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6

2005.03.15

‘독도 문제’ 日 잔꾀에 말리지 말라

한일협정 때 ‘다툼 있으면 중재로 해결’ 채택 … 맞대응은 일본 원하는 대로 되는 셈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3-10 09: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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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 문제’ 日 잔꾀에 말리지 말라

    독도에 건설된 한국 땅임을 밝히는 수많은 표석들. 독도는 영유권 다툼 없이 한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되로 주면 말로 받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은 과거 진실을 규명해서 진심으로 사과 반성하고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한 연후에 화해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배상 문제를 처음 거론하며 동시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초강수로 대응하는 면모를 보였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강수에 대해 일각에서는 “속시원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97년 외환위기를 떠올리며 “불안하다”는 사람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지금처럼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했는데, 일본의 은행들이 이 발언을 이유로 태국발 외환위기가 북상할 때 한국의 은행에 빌려준 자금에 대해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아 한국이 외환위기에 빠졌다는 분석도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발언 직후 일본의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는 “한국 국내 정치를 의식한 발언인 것 같다”고 논평했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은 지난해 8월 제주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임기 중에 역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한 것을 지적하며 야스쿠니(靖國) 신사참배를 강행해온 고이즈미 총리의 역사 인식에 대한 불만이 작용한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미군 오폭사건 후 독도 중요성 인식

    돌이켜보면 한일관계는 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小淵惠三) 총리가 신(新)한일관계 파트너십을 선언한 이래 2002년 한일 월드컵과 일본에 몰아닥친 한류(韓流) 열풍, 그리고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선포에 이르기까지 전례 없이 순항해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003년 6월 일본을 국빈 방문한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멈추지 않았고, 한국은 법원 판결을 근거로, 두 나라가 공개하지 않기로 했던 한일협정의 다섯 개 부문 중 하나인 청구권 부문을 공개하였다(1월17일). 그리고 시마네현 의회는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겠다”는 의지를 굳힘으로써 한일관계는 크게 출렁이고 있다.

    격랑을 맞고 있는 한일관계는 어디로 갈 것인가. 먼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한국과 일본 시각을 반영해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많은 국민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시기에는 독도가 확실히 우리 것이었으나 그 후 불안해졌다고 믿고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독도 문제’ 日 잔꾀에 말리지 말라

    1948년 6월8일 미군 B-29기의 독도 폭격을 증언하는 녹슨 폭탄 피.

    지금 독도에는 경북지방경찰청 울릉경비대 산하 전경 한 개 소대(40여명)와 해양수산부 소속 등대 관리인 3인이 상주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만 해도 독도는 여름 한철 미역이나 전복을 따러 상륙하는 어민을 제외하곤 항상 무인도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 독도 영유권은 훨씬 불안정했던 것이다.

    한국은 해방 직후부터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행사한 중요 행사로는 미군정 시기인 47년 8월, 홍종인씨가 이끄는 조선산악회 회원과 미군정 아래 한국과도정부 소속 울릉도·독도 조사대의 신석호 이봉수씨가 조선해안경비대(해군의 전신) 소속의 ‘대전환(大田丸)’을 타고 독도에 들어가 조사를 하고 조선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 명의로 푯말을 세운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군정을 펼쳤던 미군은 독도를 도쿄와 서울을 잇는 항로상의 해상 표지 정도로만 이해했다. 이것이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왔다. 원자폭탄 투하로 유명해진 미군의 B-29 폭격기 9대가 48년 6월8일 오키나와를 이륙한 다음 독도 상공으로 날아와 폭격을 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영유권 다툼을 제대로 알 리 없는 미군은 독도를 사람이 살지 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로 보고 해상 폭격연습을 한 것.

    이날 독도 인근에는 강원도와 울릉도에서 나온 어선 100여 척이 조업을 하고 있었고, 이중 11척에서 30여명의 어민이 독도에 상륙해 미역 등을 따고 있었고,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폭격이 시작됐으니 온 섬이 피 칠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폭격으로 상륙한 어민 중 14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었으며 어선 11척이 침몰했다. 이 사건은 발생 일주일이 지난 6월14일 미국의 UP 통신 등이 보도함으로써 비로소 미국과 국제 사회에 알려졌다.

