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0

2005.06.21

“왜 민간인 희생자만 챙기나”

4·3 특별법 후폭풍 … “희생 군인들도 적절한 예우 필요” 예비역들 군인연금법 개정 청원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6-16 15: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왜 민간인 희생자만 챙기나”
    추풍(秋風)에 대한 춘풍(春風)의 반격인가? 15대 국회 때인 2000년 1월 당시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 주도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 특별법)이 제정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던 보수세력이 드디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팃포탯(tit for tat, 맞받아치기) 전략을 들고 나왔다.

    이런 움직임의 최선봉에 선 사람은 재단법인 5·16민족상의 김재춘(78·육사 5기·예비역 소장) 이사장. 김 이사장은 대장부터 중령, 상사에 이르는 예비역 군인 159명의 서명을 받아 5월23일 김원기 국회의장 앞으로 ‘군인연금법을 개정해달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제출, 도전장을 내밀었다.

    군인연금법과 제주도 4·3사건(1948)이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김 이사장은 군인연금법 개정을 청원했을까.

    20년 넘게 군 복무를 하고 퇴역하면 군인연금법에 따라 연금을 받는다. 때문에 퇴역 군인에게 20년 이상 복무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군인연금법은 이에 대한 시비를 없애기 위해 제16조에 군인 복무기간 계산 원칙을 밝혀놓았다. 제 16조 9항에는 ‘복무기간 계산은 정부 수립의 연(年) 이전에 소급하지 못한다’는 단서가 달려 있다.

    복무기한 기산일 바꾸면 희생 군인도 혜택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1948년 8월15일. 따라서 일제강점기 때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군인이 된 사람은 독립군 활동 시절을 군인연금이 규정한 복무기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주도 4·3사건이란 무엇인가. ‘4·3 특별법’은 제2조 1항에서 이 사건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를 당시 상황을 중심으로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1946년 2월1일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등 29개 단체는 서울 종로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하고 도(道)별 민전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47년 2월25일 민전 제주도위원회는 3·1절 집회 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제주도 군정청(군정장관 스타우드 미 육군 소령)은 ‘행사는 제주 서(西)비행장에서 치르되, 시위 행렬은 금한다’는 조건으로 집회를 허가해준다. 그러나 민전은 3·1절 행사를 제주 읍내에서 치른 뒤 경찰서를 습격했고, 경찰은 발포로 맞서 민간인 네 명이 숨졌다.

    “왜 민간인 희생자만 챙기나”

    159명의 예비역 군인이 군인연금법 개정을 요구한 청원서.

    그 후 제주도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가 반복됐는데, 이듬해 2월26일 유엔은 가능한 지역(남한)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가결한다. 그리고 5월10일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 날짜로 확정되었다. 이러한 때인 4월3일 한라산 주요 고지에서 일제히 봉화가 오르며 인민해방군을 자칭하는 세력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했다(제주도 4·3사건).

    경찰력이 무너지자 미 군정청은 제주도 출신으로 구성돼 제주도에 주둔해 있던 국방경비대 9연대에 진압을 맡겼다. 그러나 9연대장 김모 중령은 제대로 진압을 하지 않아 곧 해임되고, 5월15일 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이 수원에 주둔해 있던 11연대를 이끌고 들어가 11연대와 9연대를 함께 지휘하며 진압 작전을 맡게 되었다.

    박 연대장은 적극적으로 진압 작전을 감행해 6월18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9연대에 속해 있던 남로당 프락치 문상길 대위가 박 대령을 저격해 절명케 했다(문 대위는 현장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 뒤 총살되었다).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4·3사건은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가 제주도로 출동하게 됐는데, 이날 아침 지창수 등 남로당 프락치의 선동으로 14연대 전체가 반란을 일으켰다(여순반란사건). 이 반란군은 토벌대에 밀려 지리산에 들어가 52년까지 빨치산 투쟁을 하다 소멸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킨 세력은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54년 가을에야 7년을 넘긴 투쟁을 종식했다. 대립 기간이 길었던 만큼 이들과 토벌대의 작전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49년 1월17일 일어난 북촌리 사건이다.

    99년 10월29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추미애 당시 의원은 “게릴라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하자, 격분한 군인들이 북촌마을 주민 300여명을 북촌국민학교에 모아놓고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 덕에 ‘4·3 특별법’은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고, 희생자를 위한 평화묘역 건립 등이 추진되었다. 이에 대해 김재춘 이사장은 이렇게 반격한다.

    “주민들이 모두 억울하게 희생됐다고 한다면 출동했던 군인들은 살인자라는 이야기가 된다. 미 군정청과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한 이들이 살인자라면 대한민국 정부는 살인자들의 괴수란 말인가? 4·3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 120명, 국방경비대 200여명, 제주도 우익인사 4200여명, 서북청년단 1300여명 등 5800여명이 희생되었다.”

    경찰 120명, 국방경비대 200여명 희생

    4·3사건은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기에 양쪽이 맞서기 시작하면 끝없는 감정싸움이 이어진다. 김 이사장은 이를 의식하고 있기에 군인연금법 개정 카드를 내밀었다.

    대한민국 육군과 해군은 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9월5일 발족했다(공군은 1년 늦은 49년 10월1일 육군 항공사령부가 독립해 공군이 되었다). 그러나 ‘없었던’ 육·해군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왜 민간인 희생자만 챙기나”

    2003년 9월 남제주군에서 이루어진 4·3사건 희생자 유골 발굴 작업.

    육군은 1946년 2월7일 만들어진 국방경비대(조선경찰예비대)가, 해군은 46년 6월15일 창설된 해안경비대가 이날 육·해군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인 45년 11월13일, 미 군정청은 육군부와 해군부, 경무국(경찰)을 거느린 국방사령부를 만들었다(때문에 일각에서는 한국군 건군일을 1945년 11월13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주도 4·3사건은 미 군정기에 발생했기 때문에 국방경비대가 출동해 진압했다. 이때 수많은 군인이 희생되었지만 정부 수립 이전이라 이들의 죽음은 전사로 인정받지 못했고, 국립묘지에도 안장되지 못했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이때의 복무기간을 군인연금 수혜기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 수립 후 한국 정부는 바로 육·해군을 통수하게 되었을까. 역사적인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김 이사장의 주장이다. 그는 그 근거로 정부 수립 직전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주고받은 각서를 제시한다. 이 각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월15일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비로소 한국 정부에 한국군 통수권을 넘겼다.

    여기서 김 이사장은 “정부 수립 후에도 한국군은 한참 동안 미군 관할 아래 있었다. 그럼에도 군인연금법은 48년 이후를 한국군으로 인정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 “국방·해안경비대는 편제 그대로 육·해군이 되었으므로 군인연금법 적용 기점은 국방사령부가 설치된 45년 11월13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이사장은 “4·3사건은 5·10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려는 데 반대해서 일어난 것이다. 반면 군은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기 위해 출동했다. 그런데 군인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제주도에서 희생된 민간인만 예우를 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김 이사장은 4·3사건 의미를 바로잡기 위해 군인연금법 개정을 청원했다. 그가 일으킨 군인연금법 개정 청원은 ‘추풍’에 휘말려 얼어붙었던 국회를 녹이는 ‘춘풍’이 될 것인가.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