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4

2005.07.19

자연보호 독도, 역사가 버려져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국민에게 덜렁 공개 … 독도 모든 것 보여줄 시설로 여행지 만들어야

  • 글·사진/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7-14 18: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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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보호 독도, 역사가 버려져 있다

    한국과 일본이 치열하게 영유권 말뚝을 박아넣었던 자갈마당. 중앙에 독도의용수비대가 세운 비석이 보이고, 그 뒤 갈매기 2마리가 앉아 있는 바위가 한국산악회가 독도 표석을 세웠던 곳이다. 독도조난어민위령비는 오른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해해양경찰서 소속 삼봉호(함장 김기수 경정)는 만재t 수가 무려 6350t에 이르는, 해양경찰이 보유한 배 중에서 가장 큰 경비함이다. 주룩주룩 쉼 없이 내리던 장맛비가 걷히고 오랜만에 태양이 고개를 내민 7월2일 오전 8시쯤. 동해 한복판에 떠 있던 삼봉호 격납고에서 일단의 전경대원들이 AS-565 팬더(퓨마의 다른 이름) 헬기를 비행갑판으로 끌어냈다.

    접어놓았던 블레이드(날개)를 펼치고 엔진을 돌린 팬더는 기자를 태우고 사뿐히 이함(離艦), 삼봉호 상공을 한 바퀴 돈 뒤 하염없이 넘실대는 동해 바다를 날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태양은 장마철 습기를 머금고 있는 동해바다 위를 슬슬 달구기 시작했는데, 그로 인해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라 팬더는 마치 사우나 위를 날아가는 듯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조종석 캐노피(유리창) 너머로 구름 모자를 쓴 바위가 보였다. ‘독도인가?’ 작은 바위로 보인 독도는 곧 동도(東島)와 서도의 두 개 바위섬으로 커졌다. ‘칼바위’ 능선을 이고 있는 두 바위섬은 강한 마력으로 팬더를 잡아끌었다. ‘저렇게 날카로운 능선에 어떻게 헬기를 착륙시키나?’

    동도와 서도 날카로운 칼바위 능선

    다행히 동도 정상엔 흙이 보였는데, 그 사이로 H빔을 가로 세로 엮어 만든 헬기장이 바늘구멍만한 크기로 발견되었다. 팬더는 그곳을 향해 고도를 낮춰 부드럽게 착륙했다.



    독도에는 해경이 아니라 ‘육경(陸警)’인 독도경비대가 주둔해 있다. 독도경비대는 경북지방경찰청 작전전경계 소속으로 울릉경찰서에 작전 배속돼 있는 울릉경비대 예하의 전경 부대다. 울릉경비대는 본부 소대와 5개 일반 소대로 구성돼 있는데, 5개 일반 소대는 울릉도를 지키다가 두 달 혹은 석 달씩 교대로 독도에 들어와 독도경비대가 된다.

    독도경비대 소대장은 경찰대 20기(00학번)인 김성훈 경위였다. 00학번은 2000년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1981년생)이니 김 경위는 24세 전후가 된다. 20대 중반의 경위가 20대 초반의 전경을 지휘하고 다독이며 ‘한국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헬기장 밑에는 3층 막사가 있고 막사 앞에 20평쯤 되는 마당이 있는데, 이곳이 동도 정상에 있는 유일한 평면이었다.

    마당 한쪽엔 98년 삽살개보존회가 기증했다는 삽살개 한 쌍이 두 눈을 털 속에 감춘 채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또 동도에는 포항지방해양수산청 항로표지과에 속한 3명의 직원이 지키는 독도항로표지관리소(독도 등대)가 있다. 헬기장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평면이 없는 동도에 3명의 등대 직원과 40여명의 경비대원, 그리고 삽살개 한 쌍이 ‘바글’거리는 것이다. 이 많은 식구 중에서 성(性)이 다른 것은 삽살개 암컷인 몽이뿐이다. 50년대 독도를 지켰던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은 한여름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타잔처럼 지냈다고 하니 독도는 원래부터 ‘수컷의 세계’였던 모양이다.

    자연보호 독도, 역사가 버려져 있다

    해군 수병들이 조총을 쏘는 가운데 자갈마당에서 독도조난어민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는 조재천 경북지사(위). 일본이 박아넣은 다케시마 말뚝을 뽑아내는 한국산악회원(좌). 자갈마당의 바위 위에 독도 표석을 설치하는 홍종인 한국산악회장(우).