    그제야 미군은 조사에 나서 ‘폭격 연습 30분 전 정찰기가 독도를 살펴봤는데 그때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B-29는 2만3000피트(약 6.9km)라는 높은 고도에서 폭격했기 때문에 선박이나 사람을 볼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 언론이 “왜 우리 영토를 마음대로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느냐”고 맹공을 퍼붓자, 16일 군정사령관인 하지 중장은 사과와 배상, 진상 조사 등을 약속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의용수비대 결성, 日 순시함 공격하기도



    B-29 조종사 등은 군법회의에 소환됐으나, 그가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군은 희생자들에게 소 한 마리 값에 해당하는 돈을 보상금으로 지불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미군 B-29의 독도 폭격은 미군의 한국인 경시를 드러낸 사건인데, 이 사건을 통해 한국은 독도 영유권의 중요성에 눈뜨게 됐다. 어민들의 어장 정도로만 이해되던 독도가 그때부터는 절대로 타국에 넘겨줄 수 없는 주권 문제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독도 문제’ 日 잔꾀에 말리지 말라
    그 후 6·25전쟁이 일어나 한국은 독도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다만 51년 6월 경상북도 지사가 48년의 미군기 폭격으로 희생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해 독도에 ‘조난어민위령비’만 세웠는데 이것이 전쟁 중 한국 정부가 독도에 관심을 기울인 전부였다. 일본이 독도를 넘보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을 끝낸(1952년) 이후부터였다.

    일본은 러일전쟁 기간인 1905년 1월28일 ‘독도가 주인 없는 땅이라 일본 영토로 편입한다’는 내각 결정을 내리고, 이어 시마네현 고지 제40호를 통해 이를 공표했다(2월22일).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패주한 러시아 함대의 이동을 감시한다는 이유로 그해 8월19일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일본 해군 6명을 상주시켰다.

    일제를 패망시키고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46년 1월29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 시행을 위해 일본 정부에 보낸 각서’라는 제목을 붙인 제677호 훈령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 거문도 등을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때문에 미군정이 계속된 52년까지 일본은 독도에 얼씬하지도 않았다.

    일본은 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조약이 조인되고 52년 4월28일 이 조약이 발효됨으로써 미군정을 끝냈는데, 그 직후인 52년 5월28일, 시마네현 어업시험장 소속 시험선인 ‘시마네마루(島根丸)’가 독도 근처의 우리 영해를 처음 침범하고, 한 달 후인 6월25일에는 일본 수산시험선을 타고 온 9명이 독도에 들어와 ‘시마네켄… 다케시마’라고 쓴 나무 푯말을 박아놓고 돌아갔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항의 각서를 보내며 외교 문제화했으나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진 못했다. 그리고 6·25전쟁이 끝난 53년 10월15일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독도에 들어가 이 푯말을 뽑고 한글로 쓴 표석을 세웠다.

    그러나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들어가기 전에 홍순칠씨를 비롯해 독도에서 조업해온 울릉도 주민 33명이 부산의 암시장에서 박격포와 기관총 각 1문과 M1 소총 20정을 구입해 무장한 다음 독도의용수비대를 만들어 자발적으로 독도 경비에 나섰다.

    의용수비대는 그해 8월24일 일본 해상보안청(한국 해경과 같음) 소속 순시함 오키마루(隱岐丸)가 독도로 접근해오는 것을 보고 발포해 쫓아냈다. 의용수비대는 주로 배를 타고 활동했기 때문에 독도에 박혀 있는 시마네켄 푯말을 뽑아내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용수비대는 56년 12월31일 독도 경비를 경찰에 인계하고 철수했는데, 그날 이후 지금까지 독도 경비는 경찰이 전담해오고 있다(실효 지배).

    그 후 독도가 한일 간에 큰 다툼이 됐던 것은 국가 개발 자금을 필요로 했던 박정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한일국교 정상화 협상을 적극 추진했을 때였다. 박정희 정부가 협상에 열의를 보이자 일본은 즉각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한일협정은 크게 기본 관계, (일제 때 일본이 빼앗아간) 한국 문화재 반환, (이승만 대통령 때 선포한 평화선으로 인해 발생한) 어업 문제, 재일동포 법적 지위(영주권을 주는 것), 대일청구권 문제 등 다섯 개 분야로 나눠 진행되었다.

