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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북한-김우중 삼각 커넥션

‘눈 가리고 아웅’ 인터폴 수배, 각국을 제집처럼 … 대북 프로젝트 모종의 임무 소문

프랑스-북한-김우중 삼각 커넥션

프랑스-북한-김우중 삼각 커넥션

① 1992년 1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등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김우중 회장(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② 1996년 5월 알랭 쥐페(왼쪽) 프랑스 총리에게서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은 김우중 회장.
③ 김 회장을 사기혐의로 수배한다고 밝힌 인터폴 사이트.
④ 1992년 1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민속박물관을 둘러보는 김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북한, 프랑스는 묘한 관계에 있다. 김 전 회장은 1985년부터 프랑스와 깊은 인연을 맺기 시작해 87년 4월2일 아내 및 두 자녀와 함께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당시의 국적법은 외국적을 취득하면 자동으로 한국적을 상실한다고 돼 있어, 김 전 회장은 한순간에 한국인에서 ‘프랑스인’이 되었다.

김 전 회장은 왜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을까. 한 측근은 “김 전 회장이 1987년부터 북방 교역에 전력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 국적을 얻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한국 법무 당국의 양해 아래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 신문인 리베라시옹 2003년 1월13일자에 보도됐던 것. 이 신문은 “당시 김 전 회장 가족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해 프랑스 귀화법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이 로렌 지방에 전자레인지 공장을 세우는 등 프랑스에 공헌한 것이 많아 가족과 함께 특별히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고 밝혔다. 대우가 프랑스의 자존심이라던 톰슨그룹의 가전 부문을 인수하려 했던 것도(96년) 김 전 회장이 프랑스인이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프랑스 자국민 보호 한국 사법 당국에 인도 안 해”

그러나 많은 한국인은 김 전 회장이 프랑스인이 된 사실을 몰랐다. 때문에 ‘프랑스인’인 그가 대우그룹을 이끌며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이 됐어도(98년)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김 전 회장은 북방 교역에 노력해 92년 10월5일 정부로부터 평안남도 남포공단에 재킷, 셔츠 등을 만드는 봉제공장을 설립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대우의 파트너는 북한의 삼천리총회사였다. 대우는 512만 달러를 투자해 최초의 남북한 합영회사인 민족사업총회사를 세우고 대우남포공장을 건설, 95년 5월17일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96년 5월 ‘프랑스인’인 김 전 회장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대신한 알랭 쥐페 총리로부터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아주 좋았으므로, 한국 기업들도 신용도 평가에서 매우 유리했다. 덕분에 대우는 국제 금융회사로부터 매우 싼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대우는 이 돈을 제3국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세계경영’을 펼쳤다. 그런데 97년 말 IMF 외환위기가 몰아치자 세계경영은 한순간에 빚더미 경영이 되었다.

한국의 외환 사정이 나빠지자 외국 금융회사들은 대우에 채무 상환을 요구했는데, 제3국에 투자한 대우는 돈을 빼낼 재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대우는 부도 금액 ‘세계 최고’라는 기록을 남기며 무너져내렸다. 99년 10월21일, 중국 산둥성의 옌타이 자동차 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하러 나갔다가 귀국한 김 전 회장은 다시 일본으로 출국한 뒤 종적을 감추었다. 이 무렵 대우남포공장도 가동을 중단했다.

