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1

2005.04.19

쫄딱 망하고 쉬쉬 … ‘차이나 드림’은 없다

‘기회의 땅’ 중국서 성공하기 갈수록 어려워 … 기술없는 소규모 자영업자 대부분 생계 걱정

  • 중국 베이징, 칭다오=글·사진/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5-04-15 10:4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쫄딱 망하고 쉬쉬 …  ‘차이나 드림’은 없다
    지난해 3월25일, 중국 거주 한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소모(62·인천 거주) 씨가 선양(瀋陽) 주재 한국총영사관 13층 민원실에서 투신자살한 것이다. 소 씨가 선양 총영사관을 찾은 이유는 인천에서 중국 다롄(大連)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5000달러가 든 가방을 잃어버렸기 때문. 1992년부터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번번이 실패한 소 씨는 식당이라도 운영하기 위해 한국의 지인들에게서 어렵게 돈을 마련해 중국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정은 절박했지만, 영사관 측은 “단둥(丹東) 한인회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응대한 것이 전부였다.

    중국 거주 일부 한인들의 절박한 실상이 알려지게 된 계기를 제공한 당시 사건은 ‘차이나 드림’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소 씨는 실패한 중국 거주 한인의 전형이었다. 이미 아내와 이혼한 상태로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홀로 중국에서 비참한 생활을 감내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개인사업을 해본 이라면 그가 어떻게 사업에서 몰락했는지, 그리고 온갖 모욕을 참아내고 끌어온 최후의 종자돈 600만원을 잃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베이징에 사는 사업가 A 씨는 “너무도 뻔한 스토리”라며 한숨지었다. A 씨는 이어 “내 주변 사람들도 자살만 안 했지 실상은 소 씨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나라도 중국에서 죽을지언정 절대로 한국으로는 못 돌아가지…, 그가 원한 것은 한국행 배편이 결코 아니었어.”

    “애당초 중국에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중국에서 실패한 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인 양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멋모르고 중국에 와서 쫄딱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이역 땅에서 ‘나 망했소’라고 떠들어댈 정신 나간 사람은 없다”는 게 거절 이유였다. 게다가 이들이 내린 결론만큼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천편일률적이었다. “애당초 중국에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그래도 정 오고 싶다면 제대로 준비해서 오고 선배들의 충고일랑 무시하지 마시라….”



    중국과 수교한 지 벌써 13년째. 한국인들이 ‘기회의 땅’ 중국으로 본격적으로 몰려가기 시작한 지도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지난해 중국을 방문한 인원만 약 288만명. 미국 서부개척 시대의 골드러시(gold rush)를 방불케 할 정도로 우리의 ‘중국 짝사랑’은 이미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삼성·LG 같은 대기업에서부터 지방의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통닭집을 운영하는 평범한 김모 씨까지도 한번쯤 중국 열병을 앓았을 정도다.

    지금까지 집계된 대(對)중국 투자액만 260억 달러(약 30조원, 현지 재투자분 포함). 무려 3만여 한국인 사업체가 중국에 진출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각종 언론에서 한국인들의 중국 진출이 꽤 성공적이었다는 기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 이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베이징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채모(39) 씨는 기자에게 충격적인 통계치를 제시했다.

    “베이징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60%가 집세 걱정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중 수백명가량이 우리로 따지면 극빈층으로 밥을 얻어먹고 사는 수준이죠. 그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계속 중국으로 몰려 들어와 당혹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 몰락한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우선 그들이 재중 한국인 사회에서 도태된 상태여서 움직임을 확인하기 힘든 데다, 나름대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왕징 할아버지’를 만나면 그들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왕징(望京)은 베이징 중심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서울로 치면 송파구 정도에 해당하는 신흥 아파트 단지로 4만명에 이르는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베이징 최대의 코리아 타운이다. 왕징 할아버지를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왕징의 한 공원에서 한인들과 조선족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미 60세를 넘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이 통하는 조선족들을 한국인 가정에 소개하는 인력 소개업이 전부였다.

    “왜 망했는지 알아. 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기회의 땅이겠어. 당신 눈에는 여기서 희망이 보여? 13억 인구를 만나 무얼 어떻게 하겠다고, … 다 허상이야. 중국에서 사업에 실패해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을 ‘신조선족’이라잖아. 내가 바로 그런 처지에 있어.”

