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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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의 거울에 비친 시대 모순

소인-대인국 통해 익숙한 것 낯설게 보기 … 불쾌한 어른들 아이 위한 동화로 폄훼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5-02-24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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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자의 거울에 비친 시대 모순

    소인국에 도착한 걸리버.

    높은 산에 올라 아래 세상을 굽어보라. 거기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장난감처럼 보이고, 세상 모든 일이 장난처럼 여겨진다. 반면 확대사진을 본 적 있는가? 현미경으로 확대한 파리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땀구멍까지 드러나도록 클로즈업해 찍은 얼굴 사진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이렇게 시각을 바꾸어 익숙한 것에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것을 ‘낯설게 하기’라 부른다.

    걸리버도 비슷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장난감만한 소인국 릴리퍼트(LiliPut)의 주민들은 구두 굽의 높낮이로 당파를 가르고, 달걀의 어느 쪽을 깨느냐를 놓고 전쟁을 한다. 그들은 마냥 진지하나, 우리 눈에는 하찮아 보일 뿐이다. 대인국 ‘브롭딩낵(Brobdingnag)’은 또 어떤가. 걸리버는 유모의 젖가슴을 보고 구역질을 한다.

    “젖가슴의 둘레는 5m, 젖꼭지는 내 머리 크기의 절반 정도였다. 주위에는 여드름과 주근깨, 여러 개의 점들이 아주 더럽게 나 있었다.”

    걸리버가 본 영국은

    숲의 한가운데서 숲 전체를 볼 수 없듯이 제 문화를 보려면 밖으로 나와야 한다. 제 문화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조너선 스위프트는 걸리버로 하여금 여행을 하게 만든다. 네 번의 여행 끝에 걸리버는 드디어 자기 문화를 낯설게 보는 방법을 배운다. 여행에서 돌아온 걸리버의 눈에 비친 영국 사회는 그야말로 역겹기 그지없는 곳이다. ‘걸리버 여행기’가 오랫동안 아이들이 읽는 동화로 전락(?)해야 했던 이유도 실은 이 때문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원래 어른을 위한 신랄한 풍자문학이었다. 스위프트에게 풍자란 “제 자신의 얼굴을 빼고 다른 모든 이의 얼굴을 알아보는 거울”이었다. 하지만 풍자를 당하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당시 영국의 평론가들은 스위프트의 거울에서 어렵지 않게 제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불쾌감에서 그들은 풍자의 정도가 약한 여행기의 1·2편만 남기고, 그것을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만들어버렸다.

    릴리퍼트는 어디에

    이번 동남아 지진해일로 걸리버 여행기의 릴리퍼트는 정말로 유토피아(아무 데도 없는 곳)가 되었다. 스위프트에 따르면 릴리퍼트의 위치는 수마트라 남쪽. 걸리버처럼 ‘산 같은 사람’들을 집어삼킨 해일이 소인국을 온전히 남겨두었겠는가.

    풍자의 거울에 비친 시대 모순
    하지만 릴리퍼트가 어디 인도양에만 있는가? 그 섬은 당시의 영국 사회를 가리킨다. 아니, 하잘것없는 문제로 당파와 당파가 대립을 하는 모든 곳은 릴리퍼트다. 우리 국회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를 보라. 릴리퍼트의 달걀 논쟁과 뭐가 다른가?

    스위프트가 소인국을 멀리 인도양에 배치한 것은 제 문화에 비판적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다. 하지만 릴리퍼트가 마냥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릴리퍼트는 동시에 꽤 현명한 교육과 법률, 관습의 체계를 가진 긍정적 유토피아로 묘사된다. 이상한 나라의 이 이중성이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브롭딩낵은 중국?

    대인국에도 부정성과 긍정성이 공존하나, 그곳을 다스리는 왕은 서양인들이 흠모한 청나라 강희제와 비슷한 현자로 그려진다. 걸리버는 왕에게 영국의 발달한 무기 제조술을 가르쳐주려 한다. 하지만 “적국이나 경쟁국이 없는” 대인국의 왕은 그 생각에 혐오감을 드러내며 총포의 비밀을 아느니 “차라리 왕국의 절반을 잃겠다”고 대꾸한다. 중국인들이 전쟁술을 발전시키지 않는 것은 그들의 심성이 선해서라는 라이프니츠의 말을 생각해보라.

