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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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와 발자취 … 여산부사 김원식 아픈 사연도

  • 글·사진=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장 hwangtoh@paran.com

    입력2005-03-17 1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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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신라 헌강왕 7년 혜감 대사가 창건한 여산 문수사.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던 시대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더불어 살고 모두가 차별 없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 자락 미륵사지를 지나며 미륵의 세상을 떠올려본다. 현세가 얼마나 고달팠으면 이 땅의 민중은 오로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미륵신앙의 근본 경전)’에 나오는 미륵의 세상만을 꿈꾸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 세상에는 계두성(鷄頭城)이라는 커다란 도시가 생길 것이다. 동서의 길이는 12유순(由旬·1유순은 40리 정도)이고 남북은 7유순인데, 그 나라는 땅이 기름지고 풍족하여 많은 인구와 높은 문명으로 거리가 번성할 것이다. … 또 그때는 논에 모를 심지 않아도 저절로 쌀이 생겨 나오는데, 껍질이 없고 향기로워서 먹은 뒤에 병들어 고생하는 일이 없느니라. 그리고 이른바 진귀한 보물이라고 하던 금·은이며 차거(車渠), 마노(瑪瑙), 진주, 호박이 길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주워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니라. 옛날에 사람들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서로 싸우고 죽이며 잡혀가고 옥에 갇히고 무수한 고통이 있었는데 이제는 부귀가 쓸모없는 돌 조각과 같아서 아끼고 탐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더라.

    그러나 그로부터 1500년이 흐른 지금도 미륵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미륵하생경에서 이르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는 언제를 가리키는 것일까.

    세상은 여전한데, 금마면의 2차선 길은 변화의 물결을 타고 어느새 4차선으로 변했다. 신작로를 따라가니 여산면이 지척이다. ‘쑥대머리 귀신형용’을 나직하게 읊조리며 판소리 ‘춘향가’의 한 가락을 떠올렸다. 이 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며 서리, 역졸들에게 “너희들은 예서 떠나 전라도 초입인 여산읍에서 기다리라”고 명했던 바로 그 여산이 이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지역의 풍속은 검소함을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쓴다”고 한다.



    한가하고 여유 있던 고장 … 과거 흔적은 여산동헌이 전부

    조선 초기의 문신인 윤향은 여산 객관의 동북쪽에 있던 세심당(洗心堂)이라는 누각에 들렀다가 ‘늦은 아침에도 밤비는 완전히 개지 않았는데 연한 풀 새로 핀 꽃은 한 뜰에 가득하구나. 오직 담 동쪽에 서 있는 몇 그루의 대나무는 영롱하게 지난해의 푸른 빛 변치 않았네’라는 시를 남겼다.

    경국대전 등의 편찬에 참여한 조선 전기의 명문장가 성임도 여산을 두고 “서 있는 대나무는 천 그루의 낚싯대요, 꽃은 백일의 붉은 것일세. 송사가 한가하니 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시대가 태평하니 고을에는 성이 없다. 멀리 뵈는 나무는 연기 속에 아득한데, 기우는 햇빛은 비 뒤에 더욱 밝구나. 어지럽게 솟은 산 창칼을 비껴 세운 듯한데, 새 차를 연에 갈아내는도다”라고 했다. 한가하고 여유 있던 여산의 옛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하지만 오늘날 여산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여산동헌 정도가 전부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여산 송씨 묘소(왼쪽)와 묘 앞에 서 있는 문인석.

    진남루가 있었다는 문루정 터와 동헌 터, 양재역 터와 연방죽리에 있던 옥 터 등은 이제 지명으로만 남았고, 장수가 오줌을 눈 뒤 골이 졌다는 시시내골이나 왕비가 태어났다는 왕비안골도 그저 이름만 있다.

    조선시대 신구 전라관찰사들이 교대를 하던 곳인 황화정(皇華亭)도 여산면에서 북쪽으로 11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황화슈퍼, 황화우체국 등의 간판을 통해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여산면에서 찾아갈 만한 곳은 역사 유적지보다 시조문학의 최고봉 가람 이병기 선생(1891~1968)의 생가다. 가람은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태어났는데,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1913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편을 잡으면서 국어국문학과 국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다. 시조를 짓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해방 뒤 전북대, 중앙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스스로 술과 제자, 화초 복이 있다고 자랑했다는 가람은 한중록, 춘향전 등을 발굴하고 시조문학을 활짝 꽃피워낸 우리 국문학계의 거두다.

    그를 기리는 시비가 전북 전주시 다가공원에 세워져 있고, 여산 남초등학교 교정에도 우리가 즐겨 부르는 시조 ‘별’을 새긴 시비도 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은 또한 어느 게요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가람의 고향집 뒤편으로 보이는 두 개의 봉우리는 천호산이다. 천일사, 백운사, 백련암 등 몇 개의 절을 가리키는 팻말들을 지나면 여산 송씨의 재실이 있고, 소나무 숲 우거진 길을 지나면 발걸음은 자연스레 문수사에 이른다.

    호남 지역 유일 석회동굴 천호산 ‘천호동굴’ 유명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생가.(왼쪽) 여산 송씨 재실.

    천호산에는 호남 지역에 하나뿐인 석회동굴인 천연기념물 제177호 천호동굴도 있고, 산정에서 태성리 계곡 쪽에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전투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석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투구를 비롯해 여러 점의 전투 유물들이 발견됐으며, 그것들은 부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하지만 여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전투 흔적은 1894년 일어났던 동학의 자취. 전북 삼례에서 2차로 일어난 농민군들이 이곳으로 몰려오자 여산부사 김원식은 기꺼이 농민군에 합류했고, 총참모가 되었다. 그러나 모호한 태도를 보인 끝에 정부군의 첩자로 몰려 역시 유생 출신인 이유상에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 시절의 가슴 아픈 사연도 이제는 모두 묻혀버렸다.

    그 옛날, 여산부사의 호령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을 여산동헌에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되돌리고자 세웠던 척화비와 여산을 거쳐간 관리들의 비석 몇 개만 서 있을 뿐이고, 관아가 서 있던 곳은 여산초등학교로 변했다.

    그렇다. 만물이 가고 오는 우주의 섭리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겸허하게 고개 끄덕이는 일일 뿐인 것을. 우리가 꿈꾸는 미륵의 세상은 언제나 오려는가.

    ● 가볼 만한 곳

    미륵사지와 왕궁리 오층탑,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쌍릉 등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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