    그는 중국에서 철저하게 패배했다. 해외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하다 90년대 중국과 인연을 맺고, 한때는 화려한 중국 생활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기운 사업은 그를 이산가족으로 만들었고, 결국 중국에 홀로 남게 했다. 그는 여권도 잃고 이름도 잃고, ‘왕징 할아버지’란 이름으로 베이징 한쪽에서 숙식을 걱정하며 여생을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쫄딱 망하고 쉬쉬 …  ‘차이나 드림’은 없다

    베이징 내 조선족들의 밀집지역인 가오리춘(高麗村)의 풍경. 집값이 매우 싸 한동안 실패한 한국인들의 거처로 활용됐으며, 현재 점진적으로 철거되고 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어. 중국으로 오지 말라는 거야. 중국은 거대한 늪 같은 곳이야. 한번 발을 잘못 내딛으면 나같이 돼….”

    비교적 젊은 사업가인 문모(36) 씨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차이나 드림’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2001년 인쇄업체의 주재원으로 중국 생활을 시작한 문 씨는 다음해 국내 복귀 발령이 나자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중국에서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5000만원으로 시작한 봉제공장은 그런대로 운영됐지만, 경쟁 업체들이 난립하면서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했다. 연이어 시작한 가발공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자금을 날린 것은 물론 순식간에 빚쟁이로 몰렸지요. 어떻게 망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이었어요. 한 달간 집 앞을 지키고 선 사채업자들 때문에 자살까지 결심했지만, 죽어도 한국으로는 못 가겠더군요.”

    알량한(?)‘자존심’과 ‘빈털터리’로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오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에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중국 사채업자들은 제 뒷조사를 해보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포기하더군요. 적어도 여기는 신용불량자 딱지는 없으니까 다시 시작해볼 용기라도 생기는 거죠.”

    한동안 은둔생활을 하던 문 씨에게 찾아온 유혹은 여권을 사겠다는 것과 위장결혼 제의였다. 지금은 값이 많이 떨어졌지만, 한때 한국 여권은 중국에서 3만~4만 위안(400만~500만원)이란 거금에 거래됐고, 조선족과의 위장결혼 또한 여자 쪽 가족이 한국으로 들어갈 자격이 생기기 때문에 4만 위안이 넘는 대가가 제시됐다. 물론 문 씨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현재는 조그만 식품유통업으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가 됐으며, 곧 한족(漢族) 여인과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다.

    “중국에서 1단계 성공이라면 한국에 손 안 벌리고 먹고사는 수준을 유지하는 거예요. 지금 이 정도라도 정말 감사한 거죠.”

    중국에 장기 거주한 사람들 가운데는 한 번쯤 투자금을 모두 날리고 간신히 재기에 성공한 경우가 많다.

    일부 주재원 출신들은 사업에 실패할 경우 전문적인 브로커로 나서기도 한다. 교회나 사교모임 등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인맥을 넓혀 중국에 발을 내딛는 신참 한국인들을 상대로 중국 세일즈에 나서는 것이다.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 투자자를 모집해오는 일도 허다하다. 중국에서는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자신들도 언제 저런 처지가 될지 몰라 모른 체할 뿐이다. 이런 탓에 “조선족보다 오히려 한국인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여기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쫄딱 망하고 쉬쉬 …  ‘차이나 드림’은 없다

    중국인과 조선족, 그리고 한국인들이 뒤섞여 있는 왕징(望京) 인근의 거리 풍경.

    “내 주위에는 54번이나 명함을 바꾼 사람이 있어요. 휴대전화 번호야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중국에 장기 체류하는 한국인들은 극단적으로 말해 누구나 브로커이자,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베이징 한국인단체의 B 사무국장)

    중국에서 소규모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로는 대개 비슷하다. 중국 진출 기업 주재원으로 일하다가 한국으로 발령이 나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중국에 눌러앉아 개인 사업에 나서는 식이다. 보통 자신의 중국 내 인맥을 이용해 납품처를 확보하고 제조 공장을 시작한다.

    그러나 회사에서 모든 생활비가 지원되는 ‘주재원’의 호사스러운 생활과 달리 중국에서 개인 사업자들이 겪어야 하는 사업상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복잡한 세법, 관료들에게 바쳐야 하는 갖가지 ‘준조세’, 중국인 도매업체들과의 불협화음 등이 기다리고 있다.