    ‘다툼 없으면’ 독도 실효 지배 ‘이상무’

    독도 영유권 문제는 바로 양국 기본 관계를 정하는 회담에서 거론됐는데, 양측이 똑같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만큼 결말이 날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이 내놓은 최종안은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독도 영유권 문제를 확정짓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은 독도를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 “양국 간에 다툼이 생기면 이를 중재로 해결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이 싸움에서 채택된 것은 한국 안이었다. 한국이 이긴 것이다. 따라서 독도 영유권을 놓고 한일 양국 간에 다툼이 일어나면, 양국은 국제사법재판소 또는 여타 국가나 기관의 중재를 받아 이를 중재해야 한다. 여기서 한국 정부가 시종일관 주목하는 것은 ‘다툼이 있으면’이라는 단서 조항이다.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양국이 다툼을 벌이면 중재로 풀어야겠지만, 다툼이 없으면 중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박정희 정권 이후 한국 정부의 일관된 태도다. 한국은 독도가 한국이 실효 지배한 영토로서 주변국(일본)과 전혀 다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중재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견지해온 것.

    한국 사회 일각에서는 일본의 집요한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말려 독도에 해병대를 파견하라고 외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국가 간에 생긴 다툼이 풀리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전쟁으로 해결하는데, 전쟁을 하려면 군사력을 동원해야 한다. 따라서 독도에 해병대를 파견하면 곧 독도 영유권을 놓고 일본과 다툼이고 있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 돼, 한국은 일본이 원하는 대로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국제기구나 다른 나라의 중재를 받아야 한다.

    평화 시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경찰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독도에 경찰이 상주해 경비하면 독도는 전혀 다툼이 없는 것이 되므로 한국 정부의 선택은 매우 현명한 것이 된다. 반대로 일본은 독도를 자꾸 분쟁 지역으로 만들어야 유리하므로, 시마네현 의회나 주일대사 등이 나서서 돌아가며 영유권 주장을 하는 것이다.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인 박춘호 전 고려대 교수는 “인도에 ‘북소리 듣고 냅다 뛰지 말고 북을 친 것이 누구인지부터 보라’는 속담이 있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기 위해 자꾸 영유권 주장을 하는 것인데, 한국은 그 속도 모르고 무조건 감정부터 드러낸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할 때마다 발끈하는 사람이야말로 일본의 꾀에 속아 넘어가 독도를 내주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는 독도 문제뿐만 아니라 어업 문제에서도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 평화선 선포 이후 한국은 많은 일본 어선을 나포해(320여척) 절반 정도를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당시 일본 어선은 한국 어선에 비해 성능이 좋았으므로 한국은 내심 이를 갖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 배를 돌려주지 않아야 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을 일본이 인정한 것이 되므로 배를 돌려주지 않겠다고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킨 것이다.

    그러나 청구권 부문에서는 승리하지 못했다. 일본은 청구권 자금을 대한(對韓)경제협력기금으로 불렀는데 무상 3억, 유상 2억 달러를 한국에 지원하며 개인과 국가를 막론하고 모든 채무 관계를 타결한 것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은 ‘이 협상을 하는 시점에서 인지하지 못한 것은 이번 배상에서 제외한다’는 단서를 달려고 했으나 결국 일본안을 수용했다.

    개인 배상 책임 한국 정부냐, 일본 정부냐

    그런데 지금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반일감정이 매우 강했으므로 일제에 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던 사람 중 일부는 ‘그 사실 자체가 부끄러워’ 신고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 정부를 통해 일본 측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그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배상받지 못한 사람들이 ‘내 몫’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푸는 것이 좋은가. 박 교수 등 국제법을 전공한 학자들은 “조약대로라면 한국은 정부가 이들에게 배상을 해주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일본은 한국인에 대해)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해야 한다”고 한 노 대통령과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박 교수 등은 이렇게 말했다.

    ‘독도 문제’ 日 잔꾀에 말리지 말라
    “어쨌든 한국은 개인에게 가야 할 배상금을 국가가 사용해 경제성장을 했다. 또 76년 경제기획원이 내놓은 대일청구권 백서에서 우리 정부는 개인 미수금까지 모두 받아왔다고 밝힌 바 있으므로 더 이상 일본에 배상금을 달라고 요구하기 힘들 것이다. 국가적 자존심도 있으니 이제는 우리 정부가 당시 배상을 받지 못한 국민들에게 배상해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작성에 관여한 한 관계자는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 참배를 계속하고 일본 조야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 한번 해볼 테면 해보자는 뜻에서 그러한 연설문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예전처럼 한 차례 들끓었다 사그라들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개인 배상 문제는 일본이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면 우리 정부도 나서서 해결해보겠다는 뜻을 슬쩍 비친 것이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노 대통령이 국제조약 파기를 거론했다면서 성토하는 분위기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항상 커뮤니케이션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양국은 국내 문제와 연관지어 양국 관계를 진전시킨다. 그래서 한일 관계는 남북한 관계, 한미 관계만큼이나 빠르게 핑퐁이 오가는 게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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