    브롭딩낵은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쪽에 붙어 있는 반도. 하지만 이 대인국에서 나는 유럽에서 이상화된 중국의 이미지를 본다. 대인국 왕과의 대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두 세계 사이의 비교문화론이 전개된다. 걸리버가 지난 한 세기 동안 영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얘기해주자 브롭딩낵의 왕은 “그대의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그대의 민족 대부분이 세상의 표면을 기어다니는 생물들 가운데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천공의 섬, 라퓨타

    ‘걸리버 여행기’의 정점은 사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두 편의 여행기다. 거기에 ‘모던(morden)’의 문명에 대한 최초의 문명비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보자. 이미 17세기에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미적분으로 자연을 수학화하는 데 성공했다. 18세기는 이 이론적 지식을 실용적 기술로 바꾸려던 시대. 신의 손에 맡겨져 있던 세계를 이제 인간이 정복하기 시작했다. 일단 터진 둑은 걷잡을 수 없는 법. 이 새로운 물길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스위프트는 과학에 대한 당대의 맹목적 신뢰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세 번째 여행기에서 그는 당시의 과학자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천공의 섬 라퓨타에 사는 이들은 오로지 수학과 음악에만 관심이 있다. 식사로 제공된 빵과 고기마저 원형, 사각형, 정삼각형, 사다리꼴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를 하고 있을 정도다. 이는 괜한 설정이 아니다. “인간이 외계인을 만나더라도 수학과 음악은 일치할 것”이라 했던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호이겐스의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풍자의 거울에 비친 시대 모순
    라퓨타의 수도 레가도의 아카데미에서는 별 희한한 실험이 행해지고 있었다. 오이에서 태양광선을 추출해 정원에 빛을 대는 실험, 인간의 대변을 다시 음식물로 되돌리는 실험, 촉각과 후각으로 색을 구별하는 실험. 누에 대신 거미에서 실을 뽑는 실험, 기계 장치로 알파벳을 조합해 책을 쓰는 실험, 심지어 대변의 색을 분석해 그것을 싼 이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실험. 이게 가능한 것은 “사람이 변기에 앉을 때면 언제나 생각이 깊고 열심이기 때문”이란다.

    어처구니없지만, 촉각으로 색깔을 판별하고 거미에서 실을 뽑는 등 스위프트가 소개한 실험들의 상당수는 당시 영국의 과학회에 실제로 보고된 것들이다. 가끔 ‘걸리버 여행기’를 SF(과학소설)로 볼 수 있느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진다. SF가 과학에 기초한 공상이라 한다면 ‘여행기’는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이다. 하지만 SF가 과학의 가능성에 대한 어떤 태도를 의미한다면, ‘여행기’는 SF가 아니다. 이 모든 실험을 스위프트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행기’는 과학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과학의 현재에 대한 풍자다.

    야후의 말 되기

    스위프트는 보수적인 영국 토리당의 논객으로서 모던의 과학만큼 모던의 정치도 마땅치가 않았다. 과거의 정치학은 주로 이상적 군주의 덕을 논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마키아벨리는 그 유명한 ‘군주론’에서 현실적 군주의 술수를 논했다. 이 책에 묘사된 현실의 군주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다. 과거에 정치는 덕의 실현이었으나, 현재의 정치는 이해의 다툼이 되어버렸다. 스위프트는 이 현실에 분노한다.

    ‘모던’의 정치에 대한 풍자는 라퓨타 편에 이미 나타난다. 거기서 스위프트는 그곳의 정치학자들에게 음모 꾸미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중 하나가 애너그램(anagram)을 이용한 것이다. 가령 “우리 동생 톰이 치질에 걸렸다(Our Brother Tom has got the Piles)”라는 편지의 문장을 철자의 위치를 바꾸어 “반항하라. 음모가 절실하다. 여행을(Resist-a Plot is brought home-the Tour)”이라고 읽으라는 식이다. 이 농담을 라퓨타의 정치학자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는 것이다.

