에게 얼마를 전달했는지도 묻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주간동아는 주미대사관을 통해 홍 대사에게 당시 상황을 물어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날 청와대 핵심 관계자와 홍 사장이 나눈 대화 내용은 영원히 묻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천용택 당시 국정원장이 그해 12월15일 기자간담회에서 “DJ가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에게서 (삼성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발설한 것. 천 원장은 이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국정원장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천 전 원장은 이 내용을 “다른 자리에서 비슷한 얘기를 듣고 옮긴 것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최근 안기부 X파일이 터져나오면서 그는 국정원장을 하면서 이 테이프를 회수했을 때 그 내용을 보고받아 알게 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홍 전 사장은 주미대사로 부임한 뒤 미국 특파원들과 한 간담회 자리에서 “97년 대선 때 나는 이회창 후보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99년 사건(보광그룹 세무조사)도 그 인과응보로 보고 있다. 그게 하나의 교훈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미대사직 사퇴 의사를 표명한 지금에 와서 보면 그 사건은 여전히 ‘업보’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정경유착을 감시해야 할 언론사의 사주가 정치에 너무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간동아 2005.08.16 498호 (p54~55)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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