    푸른 하늘, 푸른 파다, 푸른 섬, 푸른 옷의 세계에서 유난히 눈에 띈 것은 경비대 막사 옆의 빨간 우체통이었다. ‘저 우체통에 담긴 사연을 누가 어떻게 거둬갈 것인가?’ 이렇게 복작대는 공간 바로 뒤쪽은 분화구처럼 푹 꺼져 있었다. 꺼진 바닥 한쪽에는 동굴이 있어 바닷물이 들락거렸다. 바다에서부터 헬기장이 있는 동도 최정상까지의 높이는 99.4m. 태풍이 불면 이 동굴로 들어온 바람이 니은자로 꺾이면서 99.4m를 치솟아, 거세게 동도 정상을 때리는 바람과 뒤섞여 거대한 휘파람 소리를 낸다고 한다. 날씨가 궂은 날 심약한 사람은 귀신 울음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파도와 바람 공격 침식되는 섬

    독도는 파도와 바람의 공격에 의한 자연 침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동도 뒤편 푹 꺼진 곳에 날카롭게 서 있는 바위는 조금씩 그 틈이 벌어지면서 무너져내리고 있다. 의용수비대원들이 있던 50년대에도 독도에서는 바위가 무너져내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하니 독도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경비대와 등대 사이의 좁은 길을 제외하고는 전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니 독도에서는 추락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의용수비대는 서도에 주둔하다 1954년 9월10일 새로운 막사를 짓고 동도로 옮겼는데, 이때 울릉경찰서의 요구로 순경으로 특채된 허학도 씨 등 세 명의 무전사가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난 10월22일 9호 태풍이 독도로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은 날 허 씨는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 바람에 날려 추락했다. 첫 번째로 순직자가 나온 것이다. 동도 정상에는 허 대원을 비롯해 순직한 대원 5명을 기리는 위령비가 등대 쪽으로 가는 좁은 길 한편에 위치해 있다.

    헬기가 떠나간 동도에는 괭이갈매기 울음만 가득했다. 하늘을 향해 열 번쯤 돌을 던지면 그중 한 번은 맞힐 수 있을 정도로 갈매기가 많았다. 갈매기 떼 사이로 울릉도에서 보급품을 싣고 오는 해경의 태극3호(500t급)가 보였다. 부식이 그리웠던가. 일단의 경비대원들이 계단을 통해 접안장으로 달려 내려가고 일부는 경비함에서 내린 부식을 막사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들 세계에서는 ‘동키’라고 부르는 작은 케이블카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극3호는 독도 접안장을 200여m 남겨놓고 “파도가 커져서 접안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그냥 돌아갑니다”라고 방송한 뒤 U턴해 울릉도로 되돌아갔다. ‘맙소사,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파도가 크다니.’ 옆에 있던 한 전경이 “또다시 장맛비가 시작될 텐데 20여일 만에 온 부식함이 그냥 돌아가냐? 남은 부식이라곤 라면뿐인데…”라며 투덜거렸다. 파도가 얼마나 커졌는지 확인해보려고 계단을 통해 접안장으로 내려가보았다.

    어느 틈엔가 갈매기 울음은 사라지고 파도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접안장에 부딪혀 포말을 만든 파도는 접안장 위로 올라와 흰 물결을 만들었다. 사람을 휩쓸고 갈 만큼 큰 물결은 아니지만 접안장에 계류한 경비함은 이 파도와 접안장 사이에 끼여 크게 오르내리며 삐꺽거릴 것임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짐을 내리면 배와 사람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

    자연보호 독도, 역사가 버려져 있다

    허학도 통신사를 비롯한 5인의 순직비(좌). 독도 소식을 뭍으로 전하는 우체통.

    독도 접안장의 최대 약점은 파도를 막아줄 방파제가 없다는 것이다. 독도는 수심 2270m의 해저에서 2000여m의 높이를 가진 해산(海山)이 솟아 있고 그 위에 동·서도가 첨탑처럼 물 위로 치솟은 형태를 하고 있다. 때문에 조금만 나가도 수심이 급전직하로 깊어져 파도가 커지고 방파제 공사가 어려워진다. 97년 156억원의 예산으로 접안장을 지을 때도 이런 이유로 방파제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일반인의 자유 입도(入島)를 허용해 독도를 유인도(有人島)화하기로 결정했으면 정부는 어렵더라도 방파제 건설을 추진해야 한다.

    요즘 울릉도에서는 70명을 태운 여객선이 하루 두 번씩 ‘복불복(福不福)’의 개념으로 독도를 향해 출항한다. 파도가 잔잔하면 접안장에 접안해 손님을 독도에 상륙시키지만 파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독도 일주만 하고 울릉도로 되돌아간다. 몇 달을 별러서 수십만원을 들여 울릉도에 와 운 좋게 70명에 선발됐지만, 파도 때문에 독도를 지척에 두고 되돌아가는 여행자의 마음은 어떠할 것인가.

    이 접안장과 독도가 맞닿아 있는 곳 왼쪽에 다양한 크기의 검은색 몽돌이 파도에 따라 “촤르르 촤르르―” 굴러다니는 50평쯤 돼 보이는 ‘자갈마당’이 있다. 독도는 82년 11월16일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됐기 때문에 독도에 상륙한 여행자들은 동도나 서도 정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 이들에게 개방된 공간은 접안장과 자갈마당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자갈마당은 한국과 일본이 치열하게 영토 표지를 박으며 독도 영유권을 다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먼저 말뚝을 박은 것은 우리나라였다. 미군정기인 1947년 우리나라는 최희송 경북도지사의 발의와 과도정부 안재홍 민정장관의 결심, 그리고 조선산악회 송석하 회장의 출연으로 8월29일 관계자들을 이곳에 상륙시켜 ‘朝鮮 慶尙北道 鬱陵郡 南面 獨島(조선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라고 쓴 푯말을 박아넣었다(국가 기록원 문서 근거). 그러나 이 푯말은 태풍에 유실됐는지 사라져버렸다.

