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4

2005.07.19

물 半 군함 半 ‘환상의 바다쇼’

영국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 200주년 기념 ‘관함식’ … 한국 등 32개국 168척 참가 ‘대성황’

  • 최태복/ 해군 순항훈련함대 공보참모(소령)

    입력2005-07-14 17: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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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半 군함 半 ‘환상의 바다쇼’

    트라팔가르 해전 200주년을 기념하는 관함식에 참여한 168척의 함정.

    1805년 10월21일. 영국 함대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쳐부순 대신 넬슨 제독을 하늘에 바쳐야 했다. “나는 만족한다. 내 임무를 다하게 해준 신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넬슨은 조국을 나폴레옹으로부터 지켜냈다. 이날 넬슨이 이끈 27척의 전함은 이베리아반도 남서부의 트라팔가르 곶(串) 해안에서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이 33척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괴멸시켜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올려놓았다.

    넬슨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지만, 영국 포츠머스항은 축포를 터뜨리며 영웅을 맞이했다. 그리고 200년이 흘렀다. 지금 영국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리한 넬슨을 기리는 축제가 한창이다. 2년 전부터 넬슨의 화려한 부활을 준비해온 영군 해군은 6월이 되자 9개 테마를 정하며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6월28일 패전국인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까지 초청해 금세기 최대의 관함식(觀艦式·Fleet Review)을 열었다.

    여왕, 해상 사열 통해 이순신함과 만나

    관함식은 국가 통치자가 자국의 군함을 사열하는 의식으로,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1341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해상에서 함대의 전투태세를 점검한 것이 효시다. 관함식의 종주국인 영국이 연 최대 규모의 해상 사열인 ‘트라팔가르 200’에 한국 해군은 ‘한국의 넬슨’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을 기린 충무공 이순신함과 천지함을 이끌고 참여했다.

    물 半 군함 半 ‘환상의 바다쇼’

    관함식 참가 함정을 사열하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6월28일 포츠머스항 앞의 솔렌트 수로에는 충무공 이순신함과 천지함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온 최신예 군함들이 200m 간격으로 위치를 잡고 섰다. 초청된 군함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패전국 프랑스는 4만2000t의 샤를 드골 핵추진 항모를 비롯해 잠수함과 구축함, 지원함 각각 한 척, 대형 범선 두 척을 참가시켰고, 스페인은 항모 1척과 군함 2척을 보냈다. 일본은 1895년 영국에서 구입한 함정에 붙던 이름을 3대에 걸쳐 쓰고 있는 구축함 ‘유우기리(夕霧·일본 호위함대 제3호위대군 제7호위전대 소속)함’ 등 3척을 참가시켜 영국과의 오랜 우정을 과시했다.



    오후 1시쯤 영국 해군의 넬슨함에서 각국 해군 대표단과 오찬을 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대표단과 함께 32개국에서 온 168척의 함정을 사열하기 위해 좌승함(座乘艦·사열하는 주인공이 타는 배)으로 옮겼다. 그런데 좌승함은 뜻밖에도 군함이 아닌 남극 탐험선 인듀런스(6500t, 길이 91m, 폭 18m, 최대속력 15노트)함이었다. 1991년 취역한 이 배를 좌승함으로 선정한 것은 영국의 국력이 남·북극에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듯했다.

    물 半 군함 半 ‘환상의 바다쇼’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윤영하 소령이 다녔던 라츠미어 초등학교를 찾은 한국 함대. 15t의 화약을 쏘며 펼쳐진 ‘빛과 소리의 축제’. 넬슨과 만나기 위해 출전한 한국의 충무공 이순신 구축함(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인듀런스함 앞에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의 집(Trinity House)’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패트리샤호가 선도함으로 나섰다. 항해 부표를 띄우는 구실을 하는 패트리샤호가 선도함이 된 까닭은 ‘신에게 여왕을 보호해달라’는 의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좌승함을 따라서 구축함 채텀(4900t, 길이 148m, 폭 14.5m, 최대속력 30노트), 정보함 스콧, 지원함 서 베디비어, 정보함 엔터프라이즈, 지원함 린더, 범선인 그랜드 터크가 줄을 이었다. 좌승함 대열을 가장 먼저 맞은 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항공모함 인빈셔블과 일러스트리우스, 상륙함인 불워크 등 62척의 영국 함정이었다. 이들 함정에서는 일제히 예포를 쏘고 뱃전에 도열한 수병들이 모자를 흔들어 예우를 표시했다. 이어 좌승함 대열은 외국 함정과 범선·요트 대열을 차례로 통과했다.