2001년 3월 이후 김 전 회장은 인터폴의 수배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인터폴이 프랑스 중남부 도시인 리옹에 본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 영토에 인터폴 본부를 두고 있는 프랑스 정부는 김 전 회장을 찾아달라는 인터폴의 요청을 수용했을까. 정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이에 대해 리베라시옹은 “프랑스 정부는 자국민 보호 원칙에 따라 김 전 회장을 인터폴이나 한국 사법 당국에 인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한국과 프랑스는 범죄인 인도협정을 맺지 않았으므로 한국은 프랑스에 김 전 회장의 인도를 요청할 수도 없었다. 결국 김 전 회장에 대한 인터폴의 수배는 ‘눈 가리고 아웅’이었던 것. 한국도 알고 프랑스도 알고 인터폴도 알건만 ‘프랑스인’인 김 전 회장은 한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직후인 2000년 8월4일 일단의 해외동포 기업가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때 김 전 회장을 알고 있는 동포 사업가 K 씨가 우연히 김 전 회장과 마주쳤다(신동아 2000년 9월호 참조). 그 순간 김 전 회장은 K 씨를 못 본 체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대우그룹 분식회계의 주범으로 몰린 김 전 회장은 정상회담으로 인해 남북 관계가 좋아진 시점에서 왜 평양에 들어가 있었던 것일까.

김 전 회장은 독특한 대북 커넥션을 갖고 있다. 그와 북한의 관계는 그의 아버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전 회장의 부친인 고 김용하 선생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예과를 거쳐 경성제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김용하 선생은 함경북도의 경성공립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이때 그가 가르쳤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지난해 10월에도 방북 신의주 특구 개발 논의

광복 직전 대구사범학교 교장을 한 김 선생은 해방 후 용산중·고교의 초대 교장을 거쳐 서울 상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청에서 일을 하다가 49년 4월부터 11월 사이 제4대 제주도지사로 근무했다.

김 선생은 도지사가 돼 금의환향했지만, 고향은 4·3사건(1948년)이라는 전대미문의 갈등에 빠져 있었다. 지사를 그만둔 그는 50년 5월30일 시행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북제주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 후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바로 전쟁이 일어나면서 가족과 헤어져 납북되었다.

김 전 회장의 형제는 5남1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김윤중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한 명의 형이 있다(6남1녀인 셈이다). 김 전 회장에겐 둘째 형이 되는 윤중 씨는 6·25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고 한다(주간조선 1992년 8월30일자 참조).

부친과 둘째 형이 납북되었기 때문이었을까.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는 김 전 회장은 90년대 초부터 북한을 자주 출입했는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대우남포공장이었다. 이 시기 김 전 회장은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엮는 북방교역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최근 오일 게이트로 문제가 된 극동 러시아의 유전개발과 시베리아철도를 통해 한국과 유럽을 잇는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칭기즈 칸 정신을 이어받아 황인종 벨트를 구축하는 데도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대우 부도와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김 전 회장은 프랑스에서도 사업에 실패했다. 그가 로렌 지방에 세웠던 옛 대우공장에서도 1000여명의 근로자가 해고돼 김 전 회장을 프랑스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김 전 회장은 로르사 고문을 맡아 매월 1만5000~2만 유로(약 1500만~200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프랑스 세법은 연봉이 10만 유로인 사람은 따로 고율의 세금을 내게 한다. 2003년 1월 김 전 회장은 고율의 세금을 정산하기 위해 프랑스 사회보장번호를 취득했다.

김 전 회장의 대북 커넥션은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2004년 10월 김 전 회장은 북한을 방문해 북측 아태평화위 관계자와 신의주 특구 개발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의 이러한 대북 커넥션은 그의 입국과 관련해 묘한 소문을 만들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오랫동안 연세대 총동문회장을 지내왔다. 공교롭게도 노무현 정부 실세 중에는 연세대 총장을 지낸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연세대 출신이 적지 않다. 김 전 회장이 귀국을 결심했다면 그와 통할 수 있는 사람이 권력 실세에 있을 때 시도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리고 그는 반대급부로 뭔가를 지불한다. 이름 하여 ‘기획입국’설이다.

세간에는 이 선물이 노 정부를 위한 대북 연결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노 정부를 위해 김 전 회장이 모종의 연결 임무를 띠고 귀국했다는 것이다.

과연 ‘기획입국’ 설은 사실일까. 이를 증명할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주간동아 2005.06.28 491호 (p26~27)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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