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3

2005.02.22

“감동의 42.195km … 자폐아의 레이스 보여주마!”

  • 입력2005-02-17 1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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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동의 42.195km  … 자폐아의 레이스 보여주마!”

    정윤철 감독의 데뷔작 ‘말아톤’은 자폐아 초원이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신인 감독들의 데뷔작을 보면서 확실히 한국 영화의 토대가 튼튼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말아톤’으로 데뷔한 정윤철 감독은 서울단편영화제 대상을 받은 ‘기념촬영’(97년)과 ‘동면’(99년) 등 두 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했을 뿐이지만, 장편 데뷔작으로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한 연출 내공을 보여준다. 지난해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이 그러했던 것처럼 ‘준비된 감독’들의 데뷔작은, 그들의 주무기일 수밖에 없는 신선함에다 탄탄한 완성도를 더해 우리들의 주목을 끈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이 짧은 질문과 대답이 우리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이유는, 자폐아 소년이 3시간 내에 마라톤 완주를 하는 ‘서브3’를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 성공의 휴먼드라마에 머물 수 있는 소재는 정 감독의 튼튼한 연출력에 의해,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공공의 적2’ ‘그때 그사람들’과 함께 설 연휴 대목의 영화전쟁 3파전에 가세한 ‘말아톤’이 과연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지 지금 예측하기는 힘들다. 개봉 첫 주 흥행 성적은 ‘말아톤’이 전국 70만명을 넘기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2’가 시네마 서비스의 막강한 배급력에 힘입어 전국 100만명을 넘기고 있으며, ‘그때 그사람들’이 3분 정도 삭제하라는 법원 판결 부분을 무지화면으로 내보내겠다는 결정을 했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올해 한국 영화는 ‘말아톤’의 정 감독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71년생으로 34세인 그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90학번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예술인력 지원제도였던 삼성 멤피스트에 선정되어 99년부터 1년 동안 호주국립영화학교 편집과정에서 연수를 받았다.

    “편집이 연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편집과정을 공부했다. 영화 찍을 때도 편집 생각하면서 찍으면 나중에 오차를 줄일 수 있다. 나는 처음 시나리오 쓸 때부터 마지막 편집을 생각한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영화사 시네라인에서 다른 작품을 준비하다가 2002년 8월 말 KBS TV ‘인간극장’에서 방영된 ‘달려라 내 아들’을 본다. 그리고 그 주인공인 배형진군의 수기 ‘달려라 형진아’를 읽는다. 그때부터 1년 넘게 시나리오 작업에만 매달리면서 열 번을 고쳐 쓴 뒤, ‘말아톤’은 2004년 9월 크랭크인해서 12월에 촬영을 마쳤다. 극장 개봉 날짜가 미리 잡혀 있었기 때문에 후반 작업을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끝마쳐야 했다.

    -영화가 개봉됐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어떤가?

    “가장 기분 좋은 것은 초등학생은 물론 여섯 살짜리 애들도 재미있게 본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뭔가 생각해보았더니, 영화의 대사나 시추에이션이 다섯 살 지능의 초원이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잔소리하는 것, 실내에서 방귀 뀌지 말라는 것이 아이들에게 정서적 동질감을 주는 데 기여한다. 부모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 존재로 초원을 바라본다.”

    “감동의 42.195km  … 자폐아의 레이스 보여주마!”
    -자막에 실화라는 것을 밝혔다.

    “엔딩 자막을 빼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내가 끝까지 우겨서 삽입한 이유는, 자폐아나 장애인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우리랑 다른 사람일 뿐이라는 인식을 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면 인간성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존중해주는 시선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폐아를 둔 엄마들이 영화 속의 어머니처럼 철인3종 완주시키고 마라톤 완주시킬 수는 없다. 형진이 엄마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다른 어머니들도 각자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야기로만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폐아를 둔 가족의 고통이 너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현실은 훨씬 더 참혹할 것이다. 장애아를 낳은 상당수의 부부들이 이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영화 속의 가족 구성원들은 작은 갈등도 있지만 현실에 비해서 너무 미화되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실화의 한계다. 코치랑 엄마 사이에 로맨스가 일어날 수도 있고, 아버지가 이혼을 요구하는 것을 통해 가족이라는 것을 해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실화에 많은 것을 빚졌다. 배형진군의 가족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가족 내부의 균열을 파고드는 데 한계가 있다.”

    “가족의 문제보다 자폐아 초원이를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실화에서 기본 소재만 가져온 뒤 철저하게 허구적으로 재구성할 생각은 왜 하지 않았는가?

    “그럴까도 생각해보았다. 예를 들어 ‘8마일’(랩 스타 에미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 그런 형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있는 구조는 두되 그 안에 깊이 들어가자. 초원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엄마와 자식의 관계에 집중했다. 코치는 실화에 없는 새로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인데, 기존의 틀을 다 부수고 재창조하는 것보다는 있는 상태에서 어떤 부분만 깊이 있게 파자고 생각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가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엄마의 캐릭터를 파고들어야 한다. 나는 초원이라는 자폐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초원이가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자폐아는 자기 의지가 없기 때문에 수동적이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초원이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다 쏟았다.”

    -실화가 주는 압력을 어떻게 견디었는가?

    “엔딩에 배형진군이 영감을 주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실제 그대로 다루면 영화가 재미없을 거라고 이해를 해주셨다. 이 영화를 통해서 자폐라는 것이 조금 더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돋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열린 사고로 도움을 주었다.”