    인듀런스함이 우리의 천지함과 충무공 이순신함 앞에 다다른 것은 1시40분쯤이었다. 유난히 거세진 바람에도 꿋꿋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대한민국 순항훈련함대(사령관 최윤희 준장) 장병과 사관생도들은 “대한민국”을 제창하고 모자를 벗어 든 오른팔로 큰 원을 그렸다. 그 소리는 여왕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했으므로 하늘색 옷을 입은 엘리자베스 2세는 손을 들어 화답했다. 여왕은 넬슨보다 200년 앞선 바다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함)의 후예를 만난 것이다.

    여왕의 해상 사열 다음에는 영국 해군의 헬기와 범선들이 화려한 공중 및 해상 분열을 선보이는 것으로 축제는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관함식은 자리를 해안으로 옮겨 2막에 들어갔다. 넬슨 함대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간의 공방전을 묘사한 거대한 ‘빛과 소리의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넬슨 함대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로 나누어진 17척의 범선은 15t의 화약을 내뿜으며 상호 공방전을 벌였다. 이 행사는 엄청난 화약 비용 때문에 리허설 없이 바로 펼쳐졌다고 하는데, 15만명이 넘는 인파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싸움은 넬슨 함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태극기 든 사관생도 BBC 화면에 잡혀

    29일부터는 육상으로 자리를 옮겨 축제의 3막을 이어갔다. 전투에 나가기 전에 승리를 기원하는 IDC(International Drumhead Ceremony)가 열린 것이다. IDC는 사각형 운동장의 세 변에 전투에 나가는 군인들이 자리 잡고 남은 한 변엔 군악대가 위치한 뒤, 중앙으로 나가면서 피라미드 모양으로 드럼을 쌓아 올리고 그 앞에 재단을 만드는 일종의 기원제였다. 초청받은 나라는 국기를 든 기수들이 입장한다. 우리 순항훈련함대에서는 사관생도 9명이 참가했는데, 마침 태극기를 든 신상복 생도가 BBC 카메라 앞에 서는 바람에 그와 태극기를 잡은 화면은 오랫동안 세계로 송출되는 행운을 잡았다.



    이어 대형 스크린에서 이라크전에 참가한 영국군 병사들이 소개되었다. 국가 원수와 온 국민이 전장에 나가는 군인을 위해 승리를 기원하고 전쟁으로 죽은 영웅들을 추모하는 장엄한 분위기가 영국을 지탱해온 힘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6월30일부터 7월3일까지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축제 한마당으로 바뀌었다. 29일 밤샘작업을 한 포츠머스항은 30일 아침 새 단장을 하고 1인당 30파운드의 입장료를 받는 전시장으로 변모했다. 부두 전체엔 천막을 친 부스가 빼곡이 들어섰고 곳곳에서 야외공연이 열렸다. 우리도 군악대와 의장대·태권도·사물놀이 팀을 출연시켜 공연을 벌였다. 비가 내리는데도 가족 단위로 찾아온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켜봐주었다. 넬슨이 탔던 기함(旗艦·사령관이 타는 배)인 빅토리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들어갔고, 각국이 공개한 범선과 군함에도 적잖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우리 눈으로 보면 그렇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 해양축제에 왜 많은 영국인들은 비를 맞으면서까지 몰려드는 것일까. 그것이 한때 해가 지지 않는 해양국가 영국을 만든 원동력일 것이다. 이 행사와 별도로 순항훈련함대 사령관은 군악대를 이끌고 2002년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고 윤영하 소령의 모교인 라츠미어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리멤버 357’, 우리는 윤 소령이 정장을 맡았던 357 고속정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순항훈련함대는 해사 4학년 생도들의 훈련을 위해 나온 만큼 다음 목적지로 가야 했다. 아직 ‘트라팔가르 200’ 행사가 끝나지 않은 7월1일,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며 행사를 보러 온 군중의 환송을 받으며 포츠머스항을 떠나 독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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