    어렵게 찾은 여행자들 안타까운 마음

    1년 뒤인 48년 6월8일 독도에서 조업하던 어민들이 미 5공군 소속 B-29 편대가 독도에서 폭격 연습을 함으로써 14명이 숨지고 십수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하여 6·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8일, 조재천 경북지사는 울릉도 주민들과 함께 이곳에 상륙해 위령제를 지내고 ‘獨島遭難漁民慰靈碑(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그 후 상륙한 일본인들도 훼손하지 않았으나, 59년 태풍 사라호가 불어왔을 때 유실되고 말았다.

    52년 4월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됨으로써 미군정을 끝낸 일본은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독도를 넘보기 시작했다. 한국이 6·25전쟁 중이던 53년 5월28일 해상보안청과 수산청 직원들은 독도 자갈마당에 상륙해 조업 중이던 우리 어민을 내쫓고 ‘島根縣隱地郡五箇村竹島(시마네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는 나무 푯말과 한국인의 상륙을 금하는 안내판을 세운 뒤 어구(漁具)를 넣어둘 작은 간이창고를 만들고 돌아갔다.

    그 후 울릉도 주민들이 이 푯말을 바로 뽑아버리자 일본은 6월25일 다시 공무원을 독도에 상륙시켜 같은 장소에 같은 말뚝을 박고 돌아갔다. 7월3일 경북경찰국 소속 경찰관들이 독도에 상륙해 이 말뚝을 뽑아내자, 일본은 9월17일 또다시 말뚝을 박아넣었다.

    자연보호 독도, 역사가 버려져 있다

    독도 동도 뒤편에 있는 함몰된 공간(오른쪽). 이곳의 칼바위는 자꾸 틈이 벌어지며 무너져내리고 있다. 벌어지는 틈을 재기 위해 설치한 자.

    10월15일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독도에 들어가 이 말뚝을 뽑아내고 바위 위에 ‘독도’ 표석을 세워놓았다. 그러나 10월22일 일본 해상보안청 관리들이 독도에 들어와 이 표석을 뽑아 바다에 던져버리고 네 번째로 다케시마 말뚝을 박아넣었다. 이 말뚝은 이듬해인 54년 1월 말 독도에 들어간 경북경찰국이 뽑아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4월25일 홍순칠 씨를 중심으로 한 울릉도의 제대 군인 33명이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 독도에 들어감으로써 더 이상 일본인은 독도에 발을 올려놓지 못하게 되었다. 의용수비대는 그해 8월 자갈마당에 ‘大韓民國 慶尙北道 鬱陵郡 南面 獨島’라고 쓴 영토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은 태풍에 유실됐다가 다시 찾아내 지금은 시멘트로 만든 임시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54년 8월14일 일본 시마네(島根)현 오키(隱岐)도에 있는 수산고등학교 졸업생이 탄 수산실습선 다이센 마루(丸)가 독도에 접안하기 위해 다가왔을 때 의용수비대는 즉각 이 배를 나포해 ‘독도는 한국 땅이며 다시는 독도를 넘보지 않겠다’는 내용의 자필 각서를 쓰고 손도장을 찍게 한 뒤 자갈마당으로 끌고 가 ‘대한민국~ 독도’ 표석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풀어줬다.

    그해 10월23일 오전 8시30분쯤 일본 해상보안청 제8관구 소속의 P9과 P11 순시함이 수산 실습선 나포를 징벌하고 아울러 독도를 접수하기 위해 다가왔을 때 의용수비대의 서기종 대원이 정확히 박격포를 발사해 P9 순시함을 명중시키고 자갈마당에 숨어 있던 다른 대원들은 일제히 소총 사격을 가해 이들을 퇴각시킨 바 있다. 한마디로 자갈마당은 독도 영유권을 지킨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정부는 일반인들이 둘러볼 수 있는 이곳에 역사의 현장을 복원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박았던 영토 표지는 물론이고 뽑아낸 일본의 영토 표지도 뽑아낸 상태로 복원하고 동도 정상에 있는 5인의 순직비를 옮겨놓아야 여행객들이 독도를 찾아온 뜻을 새롭게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국유지인 독도는 해양수산부(포항해양수산청이 대행)가 관리한다. 그러나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문화재청도 관여하고 있으며 97년 12월13일 제정된 ‘독도 생태 보전에 관한 특별법’으로 인해 환경부도 개입하고 있다. 또 대통령 정책실도 지난 2, 3월의 독도 영유권 사태 이후 독도 대응팀을 만들었다. 많은 기관이 관여하다 보니 영역 다툼이 일어나 정작 독도를 찾아온 사람에게 보여줄 것을 만드는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곧 다가올 8월15일은 광복 6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날 독도는 치열했던 영유권 다툼을 안고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지 않을까. 관계자들은 온 국민을 흥분시켰던 독도 문제가 이렇다 할 결말도 내지 못하고 그냥 흘러가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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