    -각색은 어떤 점에 중점을 두었는가?

    “원작을 각색해서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곧이곧대로 하느냐가 아니라 원작이 주는 어떤 핵심적 영감을 제대로 전달하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 사건이 있지만 그것이 총체적으로 주는 감동을 영화에서 줄 수 있다면, 디테일한 것이 달라져도 순서가 바뀌어도 허구가 섞여도 괜찮다.”

    “감동의 42.195km  … 자폐아의 레이스 보여주마!”

    ‘말아톤’ 촬영 현장에서의 정윤철 감독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데 중요한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다 드러내지 않고 세밀하게 복선을 깔아 구축하는 방법이 돋보였다.

    “20년 넘은 한 인물의 성장을 다룬 영화다. 어미가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면 그것이 나중에 아이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씨앗을 뿌려 열매를 거두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가슴 아프게 힘든 상황에서, 어떤 경우에는 무심코 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엉뚱한 순간에, 엄마가 인식하지 못한 순간에 결실로 나타나면 보람을 준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영화의 이런 핵심 포인트들은 엄마의 결실을 보여주기 위한 복선이다. ‘대부1’의 구조도 많이 참조했다. 말론 브란도에게서 알 파치노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주인공이 옮아간다. ‘말아톤’에서도 전반부의 어머니에게서 후반부의 초원이로 핵심이 이동한다. 터닝 포인트는 지하철역 신이다.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라고 초원이가 외치는 부분부터 초원이가 주인공(!)으로 올라선다.”

    -중첩되는 이야기들은 작품 전체에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대폭발을 이루는 거대한 구조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구체적인 이유를 대자면 기승전결 구조를 갖춘 정통 드라마를 해보고 싶었다. 한국 영화에는 그런 게 별로 없는데, 처음에 총이 보였으면 나중에 발사되는 그런 구조, 기본적인 클래식한 구조를 마스터해보자,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보면 너무 과도한 장치로 많이 쓰이지 않았나 싶다.”

    “장편영화는 교향곡 … 지루하지 않게 템포에 변화에 주력”

    -리듬감이 좋다. 격렬한 대화가 이어지다가 인물 내면의 흐름이 외적 풍경으로 전이되면서 흐름의 완급을 조절하는 방식도 눈에 띄었다.

    “정적인 장면 다음에 동적인 장면을 배치했다. 동적인 것을 느끼려면 정적인 것이 있어야 대비된다. 장편영화는 교향곡이다. 큰 악기가 큰 소리를 내고 흐름이 빨라지는 대편성으로 가기 전에 휴지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극을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템포의 변화이지 빠르기가 아니다. 변화하는 템포는 ‘살인의 추억’을 참조했다.”

    -코치라는 캐릭터는 가족 내부의 시선이 아닌 외부의 시선으로 초원을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너무 비중도 적고 드라마적 힘도 약하다.

    “코치는 관객들과 감독의 시선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원래는 비중이 많았는데 코치 비중을 줄인 이유는, 찍으면서 엄마와 초원에게 이야기를 더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원이가 수동적인 아이여서 자신의 위치가 중반까지 드러나지 않고 주변 사람에 의해 영화가 진행된다. 주변 사람의 변화는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초원에게 힘을 실어주다 보니 엄마가 강조된 것이다. 마지막, 엄마의 손을 놓으면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엄마 품을 떠나는 자식의 이야기로 정리가 되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코치가 기러기 아빠였고, 아내가 아이들 데리고 뉴질랜드로 이민 가 있?때문에 엄마라는 캐릭터에 반감이 있는 인물로 설정됐다.”

    -기교적인 측면에서 전략이 있었다면.

    “연출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후반부에 클로즈업을 쓰는 것이었다. 클로즈업은 총알이 아니라 대포라고 생각한다. 총알이 떨어지면 수류탄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만 후반부까지 나는 참았다. 초반에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컷을 나누지 않았다.”

    “감동의 42.195km  … 자폐아의 레이스 보여주마!”

    그는 조승우의 연기에 대해 ‘신들렸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극찬한다.

    -마라톤 영화를 찍으면 감독도 마라톤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2003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에 참가해서 직접 뛰었다. 스프링클러는 그때 보고 영화의 마무리 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말아톤’을 본 사람들은 적어도 마라톤이 42.195km라는 것을 확실하게 기억할 것이다. 초원이는 ‘사십이일구오점 킬로미터’라고 말하지만. 그리고 초원 역의 조승우를 잊지 못할 것이다. 하이 톤의 가는 목소리로 자폐아를 연기한 조승우의 연기는 신들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후아유’ ‘하류인생’ 등에서 미완의 기대주였던 그는 이제 한 사람의 큰 배우로 성장했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김미숙은 우아한 캐릭터에서 벗어나 자폐아를 기르는 어머니의 모성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내면의 깊은 곳으로 끌고 가는 힘은 약하지만, 모성의 움직임은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감동의 42.195km  … 자폐아의 레이스 보여주마!”
    -영화 속의 초원이가 어떤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는가?

    “장애가 완치되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가 책임감에서 벗어나 좀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가족에게 신경 쓰고, 가족이 화합했으면 좋겠다. 초원이는 달리는 것을 좋아하니까 계속 뛰고 싶을 때 뛰면서 즐거움과 환희를 느꼈으면 좋겠다. 비장애인들처럼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문학에 심취하거나 결혼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초원이에게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그는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결국 무엇이 더 크고 무엇이 더 값어치 있는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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