    현실에 좌절한 스위프트는 ‘말의 나라’에서 이상향을 발견한다. 그 나라의 이름 ‘휴이넘(Houyhnhnm)’은 ‘히히힝’이라는 말의 울음소리를 본뜬 것이라 한다. 우아한 휴이넘들은 자연적으로 많은 덕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절제, 근면, 운동, 청결을 교육받고 서로 우정과 사랑으로 결합한다. 그들은 욕망·정욕·질투·무절제를 모르며, 그들의 언어에는 아예 ‘악’이라는 낱말이 없다. 말들이 실현한 플라톤의 이상국가인 셈이다.

    반면 휴이넘들의 수레를 끌며 사는 인간 짐승들은 하나같이 교활하고 음탕하기 그지없다. 이들은 ‘야후(yahoo)’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유명한 인터넷 검색 엔진의 이름은 바로 여기서 따온 것이다. 말의 나라에서 걸리버는 고귀한 말들에게 감화돼 말이 된다. 고향에 돌아와 가족을 만난 그는 자기가 “야후들의 아버지이며 더러운 야후와 성교를 했다는 생각”에 “수치심”을 느낀다. 아내가 키스를 했을 때에는 역겨움에 “한 시간 동안이나 기절을 했다.” 인간보다 말들을 더 좋아하게 된 그는 마구간에서 하루 네 시간씩 말들과 대화를 하며 보낸다. “나와 말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혐오스런 인간, 사랑스런 말

    마구간의 걸리버는 말 앞에 꿇어앉아 데카르트를 대신해 눈물의 사과를 했다는 니체를 연상케 한다. 이성이 없다는 이유에서 살아 있는 말을 자동기계로 간주한 것은 데카르트와 같은 근대 이성주의자들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하지만 스위프트는 니체와 달리 이성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의 올바르지 못한 사용을 비판할 뿐이다. “영국의 야후들은 타고난 이성을 이용하여 악덕을 향상시켰다.”

    짐승 같은 야후는 홉스의 정치철학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늑대로 보고, 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야후에 대한 스위프트의 혐오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가 아니다. 그것은 모던의 인간, 즉 홉스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역겨움에 가깝다. 이는 정치가 아직 덕의 실현이었던 고대를 그리워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라퓨타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글룹둡드리브(Glubbdubdrib)’에서 걸리버는 마법의 힘으로 죽은 자들을 불러낸다. 알렉산더, 한니발, 시저, 특히 브루투스에게서 “완전한 덕, 비길 수 없는 용맹, 조국에 대한 애국심, 인류에 대한 사랑”을 본다. 마법의 힘으로 불러낸 로마의 원로원은 “영웅과 반신반인의 모임”이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국회는 “소매치기, 강도, 깡패들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보수주의자의 풍자

    스위프트는 천공의 섬을 터무니없는 공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엔 그가 말한 자기부상의 원리로 기차를 공중에 띄우고 있다. 라퓨타의 과학자들은 화성에 두 개의 달이 있다고 보았는데, 공교롭게도 100여년 후 그곳에서 정말로 두 개의 달이 발견된다. 오이에서 태양광선을 추출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식물의 기름은 광합성의 산물, 그것으로 빛을 낼 수 있지 않은가. 기계로 알파벳을 조합해 텍스트를 쓰는 실험, 현대문학의 ‘울리포’ 그룹(1960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전위문학 단체)에서는 이미 컴퓨터로 시를 쓴 바 있다.

    게다가 정치는 더 이상 덕의 실현이 아니다. 물론 미국의 정치철학자 매킨타이어처럼 정치를 다시 덕의 실현으로 만들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관에 맡길 일이다. 그렇지 않고 국가에서 특정한 가치를 ‘덕’으로 강요할 경우, 그 사회는 전체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스위프트는 모던의 과학과 모던의 정치를 신랄하게 풍자했으나, 역사의 흐름은 외려 그의 풍자를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이는 기독교의 목사이자 보수당의 당원으로서 스위프트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우스워지는 게 보수적 풍자의 운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비판의 힘을 잃은 스위프트의 풍자는 당대를 넘어 문학의 고전으로 남았다. 나 역시 스위프트처럼 정치적 풍자를 한다. 사실 진보적 태도를 취하기만 하면 널린 게 풍자할 거리다. 하지만 그 풍자가 당대를 넘어서려면 정치적 올바름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의 본질은 정작 그 부족한 부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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