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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사랑방|슬럼프에 빠진 박세리

누구나 겪는 일 … 조만간 부진 탈출

누구나 겪는 일 … 조만간 부진 탈출

누구나 겪는 일 … 조만간 부진 탈출

슬럼프를 겪고 있는 박세리의 표정(5월16일)이 2004년 미켈럽울트라오픈에서 우승했을 때와 사뭇 다르다.

슬럼프(slump), 사전상의 뜻으로는 심신의 상태가 나빠 운동 경기 등에서 자기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부진한 상황에 처한 경우를 말한다. 또 경제 불황, 즉 불경기를 일컫는다.

슬럼프 탈출은 생각보다 어렵다. 스포츠 스타 중 최근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박세리를 들 것이다. 외환위기로 전 국민이 좌절해 있을 때 그는 맨발로 한국 낭자 특유의 투혼을 발휘하며 US여자오픈대회에서 우승했다. 모두가 박세리처럼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고, 박세리 역시 미 LPGA(여자프로골프협회) 통산 22승, 메이저대회 우승만 4회를 기록하며 아니카 소렌스탐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후반부터 그는 슬럼프라는 ‘깊은 러프’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올 시즌 8개 대회에서 단 한 번도 톱 10에 들지 못했으며, 최근에 끝난 숍라이트클래식에선 4라운드 합계 18오버파 231타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모든 언론은 박세리의 최하위권 성적을 부각시켰다. 박세리는 정말 슬럼프에 빠진 것일까. 슬럼프는 깜짝 우승으로 단박에 해결될 수도 있다.

현재 일본 JGTO(일본프로골프)에서 5승을 거두며 한국인 최초로 최다승, JGTO 상금랭킹 1위를 기록하며 세계랭킹 67위로 껑충 뛰어오른 허석호에게도 지독한 슬럼프의 시련이 있었다. 국가대표로 아마추어 시절을 화려하게 보내면서 차세대 유망주로 떠오른 허석호는 1995년 9월1일 KPGA(한국프로골프협회) 프로 테스트 수석 합격 후 이듬해 데뷔 무대이던 팬텀오픈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고 슈페리어오픈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다.

데뷔 첫해 상위 성적을 내자 각 언론과 골프 관계자들은 대성할 선수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는 잠시, 허석호가 마주한 것은 군 입대였다. 허석호는 98년 12월 국방 의무를 마치고 그린으로 돌아왔다. 데뷔 시절 거뒀던 성적 이상의 결과를 자신했지만, 그에게는 끝없는 좌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드를 따기 위해 1년을 기다려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관절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중단할 위기가 찾아왔다. 또한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으면서 그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1년을 기다려 KPGA 시드권에 도전했으나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프로 테스트에서 수석 합격했던 허석호로서는 자존심에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심한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연습장과 필드에서도 예전의 감각을 찾을 수 없었고 성적은 더욱 곤두박질쳤다.

그 즈음 허석호는 필자를 찾아왔다. 그의 고교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 매우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골프를 그만두고 레슨프로로 전향해 가계에 보탬이나 되겠다고 했다. 설득 끝에 그를 다시 필드로 돌려보낼 수 있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스코어는 향상되지 않았고 더욱 깊은 러프에 빠져들 뿐이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골프 실력이 아니었다.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필자는 허석호와 만나 “술을 마시지 말라”는 평소의 충고를 하는 대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속 얘기를 들었다.

누구나 겪는 일 … 조만간 부진 탈출

슬럼프를 이겨내고 승승장구하는 허석호.

이듬해에도 허석호는 시드를 받지 못했지만, 스폰서 초청을 통해 매경오픈에 출전해 5위, PGA선수권 4위, 현대마스터스 3위에 오르며 마침내 오랜 슬럼프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2001년 5월 포카리오픈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재기를 선언했다. 허석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진출해 2부 투어 3승, 1부 투어에선 메이저 3승을 비롯해 5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허석호는 최근 지난날의 슬럼프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그때는 골프를 즐기지 못했던 것 같아요. 잘 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슬럼프란 반갑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허석호는 2년 전만 해도 출전이 허락된 모든 대회에 나갔다. 좋은 성적도 냈지만 어처구니없는 예선 탈락도 있었다. 결국 골프를 즐긴 것이 아니라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가리지 않고 출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올 시즌 들어 허석호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과감하게 대회를 거른다. 일본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일주일을 쉬었고, JCB센다이클래식 우승 후에도 일주일을 쉬었다. 예전 같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골프를 즐긴다’는 것의 묘미를 알고 있는 듯하다. 허석호는 박세리의 슬럼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국민 영웅’ ‘그린 여왕’이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라고 봅니다. 박세리는 언제나 완벽해야 하고 톱 10에 들지 못하면 부진하다는 질타를 받아요. 박세리도 80대 스코어를 낼 수 있는 똑같은 인간입니다.” 박세리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또 다른 외로움이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은 것이다.

KBS 조건진 아나운서는 대단한 장타자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플레이하는 동반자는 그에게 꼭 이런 주문을 하곤 했다. “조 형, 장타라며? 한번 보여줘.” 대회에 나가면 장타상을 빠짐없이 받았고 300야드를 넘나드는 드라이버 샷에 동반자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그러나 수년 후 그에게 찾아온 것은 지독한 ‘엘보우’였다. 조 아나운서는 요즘 엘보우 때문에 비거리를 적당히 낸다. 이후 그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는 골퍼들이 늘었다.

그렇다. 박세리, 허석호 등 프로는 물론이고 아마추어들도 실수할 수 있고,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 뭔가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기대에 부응하려는 조바심이 결국 슬럼프를 만드는 것이다. 항간에서는 박세리의 슬럼프가 ‘이룰 것을 다 이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도 말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소렌스탐은 박세리보다 먼저 더 많은 것을 이뤘다. 그럼에도 그는 승수 쌓기에 여념이 없다.

메이저리그의 박찬호는 3년간의 슬럼프를 꿋꿋하게 버티고 재기했다. 박세리 역시 허석호가 말한 대로 인간이기에 경험하는 과정을 겪고 있을 따름이다. 지독한 외로움이 걷힐 때 그는 분명 ‘그린 여왕’으로 돌아올 것이다.

팬들도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켜봐줄 필요가 있다. 박세리에겐 지금 시간이 필요하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助). 그렇다. 박세리 아버지 박준철 씨도 말했지만 ‘세리의 문제는 마음속에 있다’.



주간동아 2005.06.21 490호 (p88~89)

  • 이종현/ 골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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