    “대기업조차 중국에서 성공한 예가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중국 내 비즈니스 환경이 급변해왔고, 공장 설립에서 노무관리까지 모든 일이 한국처럼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죠. 하물며 중대나 소대급, 특히 혈혈단신으로 성공한 사례는 환치기나 밀수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베이징 한 한의원 원장)

    실패한 사람이 늘어나고, 한국에서 밀려든 불법 체류자들이 증가하면서 온갖 불법적인 사업 행태도 난무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위조문서, 밀수, 환치기, 마약 등이 조선족의 일로 치부됐지만, 지금은 한국인들이 끼여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2003년경까지 베이징에는 가난한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쪽방촌이 있었다. 베이징 3환(세 번째 순환도로) 한국 영사관 인근 따퉁빌딩 근처의 후미진 주택가인 가오리춘(高麗村)이 바로 그곳이다. 조선족 사업가들이 세운 이 동네는 동북 3성에서 내려온 가난한 조선족들이 밀집해 살았고, 사창가로 활용되기도 했다. 빛이 들어오는 방은 한 달에 500위안(약 7만원), 반지하는 300위안, 그 이하는 150위안 수준이다. 공동 화장실에 난방시설은 물론 없다. 이곳에 중국 진출 뒤 망한 한국인들이 조선족과 섞여 살았으나 살인 등 강력사건이 빈발하자 중국 당국이 철거를 시작했고, 거주자들은 왕징 인근의 아파트 지하로 대부분 이주했다.

    지하 쪽방은 예상대로 더럽고 불결했다. 왕징 인근의 한 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는 한 한국인은 자신이 운영하던 술집을 몇 년 전 조선족 조폭에게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소연했다.

    “장사가 되는 한국인 술집에 조선족 깡패들이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고 보호비 명목으로 뜯어간 돈이 한두 푼이 아닙니다. 가게를 내주지 않으면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니까요.”

    중국에서 술집이나 식당을 하려면 이런 고충이 뒤따른다는 것은 상식이 됐다. 한국인들이 처음 투자했던 베이징 내 주요 찜질방이나 룸살롱, 가라오케 등은 거의 대부분 주인이 조선족으로 바뀌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상자 기사 참조).

    이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은 큰돈을 벌기는커녕 생계를 걱정하고 있을 정도다. 한두 번 제조업에서 실패한 이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는 탓에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한국인을 상대로 한 식음료업으로 투자처를 옮기게 마련이다. 문제는 주류나 요식업이 중국에서도 가장 힘든 사업이다라는 점이다. 특히 2003년 중국의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발발 이후 규제가 대폭 강화됐고, 그만큼 준조세도 폭증했다. 규제가 강한 만큼 편법이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영세상인들의 사정을 악화시켰고, 한국식 ‘권리금’까지 보편화되는 등 한국인들끼리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쫄딱 망하고 쉬쉬 …  ‘차이나 드림’은 없다

    왕징은 한국인이 4만명 이상 거주하는 최대의 코리아 타운이다. 최근 한국인 불법 체류자가 급증하자 중국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국 공안 당국이 내건 한국어 경고문(작은 사진).

    “완전히 제살 깎아먹기식입니다. 서로 못 죽여서 안달입니다. 하나같이 고깃집 하고 술집 하고…. 한국인끼리 서로 장사하려다가 함께 몰락해가는 거죠.”

    규제가 까다로운 만큼 이를 꽈ㄴ시(關係·인맥)로 풀어보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를 노리고 중국인과 안면을 틔워주겠다는 전문 브로커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중국인 관리들에게 술과 밥을 사는 등 야단법석을 떨어도 정작 어려움이 닥치면 도와줄 중국인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숨 섞인 푸념들을 내뱉는다.

    “추운 겨울 난방시설 없는 방에서 동사했다는 사람부터 우울증으로 투신자살했다는 기업인까지, 확인되지 않는 얘기도 많이 나돌아 뒤숭숭하지요.”(왕징 한인교회 C목사)

    중국 주요 도시의 한인촌에는 한인교회에서 식사를 제공받고, 볕이 들지 않는 쪽방에서 하루하루의 생계를 고민하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 중국 당국 역시 한국인 부랑자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했지만, 뚜렷한 해법이 있을 리 없다. 오히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이들 한국인 불법 체류자를 대대적으로 추방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국행을 거부하는 이들로 인해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체류자 문제가 중국에서도 한국인들에 의해 불거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한때 사업을 함께했던 중국인으로부터 방값을 지원받는 처지로 전락한 최모(42) 씨는 “중국에 한류(韓流)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지만, 있다 해도 밥을 먹여주는 것이 아니다”고 절규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굶지 않고, 한 건만 성공하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엿보인다”고 말하는 등 이중성을 내비친다. 이들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며 오늘도 힘겨운 하루살이를 계속하고 있지만, 그날이 언제일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