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4

2005.03.01

탐욕과 위선의 사생아 ‘X파일’

  • 입력2005-02-24 1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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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과 위선의 사생아 ‘X파일’
    스포츠 신문에 수상한 연예계 뉴스가 날 때면 나에게 전화를 걸어 ‘A양의 정체’를 확인하려 드는 지인들이 꽤 된다. 물론 나는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방송 관계자도 아니다. 그저 소싯적부터 이런저런 경로로 즐겨왔던 가십이 만만치 않은 내공으로 쌓이게 된 만화가일 뿐이다. 점잖치 못한 취미라며 타박을 듣는 경우가 왕왕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밥 먹고 그렇게 할 일이 없냐”는 잔소리에 대항할 대답 역시 준비해둔 터다.

    “한국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위험)가 어디서 기인한다고 생각해?” 나의 변명은 출발부터 거창하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도덕적 문제라면 ‘문란’이 아니라 ‘혼란’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갖은 욕망을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지배적인 이념으로 행세하는 것은 고색창연한 유교적 가족주의가 아닌가. ‘유교주의와 자본주의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 형태’가 한국 사회라는 평가도 있지만, 일상에서 목도하게 되는 양상은 공존이 아니라 충돌이다.

    나는 연예인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유교적 가족주의가 혼재하는 가장 분열적인 지점에 위치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몸이라는 자본을 밑천으로 하여 돈과 성의 네트워크를 통과하면서 가족주의 제도 안에서 마지막 권력을 보장받는 직업군. 예의 “키스도 못 해봤다”는 연예인들의 건전한(?) 제스처는 그 영향권 안의 대중에게 사회의 다른 얼굴을 은폐하려는 기만적인 시도로 보이는 것이다.

    가십 속에 떠도는 돈과 성의 담론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질서를 닮았다고 나는 주장한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마돈나 같은 엔터테이너가 살아남을 수 없는 거지? 이중적인 잣대의 규범이 아니라면 건강한 가치관이나 다양성이 정립되기가 좀더 쉬울 텐데 말야. 연예계 가십을 나누다 보면 사회의 두 얼굴이 어느새 가깝게 다가서는 걸 느끼게 되거든.” 내 장황한 궤변의 마무리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인터넷 답글 달기로 대표되는, 연예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관심은 문화가 아닌 저열한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사건과 진실’의 이야기가 이제는 너무 뻔해 지겨운 참이기도 하다. 그 다음 순서가 자기 정보 보호권에 대한 자각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X파일’ 소동을 통해 그들의 가십을 소비해왔던 스스로의 방식을 겨우 반성하게 된 것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미지를 팔아 억대의 광고료를 받는 ‘공인’인 만큼 구설에 시달리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잔인한 심리도 없지 않다. 다만 역지사지, 즉 나 자신의 X파일을 구성해보거나 타인에 의해 작성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내가 살고 있는 원룸의 주인 부부가 세입자 관리를 위한 정보를 몰래 취합해 인근 건물주들에게 유포한다면 내 X파일의 일부는 꼼짝없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자기관리: 자동이체를 하지 않아 전기세, 수도세가 자주 밀림(↓). 청소를 안 하고 사는 듯함.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결해 보일 때도 있어요.”(↓)

    -소문: 직업이 의심스러움. 외출하는 시간이 일정치 않으며 자주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함. “이해할 수 없는 색깔로 머리를 염색하거나 애들 별명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데는 나름의 어두운 이유가 있겠죠.”

    아,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개인정보가 공적 공간에서 힘을 발휘하는 상황은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고민부터 공동체 윤리로서 교육되고 공유되지 않는 이상, 탐욕과 위선의 시대에 저항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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